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배우들이 잔뜩 출연하는 성장영화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자의 능력이나 그들의 앙상블 연기 혹은 탄탄한 시나리오에서 나오는 안정적인 스토리 전개나 매혹적인 화면 구성 같은 것들이 아니다. 연기가 아직 몸에 익지 않았기에 다소 어색할 수는 있지만,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그 단점이 오히려 관습화된 연기로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역동적인 에너지를 분출시키면서 날것 그대로의 생동감을 전해줄 때의 쾌감, 바로 그것이 이런 성장영화의 독자적인 매력이라 믿는다. <발레교습소>의 매력과 단점은 이러한 에너지들을 폭발시키며 놀 수 있는 판을 배우들에게 깔아주면서도, 이내 그것을 관습화된 서사 속에 가둬버리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폭력써클>은 이러한 면에서 더욱 아쉬운 작품이다. 영화는 관습화된 캐릭터와 서사 속에 젊은 배우들을 묶어두면서 그 에너지를 폭발시킬 수 있는 기회조차 제공하지 못한다.
축구를 좋아하는 몇몇 고등학생이 있다. 육사 진학이 목표인 모범생이자 만능 스포츠맨인 상호(정경호), 다소 비뚤어진 성격을 가졌지만 친구간의 의리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재구(이태성), 작은 체구에도 깡다구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철(김혜성) 등이 모여 결성한 ‘타이거’는 단지 공차고 놀기 위한 친목 서클이다. 타이거라는 서클명도 뭐 그리 특별한 생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모임의 첫 회동이 있었던 중국집에 걸려 있던 호랑이 그림에서 따왔을 뿐이다. 하지만 타이거는 서클 회장인 상호가 주변 고등학교의 폭력 서클인 TNT 리더인 종석(연제욱)이 좋아하는 수희(장희진)와 사귀게 되면서, 그들과의 한판 승부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영화는 처음부터 감옥에 있는 성호의 모습에서 시작하여 그가 경험한 사건들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구조화하고 있다. 이처럼 결과를 미리 제시하는 서사 구조는 관객들로 하여금 이러한 결말에 이르게 된 ‘과정’에 집중하도록 하는 장점이 있다(<친구>에서도 활용된 방식이지만, 폭력적 상황을 모범생(혹은 지식인)의 시선으로 구성하는 것은 폭력을 여과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이기도 하다). 이를 부제를 붙여 표현한다면, ‘폭력서클 타이거: 혹은 어떻게 그들은 축구 동호회이기를 멈추고 폭력에 빠져들게 되었나’로 요약할 수 있겠다. 어른으로 성장하는 문지방 넘기의 고통을 폭력적 사건을 통해 표현하는 전략은 <비트>와 <말죽거리 잔혹사> 등에서 이미 보아온 것이지만, <폭력써클>이 이들 영화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축구 동호회가 폭력 서클로 돌변하는 과정에서 성장기 특유의 정서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성장영화의 매력 중 하나는 도무지 머리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을 마주했을 때, 춤으로, 뜀박질로, 싸움으로, 질주로, 각종 스포츠로, 그리고 여러 형태의 ‘땀흘리는 몸’으로 그 사건과 맞부딪히며 그 시절의 정서를 표출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몸의 폭발이 이내 실패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하지만 <폭력써클>은 이러한 성장기 특유의 정서가 ‘땀흘리는 몸의 미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싸움의 전시’로 머물고 만다. 영화는 ‘남자 되기’라는 통과 제의에 내재된 폭력성을 언급하고 싶다는 듯, 그 초반부에서 학생들에게 무성적 존재인 ‘애’에서 벗어나 ‘남자’가 될 것을 강요하는 담임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강요는 TNT와의 마지막 대결을 앞둔 상호가 자신을 말리는 수희에게 “이건 남자들의 일이야”라고 말하는 것으로 회답된다. 영화는 남성다움을 폭력의 수용으로 착각하는 남성들의 끝이 결국 파멸임을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착각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는 척하지만, 이러한 오인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문다. 때문에 영화에서 중요한 질문인 ‘왜 그들은 폭력서클이 되어야만 했는가’에 대해서 영화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물론 영화 속에는 인물들의 가족적 환경을 차등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그것이 우정으로도 쉽게 좁힐 수 없는 간극이자 갈등임을 말하고 있고, 시간적 배경을 1991년으로 설정하여 노태우 정권의 이데올로기적 전술이었던 ‘범죄와의 전쟁’이나 ‘걸프전’ 등의 사회적 맥락을 환기시키기도 하지만, 이러한 시대의 선택이 시간적 배경으로만 기능할 뿐 사건을 풍요롭게 살찌우지 못한다.
인물들의 싸움이 설득력을 부여받지 못할 때, 그들의 피 터지는 싸움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폭력적 사태를 통해 성장기의 고통을 포착하는 데 성공한 작품들은 표면적으로야 ‘이유없는 반항’처럼 보일 수 있다 하더라도, 심층적으로는 그 행위에 내재된 반항의 이유를 깔아놓게 마련이고, 그것이 관객에게 정서적으로 설득력을 지닐 때 폭력적 행위는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폭력은 무의미한 몸짓일 뿐이고, 그 폭력적 사태로 인한 내면의 상처 역시 관객에게 전달될 수 없다. 상호는 TNT와의 첫 다툼에서 눈 아래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는다. 영화는 상호가 TNT와의 마지막 대결을 앞둔 시점에서 그 상처를 다시 강조함으로써 그것이 단지 육체적 상처가 아니라 내면의 상처를 외면화한 것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하지만 설득력을 상실한 채로 폭력적 행위의 전시로 일관하는 이 영화에서 그 상처가 육체를 뚫고 내면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폭력써클>은 끔찍한 결과를 잉태하는 남성다움의 폭력성에 그 어떤 성찰도 없이 상투적인 폭력장면의 전시에 머문 영화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