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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환기되는 집단 무의식, <가을로>

산 자와 죽은 자의 연결 시도하는 <가을로>의 미덕

벌써 11년이 지났다. 이 나라의 집단 무의식은 그 사건을 잊으려고 부단히도 애썼나보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되살아나는 침통함과 역겨움 때문에 ‘아, 이래서 그 일이 마치 없었다는 듯이 한동안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대승의 <가을로>는 한여름에 일어났던 그 재난을 짧고 충격적인 장면으로 (그러나 붕괴되는 건물의 외관과 실내장면을 매우 사실적으로) 들추어내고는 서둘러서 ‘어서 가을로 가자고’ 일련의 단풍비경으로 덮어버린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해서 그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어떤 이는 사회문제를 개인화하는 그의 방식에 불만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문제의 원인과 책임자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뿐더러 주인공들의 지워지지 않는 심리적 통증을 완화하는 것에만 철저히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이는 영화만 영화가 아니다. 스크린 위의 텍스트보다 훨씬 쇼킹한 영화는 점점 색깔이 바래지는 실제 사건에 대한 집단적 사회 기억이다. <가을로>는 비록 사회가 공유하는 이미지의 두루마기 맨 끝에 달린 반짝이는 ‘포스트 잇’에 불과하지만 관객은 실제 사건에서 느꼈던 온갖 불쾌감과 불안감을 이 영화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장면과 조합함으로써 제3의 의미를 만들어낼 것이다. 예컨대 삶과 자연을 찬양하는 해맑은 여주인공의 표정이라든가, 그녀가 라스트신에서 우리를 향해 “이곳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이 되었으면 좋겠어”라고 유언 같은 축복을 할 때 그 의미는 자못 반어적으로 전달된다. 즉, “너희들은 지금쯤 좋은 길을 걷고 있겠지?” 하는 질문 말이다. 헌팅하느라 큰 공을 들였을 것이 분명한 아찔하도록 아름다운 자연 풍광들 또한 통상의 관광이미지 이상의 의미로 재맥락화한다. 그것은 우리 머릿속에 가득 채워진 일상의 자질구레한 아이콘들을 삭제해버리고 삶과 죽음의 근본 수준에서 삼풍백화점 사건을 곱씹도록 이끄는 모니터의 텅 빈 바탕화면 같다.

영화는 삼풍백화점 사건 이외에도 또 하나의 사회 사건을 다루고 있다. 평검사인 현우(유지태)는 상부의 압력 때문에 재벌비리사건 수사를 조기 봉합하지만 이에 항의하는 여론이 격렬해진다. 검찰 수뇌부는 수사 중단에 반대했던 그에게 어처구니없게도 부실수사의 책임을 뒤집어씌운다. 그러므로 그가 부장검사의 권유로 보낸 휴가기간 동안 죽은 민주(김지수)의 흔적을 더듬는 여행은 남녀가 각각 겪은 두 사건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공통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아가 여행지에서 만난 두 남녀가 자신들을 희생자로 만든 원인들에 대해서는 내내 함구하고 서로간에 무미건조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단지 감상적이고 관조적인 여행을 계속하는 것은 무엇에 관한 환유일까?

먼저 떠오르는 것은 1945년 원자폭탄 투하 소식을 들었을 때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독일 양자물리학자들이 보인 반응에 관한 일화다. 그들은 처음에는 25년 전에 발표한 자신들의 이론이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로 현실화된 것에 경악하며 자책감에 시달린다. 그러나 다음날, 원인은 정치가에게서 비롯된 것이지 과학 이론의 연구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우라늄 핵분열 이론은 지난 수백년간 일상적으로 이어져온 과학 발전의 자연스러운 산물이기 때문이다. ‘만약 근대적 일상생활 자체를 총체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면(그 과학자들은 부정할 수 없다고 믿는 것임에 틀림없다) 원자핵 물리학 또한 부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른바 ‘문민정부’ 시절, 성수대교의 붕괴와 삼풍백화점의 붕괴, 재벌 부패 같은 사건들의 속성 또한 이와 비슷하다. 그것은 광주 시민을 총으로 난사하거나 여학생을 성고문하는 사건들처럼 책임져야 할 악당이나 타도해야 할 독재정권이 드러나는 사건이 아니다. ‘남한사회의 일상생활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 한’ 특별히 누구를 탓하기 힘든 사회 그 자체의 증상, 따라서 이 나라를 버리고 이민가버리거나 해탈의 몸짓으로 여행을 떠나버리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항변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사회의 징후였다.

김대승 감독은 전작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 누>에 이어 <가을로>에서도 산 자와 죽은 자의 연결에 집착한다. 그의 영화에서 남자주인공들은 굿판의 무당이 그러한 것처럼 죽은 연인의 목소리를 불러내어 자신의 애도 행위에 관객을 동참시킨다. 추억의 장소를 복기하는 신은 <파랑주의보>나 <연리지>에서도 보이듯이 멜로의 클리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연인의(혹은 연인과의) 죽음은 사랑의 추상적 순수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인위적 관형구만은 아닌 듯하다. 그것은 애잔한 감성을 고조시키는 장치임엔 틀림없지만 동시에 사회의 죽음 예컨대, 동성애의 불가능성, 근대적 중인에 대한 사대부의 탄압, 그리고 치명적인 미세먼지를 뿜어내는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학에 관련된 절망적 심리를 함축한다.

11년이 흘렀으나 달라진 것이 없는 오늘이다. 그렇다면 망각은 정신 건강을 위해 부지불식간에 의도된 것이 아닐까? 참살 현장의 무서운 기억이 싫어서 여행길에서 자꾸 마주치는 현우를 세진(엄지원)이 피해서 달아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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