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칼라의 시인, 좌파영화의 십자군이라 불리는 켄 로치의 열네 작품이 한국을 찾는다. 올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부터 초기 걸작 <케스>, 그를 문제적 감독으로 주목하게 한 TV영화 <캐시 컴 홈>을 아우르는 열네 작품이다. 동숭아트센터(10월27일∼11월9일)와 시네마테크 부산(11월10∼26일)에서 한달간 이어서 상영한다. 70이 된 오늘까지 40여년, 줄기차게 정의와 평등에 관해 발언해온 켄 로치의 거의 모든 것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다.
‘바리케이드를 향해.’ 일명 바르샤바 혁명 행진곡이 낡은 흑백영화에서 흘러나온다. ‘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자… 바리케이드를 향해.’ 아무런 무기도 없이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만으로 팔을 휘두르는 스페인 젊은이들의 모습이 비친다. <랜드 앤 프리덤>(1995, 이하 필모그래피 참조) 첫머리다. 켄 로치의 영화 40년은 바리케이드를 향한 40년이기도 하다. 억압받는 민중의 연대를 호소하는 뜨거운 노래이자, 자유를 향한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을 함께 나누는 노래가 바로 그의 영화이다.
켄 로치는 1936년 영국 워릭셔주 너니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기기술자였고 켄 로치는 노동자라는 아버지의 정체성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전쟁 때문에 이사를 자주 다녔다. 공군에서 타자병으로 제대한 뒤 옥스퍼드 세인트 피터스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학교 실험극단에 들어간 뒤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아버지의 실망은 대단했다. 옥스퍼드 법대를 그만두다니). 버밍엄 인근 레퍼토리 극단에서 배우 생활에 정열을 불태웠지만 노인 연기나 대역을 주로 했다. 연기는 “아마도 영국에서 가장 형편없었다”고 고백한다. 극단에서 애거사 크리스티의 살인물을 연출하다가 <ABC>에 들어가 조연출로 방송에 입문했고 <BBC>로 옮겼다. 후일 프로듀서로 함께 일할 토니 가넷을 만나, 스튜디오 안에서 찍어내는 드라마가 아닌 논쟁적이고 정치적인 드라마를 만들며 주목받았다. 다큐멘터리 스타일과 프랑스 뉴웨이브의 신선함, 현장 중심 촬영의 미학적 시도 속에 홈리스, 청소년, 마약중독, 낙태, 노동조합 문제를 담았다. <캐시 컴 홈>을 만든 이후 방송국 관료주의에 질린 두 사람은 독립적으로 <케스>를 만들었고 이 작품으로 켄 로치는 그만의 영화 스타일을 얻는다. 켄 로치는 가넷과 결별한 뒤 대처 시대를 거치며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지만 열악한 배급과 검열, 자금 부족으로 “가방을 들고 거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절망적으로 투자를 받으러 다니느라” 고생을 했다. 1990년대 <채널4>의 투자를 받고, 프로듀서 샐리 히빈과 레베카 오브라이언과 결합하며 켄 로치는 노동자를 내세운 뛰어난 극영화들을 만들었다.
켄 로치의 영화가 살아남은 까닭은 진지하고 무거워서가 아니다. 그의 드라마는 관객을 흥분시킨다. 좌파의 위대한 유산을 품고 그걸 밀고 올라가지만 그 속엔 캐릭터의 활기와 생기가 넘치는 드라마가 있다. 켄 로치의 캐릭터들은 울고 웃고 노래하고 공을 차고(로치는 바스시티 FC의 서포터다) 배신하고 배신당하고 다시 일어서며 관객의 가슴 어딘가에 숨어 있던 방아쇠를 찾아내 격발시키고 만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오감으로 즐겨야 할 무엇이다. 마치 마음을 끓어오르게 하는 노래 <바리케이드를 향하여>처럼. 그리하여 켄 로치의 영화를 즐기는 다섯 가지 방법(스포일러가 있으니 조심하시오).
1. 노래하고 외치고-켄 로치의 정치성
켄 로치의 영화를 즐기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아마 일어나 박수를 치거나 함께 노래를 따라부르거나 서로 팔짱을 끼고 스크럼을 짜서 극장 밖으로 나가거나 구호를 따라 외치는 일일 것이다. 물론 마음속으로. 많은 켄 로치 영화들이 루저, 노동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의 각성을 그린다. 함께 부르는 노래는 그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았다는 증거이자, 스스로 변화할 뿐 아니라 세계도 변화시킬 것임을 밝히는 다짐이며,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을 함께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공화국군 리더 테디가 감옥에서 손톱을 뽑히는 고문을 당할 때, 다른 방에 갇혀 있는 동생 다미안과 동료들은 노래를 부르며 테디를 격려한다. 프랑코에 맞서 스페인으로 몰려든 유럽 각지의 젊은이들은 <랜드 앤 프리덤>에서 <바리케이드를 향하여>를 부르며 혁명의 의지를 새롭게 한다. <빵과 장미>에서 미화원들은 거리를 행진하며, 또는 건물 안에서 시위를 하며 노래를 부른다. <티켓>에서 셀틱팀의 응원가를 부르며 로마역을 도망나가는 세 젊은이의 노래는 아마 켄 로치 영화에 나오는 합창 가운데 가장 밝고 젊은 버전일 것이다.
