거칠고 조잡한 욕망을 세련된 형태로 만드는 게 교양의 힘이다. 그건 학교는 물론 학원에서도 가르치는 게 아니다. 스스로 감수성을 훈련하는 수밖에 없다. 흑인 친구를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놀리거나 외국인 노동자를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차별하는 한심한 태도는 누가 바꿔주지 못하는 것이다. 메마른 감성의 눈을 뜨는 길 말고 다른 길이 없다. 그런데 그 둔감한 감수성은 누가 일깨워주나. 영화는 좋은 교양의 학교가 될 수 있는가. 문제는 이 까다롭고 거추장스러운 인권이라는 주제를 건드리면서 영화적 깊이도 훼손하지 않고 영화적 즐거움까지도 포획할 수 있느냐는 거다. 박찬욱 감독이 <여섯개의 시선> 중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에서 보여준 것처럼.
<여섯개의 시선>의 박찬욱, 박진표, 임순례 그리고 <다섯개의 시선>의 류승완, 정지우에 이어 정윤철, 노동석, 김곡·김선 등이 <시선> 세 번째 작품을 만들었다. 영화 경력을 따진다면 이번 세 번째 시선은 이전의 두 시선들보다 훨씬 젊다. 세상을 보는 시선을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 미만한 차별을 들춰내는 시각은 좀더 깐깐하고 섬세하다. 거꾸로 말하자면 우리는 더욱 야만스러워진 사회에 살고 있다. 같은 반 친구의 성적 취향을 반대하느라 합심해서 돌을 던지고, 생일잔치에 놀러온 친구의 피부빛을 문제 삼으며, 노조 사무실에 들른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차디찬 경멸의 시선을 던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여섯 편의 영화 가운데 만듦새의 조화로움과 시각적 쾌감을 말하자면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이 연출한 첫 번째 이야기 <잠수왕 무하마드>를 골라야 할 것이다. 제목에서 모든 게 드러났듯이 고향에선 잘나갔던 그러나 지금 현실에선 불법체류 노동자 무하마드의 이야기다. 카메라는 땅과 물속을 가볍게 넘나든다. 우리는 마치 무하마드의 마음속을 유영하듯 대중 목욕탕의 욕조 안으로 따라들어간다. 그리고 열대어들과 함께 헤엄을 치다가 다시 현실의 사우나로 귀환할 때 그 아득한 낙차를 경험한다.
왜냐하면 지금 무하마드는 팔자 좋게 사우나를 하러 온 게 아니라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을 피하느라 작업반장에게 등떠밀려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귀에는 오늘은 일당없다는 작업반장의 말이 위태롭게 걸려 있다. 물론 덤으로는 무하마드의 피부 빛깔에 대한 말도 안 되는 험담이 있다. 작업반장의 파산 상태에 가까운 인권의 감수성은 실은 새로울 것도 없다. 그는 우리 사회의 평균치 인종적 편견을 별 생각없이 지껄였을 뿐이니까. 실은 무하마드가 고국에 가면 유명한 잠수왕이라는 전설도 새로울 게 없다. 동남아 노동자들이 자기들 고향에선 고등학력이니 무시하면 안 된다는 투의 농담에 대한 변주일 뿐이니까. 새로움은 그거다. 유독성 가스를 거의 걸러내지 못하는 마스크 따위는 하지도 않고, 밀폐된 가스 작업실 안으로 뚜벅뚜벅 들어가는 무하마드의 발걸음. 무하마드는 공중목욕탕을 고국의 아름다운 바다로 둔갑시키는 상상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래서 그 발걸음은 당당하면서도 아름다우면서도 슬프다. 아마 그 발걸음의 끝은 가스 중독일 것이다. 유독 가스 무방비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포갠 수작이다.
가장 시끄러운 영화는 <반변증법> 등으로 베니스영화제 등에 초청을 받았던 김곡·김선 감독의 <BomBomBomb>이다. 이 영화는 타인의 존재가 내는 소리를 모두 소음으로 알아듣고 귀를 감는 우리 마음의 벽에 대고 소리친다. 인권을 존중하자 따위의 구호를 확성기에 대고 소리치는 게 아니라, 도덕적인 양자택일이라는 칼날로 벽을 겨눈다. 왕따 편들었다가 같이 왕따 당할래, 아니면 모른 척 지나갈래?
김곡·김선 감독은 이 맹랑한 질문을 어디를 향해 던지느냐 하면 동물원 우리 같은 남자고등학교 교실에 던진다. 아이들은 악다구니처럼 집요하게 마선을 동성애자로 낙인찍어 괴롭힌다. 교실 한가운데로 몰아 바지를 벗기는 것 따위는 기본이다. 그것도 모자라 안테나를 넓혀 마선의 애인 리스트를 짠다. 그것은 마녀 사냥의 목록이다. 마선에게 알게 모르게 마음이 쓰이던 마택은 밴드부 오디션을 마선과 함께 보면서 가까워진다. 마선의 드럼 박자에 마택의 베이스가 저도 모르게 착착 달라붙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택은 이제 마녀 사냥의 수중에 떨어질 운명이다. 아이들은 악착같이 들러붙어 마택에게 묻는다. 너는 어느 편이냐고. 이제 감독은 우리에게 마이크를 넘긴다. 너는 누구 편이냐고. 마선의 드럼 소리가 더 클까, 아니면 유리창을 부서져라 두들기며 동물원 놀이(왕따를 교실에 가두는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더 클까.
그런데 사실 이런 태도는 너무 고급스럽고 한가한 것인지도 모른다. 홍기선 감독은 아주 투박하다 못해 촌스러운 목소리로 <나 어떡해>에서 하루살이 인생의 절규를 들려준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형식에 드라마를 붙였다.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얘기를 듣고 도씨는 회사에 월차를 요청하지만 중간관리자들은 대뜸 면박을 준다. 노조에 하소연하러 가보지만 상근 사무원은 노조 사무실에 비치된 팸플릿도 만지지 못하게 한다. 마음을 달래보려 성경을 빌리러 회사 도서실로 갔다가 도씨는 더 큰 수모를 당한다. 이쯤 되면 이건 교양이니 인권의 감수성이니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살고 죽는 절박한 문제다. 이 목소리는 얼마나 멀리까지 들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