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차’는 사람을 잡아먹는 반신반귀(半神半鬼)의 존재다. 시체처럼 푸른빛을 띠고 있는 야차는 불교에서 전해지는 온갖 신(神)의 하나이면서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들려주는 괴담 속의 식인귀이기도 하다. 류승완 감독이 준비하고 있는 <야차>는 비유적인 의미가 아닌, 공포영화에 어울릴 법한 진짜 야차가 등장하는 영화다. 궁금했다. <주먹이 운다>로 잠깐 다른 장르를 건너다본 류승완 감독은 순수한 액션의 쾌감을 추구하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시절이 떠오르게 하는 <짝패>를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무협과 호러를 교배했다고 알려진 <야차>를 선택하게 되었을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두 번째 단편 <악몽>이 공포영화이긴 했지만, 류승완 감독과 공포영화의 만남은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 류승완 감독은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직 시놉시스도 완성되지 않아 정말 할 말이 없다”면서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인터뷰에 응했던 류승완 감독은 영화사로부터 제안받은 기획을 바꾸고 있는 중이었고, 소문만 듣고 가지게 되었던 궁금증과는 또 다른 의미로, 그 영화가 궁금해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베니스영화제 ‘미드나잇 섹션’에 초청받은 <짝패>가 현지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졌다. 직접 겪기엔 어떻던가. =영화 상영 도중 박수가 두번이나 터졌다. 고등학교 때 허리우드극장에서 <공작왕>을 보며 다 함께 박수쳤던 이후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처음엔 걱정도 많이 했다. 영화를 한밤중에 트는데 그전 영화 상영이 늦어져서 한 시간 넘게 상영이 지연된 거다. 베니스영화제 관계자들이 옛날에 조니 뎁 영화도 시간이 밀려서 새벽 네시에 틀었는데 관객이 30명도 안 왔다, 베니스에서 이런 일은 자주 있으니까 상심하지 말아라, 고 위로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상영관에 들어갔더니 1200석 넘는 객석이 사이드 좌석만 빼고 가득 차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어서 정말 기뻤다.
-<짝패>는 서구에서 인기를 얻은 무협영화들과는 스타일이 다르다. 화려하거나 우아한 영화가 아닌데, 베니스영화제 관객이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영화제에 가보면 신기하게도 한국 액션영화를 좋아하는 그룹이 있다. 그 사람들이 한국 액션영화는 싸움을 구경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체험하게 만든다고 하더라.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경극의 전통을 이어받은 중국 무협영화는 진짜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너무 멋있어서 계속 보게 된다. 사실 <짝패>에서 두명이 100명 넘는 패거리와 싸우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하지만(웃음), 그렇게 진짜처럼 보이는 싸움이 독특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일본에도 없고 중국에도 없는 전통 아닌가. 베니스영화제에서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비장미나 고통을 현실적으로 표현하는 절실함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신은 액션영화광으로 유명하고 무협이 섞인 <아라한 장풍대작전>도 그런 취향에서 나온 영화였다. 그러나 무협이라고 해도 사극이고 공포영화인 <야차>는 당신의 어떤 취향에서 나온 기획인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야차>는 처음으로 영화사의 기획을 받아들인 영화다. 내가 순수한 고용감독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처음 받은 기획은 딱 한줄이었다. “무사가 좀비와 싸운다.” 그걸 무협과 호러의 컨벤션이 맞물리는 영화로 만들자는 거였다. 그런데 좀비들이 몰려오고 그들을 가차없이 베어버리는, 그런 쾌감을 좇아가는 영화를 만들기에는, 두 가지가 걸렸다. 하나는 비슷한 영화들 중에 좋은 영화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었다. 