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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계보학을 보여주다, <폭력써클>

<씨네21> 574호 <폭력써클> 프리뷰에 대한 반론

영화 <폭력써클>의 마지막은 감옥에 갇힌 상호가 죽은 재구로부터 편지를 받는 대목이다. 충격을 받은 듯 멍한 상호의 표정과 대비되면서 재구의 목소리를 통해 사연이 전달된다. 여기에는 대중영화의 결말에서 예상할 수 있는 반성적인 사연이 적혀 있다. 만약 이 편지를 조금 더 일찍 받았더라면 상호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뒤늦게 죽은 자로부터 온 한장의 편지는 의미가 있다. 편지의 사연은 상호와 친구들이 행한 지난 4주간의 행적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어쩌면 <폭력써클>도 재구의 편지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영화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폭력써클>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또 폭력영화야, 하는 것이었고, 뒤늦게 도착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늦게 도착한 재구의 편지가 인물들의 성장과 몰락을 돌아보는 데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듯이, <폭력써클>은 2001년작 <친구> 이후 무수히 반복되는 한국의 폭력영화에 대한 성찰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의미하다. 오늘날 폭력은 스크린의 안과 밖에서 넘쳐난다. 폭력이라는 테마는 <폭력써클>과 함께 개봉한 장진 감독의 <거룩한 계보>에서도 다뤄지는 것이고, 오늘날 TV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극에서도 넘쳐나는 것이다. 도대체 <폭력써클>은 폭력을 다룬 무수한 작품들과 어떤 차이 위에 위치하고 싶은 것일까. 그것은 한편의 영화를 좀더 섬세하게 들여다보기를 권유한다.

다소 편의적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폭력영화들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조폭코미디로 일컬어지는 일련의 영화들은 성인들의 세계를 다룬다. 폭력묘사와 더불어 코미디가 필수적인 것은 어른들의 세계를 진중하게 다룰 경우 생기는 현실의 잔인함이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십대들이 등장하는 폭력영화들은 주인공들의 미숙함을 윤활유 삼아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성장과정을 짚어낸다.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 <폭력써클> 같은 영화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들 영화가 과거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코미디의 부드러움 대신 지나간 시대라는 거리두기를 통해 성장담에 대한 낭만적인 분위기가 끼어들기도 하고, 유신으로 대변되는 폭력의 시대를 환기시킴으로써 <친구>와 <말죽거리 잔혹사>는 과거의 역사적 현실을 근거로 폭력의 정당성을 얻어낸다.

폭력, ‘액션과 리액션’의 단순함으로 그 자체를 묘사

<폭력써클>이 배경으로 삼는 것은 1991년이다. 대사와 영화 속 TV를 통해 범죄와의 전쟁이나 걸프전이 제시되기는 하지만 중요하게 취급되지는 않는다. 전쟁이나 정치적인 구호는 영화 속에서 일상화된 요소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폭력써클>은 이전 영화들과는 구별되는 태도를 취한다. 이 영화에 비판적인 견지를 보였던 안시환 평론가는 “폭력적 사태를 통해 성장기의 고통을 포착하는 데 성공한 작품들은 표면적으로야 ‘이유없는 반항’처럼 보일 수 있다 하더라도, 심층적으로는 그 행위에 내재된 반항의 이유를 깔아놓게 마련이고, 그것이 관객에게 정서적으로 설득력을 지닐 때 폭력적 행위는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인물들의 행위에 대해 정서적 설득력을 느끼는 것은 개인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장르적인 외피를 두르고 있는 이 작품이 여타의 폭력영화들에 비해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 측면이다.

상호의 회상시점으로 돌아가서 시작되는 축구장면에서부터 영화는 폭력적인 상황이 어디에나 놓여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축구 시합 도중에 생긴 다툼에 상호와 홍규는 대결을 펼치게 되고, 재구의 중재로 이들은 친구가 된다. 타이거라는 축구 서클을 만들면서 시작되는 이들의 출발은 ‘폭력’이었다. 상호가 회장 자리를 차지한 타이거의 모임은 재구를 괴롭히는 종석의 등장으로 전환된다. 상호와 종석 사이에 수희라는 또래의 여자아이가 얽혀들면서 이들이 선로에게 복수극을 펼치는 양상으로 발전한다. <폭력써클>은 장르의 틀 속에서 축구 모임이었던 타이거가 폭력 서클로 변해가는 상황을 짚어내고 있다.

어쩌면 안시환 평론가가 지적하는 ‘심층적인 이유’는 텍스트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텍스트 바깥에 놓여 있는 사회성을 의식한 것인지도 모른다. 위의 비판에 앞서 “물론 영화 속에는 인물들의 가족적 환경을 차등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그것이 우정으로도 쉽게 좁힐 수 없는 간극이자 갈등임을 말하고 있고, 시간적 배경을 1991년으로 설정하여 노태우 정권의 이데올로기적 전술이었던 ‘범죄와의 전쟁’이나 ‘걸프전’ 등의 사회적 맥락을 환기시키기도 하지만, 이러한 시대의 선택이 시간적 배경으로만 기능할 뿐 사건을 풍요롭게 살찌우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전략은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이미 성취한 요소라는 점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흥미롭게도 2006년의 폭력영화들은 시대성을 맥락화하려는 전작들과는 달리 텍스트의 내부를 탐색하는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폭력에 관한 메타적 서사를 구성한다. <말죽거리 잔혹사>라는 작품을 내놓은 유하 감독은 2006년에 <비열한 거리>를 선보였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변화는 조인성을 배신하는 인물이 친구이자 동시에 영화감독이라는 자기 반영성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이다. 감독의 배신행위는 폭력을 낭만화시키는 것과는 달리 더욱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응시하도록 만든다. 장진 감독의 <거룩한 계보> 역시 2000년 이후 선보인 폭력영화의 대사들을 패러디하면서 나아가고 있다. 여러 폭력영화에 출연한 정재영과 정준호라는 두 배우의 존재를 장진이 아우른다는 점에서 이미 메타적인 분석이 작동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물보단 집단 대 집단 대결을 강조

