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_ 싸이더스 HQ 타깃_ 본부장 박성혜 취재기간_ 2006년 9월7~11일 취재 중에 만난 사람_ 이명세 감독, 김혜수, 김병철 더 맨 매니지먼트 대표 등
‘사자의 탈을 쓴 여우’일 거야. 멀찌감치서 봤던 매니저 박성혜를 보고 들었던 생각이다. 그녀의 머리는 수사자의 갈기처럼 야성적으로 솟아 있다. ‘야성적으로’는 ‘공격적으로’로 바꿔도 무방하다. 시가 총액 3천억원을 웃도는 IHQ의 주력부대 싸이더스HQ 본부장이니 수줍지 않은 머리 스타일조차 괜히 위세가 넘치지 않겠는가. 위세가 허세가 아님은 그녀와 머리를 맞대고 사는 배우를 불러보면 된다. 김혜수, 전도연, 황정민, 임수정, 공효진, 이종혁, 윤진서, 지진희, 염정아, 송혜교, 김성수, 하정우…. 그녀와 13년째 동고동락해왔거나 앞으로 해나가기로 작정한 배우들의 이름이다. 국내 최대 매니지먼트의 본부장은 예서 멈추지 않는다. 정우성, 전지현, 김선아, 이미연, 차태현, 조인성, 성유리…. 이들을 ‘관리’하려면 순간포착 판단력과 상큼한 교통정리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여우 같은 두뇌가 필요하지 않을까.
‘대충 그 까이꺼~’ 하고 떠올린 인상이 실제와 얼마나 맞아떨어질까. 그녀가 사자머리 스타일을 한 지는 아주 오래됐다. 매니저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랬다고 보면 대충 맞다. 눈코 뜰 새 없이 올라오는 결재서류와 “이건 어찌 할까요?”를 묻는 후배 매니저들의 상담과 매일같이 주재하는 크고 작은 회의를 ‘이렇게 뚝딱, 저렇게 뚝딱’ 해치우는 순간들을 보면, 저 머릿속도 그렇거니와 저 가슴속의 담력이 보통은 아니다 싶다. 그런데 늘 일정한 톤의 말투를 유지하며 그 많은 판단들을 친근하고 조리있게 내려주는 걸 보다보면, 후배들이 하는 말처럼 그리고 본인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처럼, ‘누나’ 같다.
사자의 탈을 쓴 누나 매니저에게 취재를 요청했을 때,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망설였다. 다만 그 순간이 몇초 가지 않았다. “그러죠. 언제부터 할까요? 인터뷰 좀체 안 하는데 이걸 하는 건 매니저에 대한 일반의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아서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서예요.” 그녀는 화끈했다. 3일간의 동행취재에서 공개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까보였다. ‘계속 앉아 있어도 될까’ 민망할 정도로 내밀한 사업전략을 짜는 회의부터 사적인 술자리까지. 자리를 비켜달라고 한 경우는 딱 한번. 한 10분이나 됐을까. 그리고 그녀가 오케이했으나 내가 스스로 비켜간 자리가 딱 한번. 여자 매니저들의 친목모임. 차라리 제3자가 비켜간 경우가 많았다. 기자가 동행한다고 해서 약속을 취소한 영화사 대표들과 본부장 사무실 죽돌이가 된 기자 때문에 웬만하면 들어오기를 꺼려했던 후배 매니저들과 배우들. 이렇게 발가벗을 수 있는 자신감과 솔직함을 그녀 개인의 자산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박성혜 본부장은 정훈탁 대표 다음의 2인자인 셈이니 이는 싸이더스HQ라는 매니지먼트 기업의 자신감과 투명함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 매니저의 출발-작전회의
9월11일 월요일 오전 11시, 매니지먼트사업본부 회의로 일주일이 시작된다. 92명의 배우를 나눠 맡은 7명의 팀장이 늘 이 시간마다 모인다. 영화사업본부와 드라마사업본부에서 2주마다 브리핑을 하러 들어오는데, 이날은 SKT와 함께하고 있는 스타존 서비스를 책임진 팀장이 브리핑을 준비하고 있다. 사업기획팀, 홍보커뮤니케이션 담당자 등도 늘 참석한다. 박성혜 본부장이 자리를 잡자 1팀장이 첫 보고를 띄운다.
“정우성은 휴가 중이고, 전지현은 CF촬영 중이며, 김수로는 부산에서 촬영 중입니다. 김정화는 차기작 검토 중이고… 그리고 신인 000가 장애인 소재 인디영화에 출연합니다.” “단편?” “장편인데, 시놉시스를 오늘 받기로 했어요.” “노출 있어?” “약간 있을 수도 있어요.” “2팀입니다. 이범수씨 <슈퍼스타 감사용>으로 일본 출장 갔고요….” “000 차기작 빨리 검토해줘. ” “몇개 들어오긴 했는데 대부분 로맨틱코미디예요. 본인은 조연이라도 좀 센 캐릭터를 하고 싶어하거든요.”