노동자 또는 루저들의 합창은 켄 로치가 좌파의 유산들을 어떻게 역사 속에서 불러내고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는지를 잘 보여주는 방법이다. <빵과 장미>에선 ‘우리에게 빵도 필요하지만 장미 또한 필요하다’는 1912년 미국 이주노동자들의 구호가 다시 울려퍼진다. <랜드 앤 프리덤>의 <바리케이드를 향하여>는 레닌이 가장 사랑했다는 노래다. 이 노래는 폴란드, 러시아, 스페인을 잇는 유럽 노동자들의 연대이기도 하며, 스탈린의 배신에 대한 강렬한 비난이며, 켄 로치식 좌파 유산의 갱신이다.
켄 로치의 모든 영화는 정치영화다. 지루하고 사소해 보이는 철도노동자들의 일상을 다룬 <네비게이터>나 성장영화 <스위트 식스틴>처럼 정치와 상관없어 보이는 영화조차 날카로운 정치의식을 내장하고 있다. 등장인물의 삶은 사회의 전 부문, 나아가 국제정치적 상황에까지 연결되어 있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첨예한 입장 대립은 흔히 격렬한 토론으로 나타난다. 켄 로치 영화는 실타래처럼 꼬인 현실 속 다양한 입장을 명쾌하게 토론으로 보여준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 식당에서 나누는 토지공유 논쟁, <보리밭을…>의 교회에서 벌어지는 영국의 자치 허용 수락 여부 논쟁 등등.
그러나 토론을 두드러지게 내건다는 건 자칫 교훈이나 선전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방법이다. 켄 로치 영화에서 토론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건 노래와 구호가 불러내는 감정의 반응에 따라오는 부속물이다. 켄 로치 영화는 가슴으로 관객을 호명하고, 관객을 스크린 안의 떠들썩한 집회와 활기찬 노래 안으로 이끄는 영화다.
“나는 시나리오작가는 무한히 존경하지만 작가주의 이론은 믿지 않는다. 나는 작가(auteur)가 되려는 생각이 없다. 영화란 공동작업이며 가장 중요한 기여자가 있다면 그건 시나리오작가다. 중요한 건 카메라에 찍은 것이 가치있는 경험인가, 거기에 진정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2. 켄 로치 드라마의 강력한 캐릭터들
그의 영화들이 가슴으로 먼저 다가오는 까닭은 등장인물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레이닝 스톤>에서 딸의 드레스를 장만하기 위해 도둑질을 불사하는 밥을 보면서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켄 로치 감독은 완결된 대본과 스타들을 데리고 작업하는 법이 드물다. 최근 작품들은 <보리밭을…>의 킬리언 머피처럼 주연으로 스타급을 쓰지만 <케스>처럼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비전문 배우들을 쓰는 게 켄 로치의 스타일이다.
배우와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만큼 켄 로치는 대본의 여백을 비워놓는다. 캐릭터의 경험을 배우가 해봤느냐는 그래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빵과 장미>에서 켄 로치는 노조를 만들어봤거나 이민자 경험이 있는 배우를 주역으로 뽑았다. 배우의 몰입을 위해 다음 장면을 알려주지 않기도 한다. <케스>에서 주인공을 맡은 소년은 쓰레기통에서 자기가 기르던 매를 발견하며 놀라지만(소년은 영화를 위해 매를 죽인 것이라고 믿었다) 실은 그건 근처에 있던 다른 새의 시체였다.
배우는 물론 장소도 그렇다. 마약을 살 돈 때문에 티격태격하는 10대 소년들의 다툼 때문에 촬영이 지연되자 오히려 로치는 <레이닝 스톤> 촬영에 그 장면을 넣기로 했다. 짐 앨런이 바로 그날 저녁 대본을 썼고 실제 그 장소에서 마약 때문에 싸우는 10대 소년들의 이야기를 찍고 영화에 집어넣었다.
뛰어난 작가들인 짐 앨런, 배리 하인즈, 폴 래버티 등의 공로이기도 하겠지만 켄 로치의 캐릭터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우선 그들의 짧은 이름들. 조, 밥, 리암, 조지, 매기… 그들은 동일시하기 쉬운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루저다. 의학도인 <보리밭을…>의 다미안이나 <히든 아젠다>의 인권운동가 잉그리드 정도가 예외일까. 그들은 학교나 제도, 정부와도 친하지 않다. 화장실도 없고 의료보험도 없고 집도 절도 없고 미래도 없다. <게임키퍼>의 조지처럼 산속으로 도망간다고 해도 세금고지서는 집요하게 발끝을 따라온다.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에서 매기가 절망적으로 남편 호르헤를 때리는 걸 보라. 아이들을 다 빼앗아간 무자비한 사회를 때릴 수 없으니 사랑하는 남편이라도 때려야 한다. 이들은 마약의 유혹 앞에 무방비 상태이며 기껏해야 알코올에 의지하고 서로 치고받는 게 스트레스를 벗어나는 방법이다. 그래서 그들의 입가엔 늘 ‘블러디’와 ‘퍽’이 들러붙어 있다. 시장 바닥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 걸걸한 입담 또한 켄 로치 영화의 인장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마음을 주는 건 그들에겐 삶을 사랑하는 폭발적인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스위트 식스틴>의 리암처럼 엄마와 살기 위해 마약을 팔고, <레이닝 스톤>의 밥처럼 딸을 위해 도둑질을 하지만, 그들이 삶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하느라 수업시간에 멍하게 있더라도 자기가 키우는 매 앞에서는 눈을 반짝거리는 <케스>의 빌리처럼. 그게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다. 더불어 우리는 뒤늦게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싫든 좋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으며 그들의 각성에 동참한다.
“영화 속에서 연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영화는 바로 눈 한가운데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들, 어디서 왔는지 등을 보여주는 계급을 위장한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