<폭력써클>은 자기 반영적인 캐릭터나 대사의 비틀기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를 충실하게 적용해 보이면서 그 안의 욕동들을 파헤치는 영화다. 자신도 모르게 폭력에 가담하게 되는 십대의 욕망(동시에 그것은 폭력 장르의 욕망이 되기도 한다)들을 반복적으로 드러내면서 전자오락실의 한 장면처럼 ‘액션과 리액션’이 충돌하는 단순함으로 폭력을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수컷들의 자기 인정욕구는 ‘타이거’ 내부에서는 상호와 재구의 대결로 함축되는 장면을 통해 계급의 갈등과 선망의 모순을 드러내고, 우정과 의리의 공동체로 믿는 타이거라는 전체 조직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TNT와 대결을 벌이면서 점차 죽음을 담보로 하는 본능의 몸부림을 친다. 이러한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상호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는 하지만 박기형 감독은 집단 대 집단이라는 대결을 이전의 영화들에 비해 훨씬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친구>는 친구들 내부에서의 배신을 사건의 핵심으로 다루고 있고, <말죽거리 잔혹사>는 권상우가 연기하는 현수의 개인화된 모습에 집중한다. 그에 반해 <폭력써클>은 상호가 이끄는 타이거와 종석이 이끄는 TNT와의 물리적 충돌을 파국으로 다룬다.

원래 폭력(violence)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비스(vis)에서 유래했다. 비스는 ‘무력, 위력’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암시적으로는 ‘수량, 군중’의 뜻도 포함하고 있다. 폭력의 가장 가혹한 상황은 집단과 집단의 구도 속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이며, <폭력써클>은 이 점을 끝까지 이끌고 간다. 상호와 재구를 제외한 타이거의 보조적 인물들은 개인의 신념보다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가게 되는 상황을 반복한다. 그것이야말로 수컷들의 소속감인 동시에 우정이라는 것의 모순된 실체이고, 하나의 집단에 속하기 위한 수컷들의 인정투쟁을 의리를 중시하는 폭력영화의 장르적인 감각으로 포착하는 대목이다.

‘남성 편견’에서 벗어난 여성캐릭터

<폭력써클>의 또 다른 지점은 여성이다.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가 비판받았던 중요한 설정 중 하나는 남성영화 속에 묘사된 여성의 위치였다. <친구>의 주인공 유오성은 여성을 창녀로 취급하고 있으며, <말죽거리 잔혹사>는 현수의 눈을 통해 ‘은주’를 이상화한다. 성녀와 창녀로 나뉘는 ‘남성 편견’에 가깝다. 그에 반해 <폭력써클>의 수희는 일탈적인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자기 주장과 판단력을 가진 여성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 당구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상호를 저지하는 것도, 남성 폭력에 각성적인 발언을 하는 것도 수희의 몫으로 주어진다. 종석과 상호가 매한가지라고 언급하는 그녀의 발언은 폭력의 동질성에 대한 의미있는 발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폭력써클>을 단순히 폭력영화들에 대한 동어반복이라고 보는 것은 손쉬운 판단인 듯하다.

장르영화의 본성이 그러하듯이 몇 가지 요소에 집중하다보면, 서로 엇비슷한 요소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르영화의 역사가 진술하듯이 장르 역시 전작들을 비판하면서 조금씩 변화해가게 마련이다. 마치 존 포드의 말년 서부극이 정통적인 서부영화라기보다는 자신이 만들어온 행적에 대한 메타적인 영화로 보이는 것처럼, 2006년의 폭력영화들은 일정한 반성 위에서 장르를 반복하고 있다. 폭력의 연출 면에서도 이 영화는 점진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처음에 상호와 홍규가 원을 그려놓고 대결을 펼칠 때에는 액션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규율 안에서의 싸움을 강조하면서, 장르적인 감각의 액션을 펼쳐 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절정인 당구장 안에서의 액션은 규칙이 있는 싸움이 아니라 무규칙으로 살인을 일으키는 비극으로 변화하고 있다. <폭력써클>은 상투적인 폭력장면의 전시에 머문 영화라기보다는 세련되지는 않을지언정 음미할 만한 구석이 많은 폭력의 성찰과 변화상을 제시한다.

<폭력써클>은 한국영화에서 반복되는 폭력을 계보학적으로 성찰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십대의 폭력 드라마가 어떤 한계와 유의미성을 지닐 수 있는지를 살펴보게 만든다. <폭력써클>은 십대가 나오는 드라마지만 십대가 볼 수 없는 등급을 받았다. 아마도 이 점은 기획단계에서부터 의식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폭력의 전시는 스스로 상업적인 탈을 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업적인 제한에 걸리도록 만들어버린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조폭코미디가 아니라, 낭만적인 폭력영화가 아니라, 과도한 폭력성에 함몰된 십대를 묘사하는 것은 충분히 도발적일 수밖에. <폭력써클>은 여전히 장르의 쾌감 위에 현실의 욕망을 세우려는 자기 모순의 드라마를 펼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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