1팀부터 7팀까지 배우들의 일주일 스케줄이 몇장의 종이 안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크고 작은 정보가 오가며 큰 그림을 그려나간다. 작품을 하기로 한 영화사의 시나리오 모니터 결과가 시원찮은데다가 작품이 배우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보고가 나오자, 그에 대한 대책이 논의된다. 또 지상파 3사의 드라마 편성계획안을 놓고 캐스팅 상황과 제작 진행 과정을 체크한다. 시청률이 저조한 드라마에 출연 중인 배우의 홍보문제도 오간다. 박성혜 본부장은 드라마에 대해 특별한 당부를 이어갔다.
“우리 KBS는 너무 안 한다. 1, 2월 것 좀 챙겨봐.” “SBS <0000>가 대작이라며? 차태현 물어보던데 000 감독이 큰 작품을 하기에 어때?” “우리가 너무 영화쪽만 한다는 이미지가 있는 거 같아. 방송사 출입 좀더 자주 해줘.”
팀별 회의가 끝나자 본부장의 공지사항이 이어진다. 여기서 싸이더스HQ가 배우를 대하는 태도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얼마 남지 않았지. 개막식 참여는 매니저 포함 2박을 제공한대. 그리고 우리는 개막 이후 나흘 동안 그랜드호텔 스위트룸에 IHQ 마켓 부스를 만들기로 했어. 한류 가능성과 영어 가능자를 기준으로 배우 14명을 선정했으니까 누가 갈 수 있는지 체크해줘. 배우들 일정을 보니까 지난해만큼 많이 갈 상황은 아닌 것 같고. 자발적 참여를 원칙으로 누가 갈 수 있는지 1차로 수요일까지 모아보자. 그리고 SK가 주최하고 롯데, 소니 등의 회장이 참석하는 아시아경영자협의회 포럼이 사흘 뒤에 열리는데 한류 테마도 있어서 참여하기로 했어. 배우는 우리 회사만 단독으로 참석하거든. 근데 주최쪽 요청이 테이블당 배우 한명씩 앉아달라는 건데, 그건 배우 입장에서 곤란하고 두명씩 앉도록 조치해줘. 그리고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은 곤란하니까 신경써주고.”
이어 배우들의 초상권 보호 문제에 관해 언론사에 일제히 돌린 공문의 회신 여부를 확인하고, 스타존 서비스의 활성화를 위한 브리핑이 숨가쁘게 이어진다. 회의는 정확히 1시간30분 만에 끝났다. 점심시간인가보다 했는데 3팀장과 7팀장이 본부장실로 들어와 배우들 일정과 현안에 대한 2차 보고를 시작한다. 3팀과 7팀은 일종의 직할 부대다. 본부장의 사안 검토는 매우 구체적이고 깊다. 이틀 뒤에 있을 <바람피기 좋은 날>(출연 김혜수, 윤진서, 이종혁) 티저포스터 촬영 기획안부터 출발한다.
“포스터 시안이 이것밖에 없어? 너무 적은데. 마케팅 컨셉이 정확히 뭔지 알아봐. <바람난 가족>이나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이 어떻게 했는지 한번 비교해보고. <바람피기 좋은 날>은 섹스신보다 블랙유머로 승부하는 영화인데 야한 영화처럼 포장되면 곤란할 것 같아.”
“000 스토커는 요즘 어때?” “(초상권 침해한) 000 매체에 내용 증명 보내자고. 금전적인 손해배상과 사과 광고 두 가지 다 받아야 할 것 같아.” “신인 000는 얼굴밖에 못 봤는데, 자료 좀더 줘. 연기든 뭐든 봐야 누나가 어디에 추천할지 알 거 같아.” “<000> 마케팅은 문제있는 거 같아. 비밀주의로 갈 건지 말 건지 확실히 해야지, 너무 어정쩡해.” “<0000>하고 <000> 시나리오 줄 테니까 읽어봐. 큰 작품인데 같이 좀더 검토하자.” “일본과의 이 계약건 말야. 000와 000도 했는데 우리도 못할 건 없잖아. 우리도 진행하는 걸로 하자. 그런데 계약서가 너무 단출해. 해외와의 계약이니 법무팀 검토도 마치고, 에이전시 비용은 줄이자.”
숨가쁘게 후속 회의를 마치니 오후 1시30분. 두 팀장이 나가자마자 또 다른 팀장이 결재서류 뭉치를 들고 나타난다. 한 10개쯤 된다. “신인이 영화 찍으면서 식대가 왜 이리 많이 나와?” “밖에서 먹으니까….” “스탭들하고 밥도 먹으면서 어울려야지. 벌써부터 이러면 나중에 어떡하려고 그래.”