조지 로메로보다 무서운 영화를 만들 자신이 없었고, <황혼에서 새벽까지>처럼 신나는 영화를 만들기엔, 학살을 유희로 경험하게 한다는 사실이 조금 그랬다. 다른 하나는 좀비라는 존재의 근원이었다. 이건 사극인데 아프리카에 사진 찍으러 갔던 사진작가가 부두교 주술에 휘말려,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 수는 없지 않겠나. 그러다보니 야차를 우리 식의 좀비로 바꾸면 어떨까 싶었다. 야차는 귀신이어서 이미 무섭지만 사람을 잡아먹으니 다시 한번 무서워지는 존재다. 그래서 야차의 근원을 파헤치는 일부터 시작했다. 또 바뀔 수도 있겠지만, 부산프로모션플랜(PPP)에 공개된 시놉시스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인가. PPP에 제출된 시놉시스는 진성여왕 시대에 젊은 무사가 실종된 스승을 찾으러 떠났다가 무서운 일에 휘말린다는 내용이었는데. =일단 시대가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정복하고 새로운 국경선을 만든 직후로 바뀌었다. 그 국경지대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세 집단이 모여든다. 신라군의 포로가 된 고구려 탈영병, 며칠만 있으면 경주로 돌아가 편안한 생활을 누리게 될 국경수비대장, 당나라 영토에 낙오되어 고초를 겪다가 국경을 넘어오려는 고구려 군대와 그들을 이끄는 장수. 기승전결을 가진 플롯보다는 인물별로 챕터를 분절할까 생각하고 있다. 아, 그런데 진짜로, 다시 바뀔 수도 있다.
-사람들은 흔히 역사 속에서 극적 소재를 찾는 일이 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맥락을 파악해 온전한 이야기를 만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 때문에 머리에 쥐가 나는 줄 알았는데, 학교 다니면서 국사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웃음) 역사책을 읽다보니 커다란 사건은 반복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까 과거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현실을 반영할 수 있는 매력이 있는 거다. 지금 내가 떠올리고 있는 영화는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이다. 그 영화처럼 특수한 상황에 처한 개인에게 집중한다면 그를 통하여 시대와 역사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서부극으로 치자면 존 포드보다 세르지오 레오네에 가깝다고 할까.
-진성여왕 시대는 왕조 말기의 혼란과 식인귀의 공포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었다. 시대를 바꾼 까닭은 무엇이었나. =<야차>는 이성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비이성의 세계로 향한다. 그런데 다시 이성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비이성적인 존재로 귀결되고 만다. 그걸 관객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고민을 하다가 이제 막 국경이 변경된 시대라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생각하게 됐다. 멕시코 국경지대처럼 무정부주의적인 스타일과 이야기가 어울리는 시간과 공간이 아닐까.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지금 우리는 같은 문화권에서 살았던 중국의 조선족을 국경 밖에 사는 이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핍박하고 있다. 국경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거다. 왜 국경을 넘어오려는 건지 모르면서도 외지인을 위협으로 느끼고 제거하려 한다.
-PPP에 선정된 프로젝트는 대부분 예상 제작비를 명시하고 있다. <야차>는 제작비가 나와 있지 않던데. =무한대지, 뭐. (웃음) 어제 <짝패> 무대인사를 하면서 <야차>는 클로즈업 위주로 찍겠다, 얼굴에는 수염 붙이고 의상은 청바지 입는 거다, 라고 호언장담했다. (웃음) 걱정이 많다. 사극은 소품과 의상을 일일이 제작해야 해서 돈이 많이 드니까. 빌리면 좋을 텐데 <청풍명월>에 나온 갑옷 다시 쓰는 사람 없지 않나. 나비픽처스가 중국 법인을 만든 것도 중국은 세트와 소품이 제작돼 있어서 사극과 현대극 제작비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찍고 싶지는 않다. 당시 국경지대가 있었던 북한에서 찍으면 좋을 텐데. 산세며 지형이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하다보니 나에겐 돈이 많이 드는 영화가 맞지 않는 것 같더라. 사람이 피폐해지고 성격도 나빠진다. 그래서 프로덕션이며 여러 가지를 고민 중인데…. 지금 이런 이야기하면 시나리오나 빨리 쓰라고 하겠지? (웃음)
