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론으로 말하자면, 팀 버튼의 세계는 데뷔작인 스톱모션애니메이션 <빈센트>(1982)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스톱모션애니메이션 <Requiem>을 만들어 9월의 상상마당 우수작으로 뽑힌 나지인 감독을 팀 버튼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같아 보이지만, 두 감독 사이의 이상한 공통점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나지인 감독이 사실상의 데뷔작 <Requiem>을 완성한 것은 2004년, 그러니까 만 24살 때로 팀 버튼이 <빈센트>를 만든 때와 같다. 두 영화의 러닝타임 또한 6분으로 엇비슷하다. 그리고 고딕호러풍의 <Requiem>의 기괴한 요소들은 <빈센트>에서 팀 버튼이 보여준 세계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실제로도 “팀 버튼의 세계를 너무 좋아한다”는 그의 <Requiem>은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있다. 중세시대가 배경인 듯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빨간 눈을 가진 한 소녀. 마을 사람들은 소녀의 어머니가 마녀라면서, 그리고 소녀의 눈 색깔이 자신들과 다르다면서 이들 모녀를 괴롭힌다. 어느 날 소녀의 어머니는 마녀재판에 처해져 화형당하게 되고 소녀는 자신의 인형을 끌어안고 “다시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Requiem>의 백미는 스타일이다. 감독이 직접 만든 구관절 인형들과 콘트라스트 강렬한 조명과 표현주의적인 화면 효과는 어딘가 섬뜩한 느낌을 전한다. 또 이 고딕호러풍의 비주얼 스타일은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한 모차르트의 <레퀴엠>과 만나면서 좀더 완결성을 얻는다.
영화와 대조적으로 쾌활한 분위기의 나지인 감독은 “대학(세종대 애니메이션학과) 때 구상한 작품인데 당시엔 내면이 어두웠던 것 같다. 20대 초반이란 게 질풍노도의 시기 아니냐”고 말한다. 그는 남들과 다른 취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왕따당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이 영화를 구상했다. 이런 주제의식은 B급 호러영화를 좋아하는 그의 취향과 만나면서 고딕호러풍의 마녀사냥 이야기로 자연스레 발전했다. <마리오네트>란 제목의 습작을 만들어본 경험은 있었지만, 이 영화를 현실화하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10여개의 인형과 세트에 들어갈 집, 가구 등을 제작한 것도, 인형을 미세하게 움직이며 프레임을 하나하나 촬영한 것도 그 혼자였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촬영해서 얻은 500장 중 쓸 수 있는 프레임을 추리고 나면 5초도 안 됐다.” <Requiem>은 그가 그렇게 2년 반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쏟아 만들어낸 작품이다.
“어렸을 때부터 뭔가 꼼지락거리며 만드는 데 재능이 있었던” 그가 이화여대 앞의 액세서리 가게 ‘느와르 로리타샵’을 운영하고 있는 것도 새로운 애니메이션 제작비를 조달하기 위해서다. 신작은 “친구들과 숍을 오가는 고객에게서 영감을 얻은 왕따 이야기”로, 다음달부터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갈 예정이다. “앞으로도 내 힘으로 꾸준히 인형을 이용한 ‘퍼핏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그가 제2의 팀 버튼이 될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한국에서 이 분야의 개척자가 될 것만큼은 확실하다. 혹시 나지인 감독의 행적이 궁금하다면 그의 온라인 쇼핑몰이자 작업공간(http://noirlolita.net)을 방문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2006 상상마당 단편영화 상시출품
아마추어 영화작가 발굴을 위해 KT&G가 마련한 ‘2006 상상마당 단편영화 상시출품’ 9월 우수작이 발표됐다. 9월 한달 동안 KT&G 상상마당 온라인 상영관(www.sangsangmadang.com)에 출품된 46편을 대상으로 심사를 진행한 결과, 나지인 감독의 <Requiem>, 윤여창 감독의 <여우사이(여기서 우리의 사랑을 이야기하자)>, 박지은 감독의 <Body Memories...> 세편이 우수작으로 뽑혔다. 이들에게는 창작지원금 100만원이 각각 수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