회의 사이사이에 걸려와 미뤄둔 ‘전화 비즈니스’ 몇건을 마무리짓자 마침내 한숨 돌릴 틈이 생긴다. 도시락을 주문한 뒤, 책상 옆에 쌓아둔 시나리오와 드라마 극본에 손을 댄다. 이번 일주일치다. 각각 스무개는 돼 보인다. 오늘 다 보기는 불가능하리라. 오후에 신인 캐스팅 TFT팀 회의가 있고, 저녁때는 <가문의 부활-가문의 영광3>와 <라디오 스타> 중 한편의 시사회에 참석해야 한다. 그 뒤에는 이명세 감독과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다. 박성혜 본부장은 평소보다 덜 분주하다고 했다. 이런저런 상의를 하러 사무실에 수시로 들르는 배우와 후배 매니저의 발걸음이 (기자 때문에) 뚝 끊기다시피 했기 때문에.
# 매니저의 일상-거절과 조율
“일의 80%가 거절하는 것”이라는 말은 허풍이 아니다. 밑에서부터 몇 단계를 거쳐 올라온 시나리오와 각종 행사 기획안이 일주일 단위로 본부장 책상에 수북이 쌓이는 걸 보면, 쉽게 수긍이 간다. 캐스팅 거절에도 노하우가 필요할 것이다. “솔직해야 해요. 옛날에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했다가 아주 난처해진 적이 있는데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서로에게 가장 좋아요.”
먼저 전화로 거절하기. 9월8일 오후, 본부장이 한 제작자에게 전화를 건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다.
“시나리오 잘 봤어요. 원톱으로 나가던데 지금 상황에선 저희가 딱히 알맞은 배우가 없는 것 같아요. 혹시 (시나리오가) 다른 방식으로 풀리면 그때 다시 논의하는 게 어떨까요?”
통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야기는 금방 끝났으나 제작자가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씽긋 웃는다.
그 다음 만나서 조율하기. 같은 날 저녁 6시 학동사거리의 한 카페. 박찬욱 감독과 모호필름을 만들어 <친절한 금자씨>를 제작했던 이태헌 대표가 따로 오퍼스픽처스를 만들어 장준환 감독의 <파트맨> 등 여러 편을 준비 중이다. 그중 한 작품의 캐스팅 논의를 위해 박성혜 본부장과 마주앉았다. 대화는 대략 이랬다.
“시나리오가 좀 밍밍하게 보였을지 모르겠어요. 요즘 너무 센 게 많으니까. 하지만 감독을 믿어볼 만해요.”(이태헌 대표) “감독님은 예전에 뭐하셨어요?”(박성혜 본부장) “….” “말씀하셨던 000은 얼마 전부터 촬영에 들어갔잖아요. 그런데 그 작품 끝나면 일단 쉬겠다고 하네요. 알다시피 그 친구가 계속 쉬지 않고 달려왔잖아요. 000는 좀 센 걸 하고 싶어해요. 이전 작품이 잘 어울리지 않았던 거 같아서요. 어쨌든 (원하는 캐스팅의) 우선순위를 주시면 차례로 전달해서 검토하도록 할게요. 근데 이 캐릭터가 아주 예뻐야 하나요? 000는 어때요?” “000는 뭐 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잘 안 됐어요.” “그럼 물어봐주세요.” “스케줄은 어떻게 잡고 계세요?” “계절이 중요한 작품이라서 0월에 촬영 들어가면 좋고 늦어도 0월쯤은 들어가려고요. 물론 배우 일정과 맞춰봐야지요.” “일단 0월은 000가 안 되네요. 촬영 중이니까.” “그래서 언제가 가능한지 일단 그것부터 아는 게 중요해요.” “네, 알아볼게요. 오퍼스는 또 어떤 작품 준비 중이세요?”
부드러운 거절과 조율의 여지가 매끄럽게 오고간 이 자리가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란다. 캐스팅에 관한 한 좀더 격한 대화가 오가는 게 보통인데, 이태헌 대표가 워낙 쿨하고 매너 좋은 제작자에 속하기 때문이다. 연간 제작 편수 100편 시대를 맞이하기 전에도 유능한 제작자와 프로듀서들조차 이구동성으로 캐스팅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하지만 매니저 입장에서도 할 말은 많다.
“장르도 소재도 한 가지 기류만 있는 게 아니고 다양해져서 좋기는 한데 여전히 남자 위주의 시나리오가 많아요. 여자의 경우, 꽃 같은 역할 말고 캐릭터가 있는 작품은 여전히 없고. 이런 경우가 있어요. 어떤 제작사는 한꺼번에 시나리오 세개를 보내면서 좋은 것 좀 골라달라고 해요. 이런 경우에는 다 안 좋아 보여서 더 안 보게 돼요. 시나리오 하나하나에 충실한 게 좋아요. 시나리오를 배우에게 다 맞춰 고쳐나가겠다고 하는 건 더 난감하고. 그리고 배우 독식이 지나쳐서, 일주일에 30개가 들어온다면 20개는 누구, 7개는 누구, 이렇게 한쪽에 치우치는 현상이 정말 심각해요. 우리에게 92명의 배우가 있는데, 고르게 들어오고 신인도 발굴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들어오는 게 좋지, 어느 한 배우가 좋다고 시나리오가 집중되면, 물론 행복한 고민이지만, 그게 제 입장에서는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