-몇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라한 장풍대작전> 직후에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장르와 규모가 그와 가까울 <야차>를 준비하면서 그런 걱정은 없는지.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보고 사람들이 다 <와호장룡>이 어떻고 검술이 어떻고, 그러더라. 이상하게 내가 영화를 만든다고 하면 다들 머릿속에 미리 영화를 그려놓는 것 같다. 그리고는 생각했던 영화와 다르다고 하는 거다. 그래서 <짝패>를 찍으면서 언론에 일체 공개를 안 했다. 기대치나 선입견이 없이 순수하게 영화를 즐겨주었으면 해서. 이번에도 영화가 완성되기 전에 하는 인터뷰는 자제하려고 했는데, PPP 때문에 할 수 없이…. (웃음)
-<야차>는 액션이 적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지만 당신의 영화를 기다리면서 액션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는 없다. 이번엔 어떤 스타일을 생각하고 있는지. =이번 액션에 컨셉이 있다면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다. <라쇼몽>을 보면 사무라이의 아내가 증언하는 부분에선 산적과 사무라이가 겁쟁이처럼 칼을 들고도 그걸 어찌하지 못하는, 그런 결투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죽음에 대한 공포와 생존을 향한 절박함이 묻어나는 액션을 만들고 싶다. 액션을 위한 액션이 아니라. 지금 생각하기엔 굉장히 거칠고, 음, <서극의 칼>이나 <무사> 같은 액션으로. <7인의 사무라이>에서 미후네 도시로는 검술을 하는 게 아니라 칼부림을 한다. 칼을 맞고도 고통스러워한다기보다 짜증을 내는데, 그런 폭력의 히스테리도 담아보고 싶고. 나는 <짝패>로 디자인을 하는 액션의 한계까지 밀고 나가본 것 같다. 이번엔 거칠고 원시적인 형태로 놔둘 거다. 그것이 원화평과 정소동의 잘 짜여진 안무에 대적할 수 있는 길인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장르영화를 만들어왔지만, 더이상 그 장르의 걸작을 뛰어넘겠다는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이제는 장르영화를 기존 걸작과는 다르게 찍으려 한다. 예를 들면 <서극의 칼>은 10년 전 영화인데도 지금 봐도 어떻게 찍었는지를 모르겠다. 정두홍 무술감독도 저렇게 하라고 하면 못할 거라고 하더라. 나는 그 영화 한편 때문에 서극이 오우삼보다 위대한 감독이라고 믿는다.
-<짝패>는 드라마보다 액션에 집중하는 영화다. 그 다음 영화로 드라마가 많이 필요한 <야차>를 택했다는 것이 의외다. =나는 갈수록 이야기에 집착하고 있다. 영화를 볼 때도 예전엔 어긋나는 게 좋았는데, 지금은 고전적으로 잘 짜여진 이야기가 있는 영화가 좋다. 영화란 시간예술이기도 한 것 아닌가. 그리고 시간을 이루어내는 것이 드라마다. 물론 다른 경우도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이해가 안 되지만 나는 그 영화가 좋다. <서극의 칼>도 멜로로 가는 듯하다가 아버지의 복수극으로 끝나버리지만, 보는 동안엔 설득이 된다. 그것이 연출력의 문제다. <짝패>는 마치 스토리가 없는 영화처럼 느껴지지만(웃음) DVD를 내면서 액션 시퀀스만 모았더니 20분 남짓이었다. 그런데 보는 사람들은 94분 내내 액션이었다고 기억한다. 달려간다는 느낌으로 만들다보니 감정이 지속되는 부분을 많이 걷어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짝패>는 그처럼 뒤돌아보지 않고 한길로 달려간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무협판타지였던 <아라한 장풍대작전> 때만 해도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닌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됐나. =<아라한 장풍대작전>까지는 이거저거 다 해보고 싶었는데, 한편의 영화로는 많은 걸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화제에 가면 어떤 영화를 하고 싶나, 어떤 감독이 되고 싶나, 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때 내가 답할 수 있는 내용은 지금 만들고 있는 영화가 어떤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주먹이 운다>부터 내 취향을 드러내기보다 이야기가 요구하는 대로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짝패>도 컨벤션이 많은 듯하지만 내 안에 응어리진 것을 확 풀어낸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