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개봉시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 영화의 경우 정말 그저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영화는 사람들 입에 더이상 오르지도 않으며, 케이블에 다시 나오더라도 대중적 인식에서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건실한 DVD 시장이 부재한 한국에서는 그런 영화의 경우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는 기회조차 이미 멀어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따금 이런 영화가 살아남아서 조용하고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진화하는 징후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특히 외국에 있는 관객이 한국영화를 받아들이게 되는 방식에서 보인다.
많은 한국 관객에게 영화는 하나의 이벤트가 되는 것 같다. 새로운 영화가 개봉되는 건 새로운 유행과도 같다. 모든 사람들이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작품에 대한 집단적인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봐야만 한다. 영화가 오래되면 긴박함이 떨어지고, 그 자리를 차지한 새로운 영화가 나온다. 그러나 외국에 있으면서 한국영화를 지속적으로 찾는 사람들의 경우 이런 식으로 영화를 대하기가 어려운 것이, 각기 다른 관객이 다른 때에 영화를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는 가까운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하고, 또 어떤 관객은 한국에서 DVD를 사서 들여오기도 한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친구의 소개로 한국영화를 보게 된다. 한국에서는 영화가 개봉하고 나서 얼마 안 돼- 종종 일주일 만에- 집단적인 판단을 받게 된다. 외국에서는 (주로 인터넷 토론 게시판이나 블로그를 통해 표현되는) 집단적 판단은 오랜 기간을 거쳐 형성되며, 결코 완전히 완결된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때때로 한국에서 거의 돌아보지 않은 영화가 기대치 못한 팬들을 만나기도 한다. 송일곤 감독의 최근작 <깃>과 <마법사들>은 한국에선 극장수입을 거의 올리지 못했지만, (매우 작은 집단이긴 하지만) 서구의 한국영화 팬들 사이에선 열광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토론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에서 많은 관객이 <깃>을 2005년 최고의 영화 10위 안에 꼽았으며, 심지어 10년간의 한국영화 최고작 리스트에도 가끔 언급되고 있다. 이 영화가 보기 어려운 만큼 이런 현상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영화제에서도 거의 상영되지 않았고, 한국에서만 DVD로 출시되었으며 그것도 금방 재고가 떨어졌다(대다수가 해외로 팔려나간 것 같다). 영화제에서 <마법사들>을 본 참석자들이 매우 긍정적인 평을 냈더니 많은 한국영화 팬들이 자기들도 볼 수 있도록 이 영화 역시 DVD로 나오기를 열망하고 있다(과연 DVD로 나올까?).
한국 영화산업을 취재하면서 듣게 되는 가장 슬픈 어구 중 하나는 “실패한 영화”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어떤 영화가 실패했다고 말할 땐 그 영화가 수익을 올리지 못했으며 개봉시 별로 관심을 얻지 못했다는 의미로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마치 도덕적인 판단과도 같이 결정적인 것처럼 들린다. 만약 어떤 영화가 소수의 투자자를 위해 돈을 벌지 못했고, 영화제 심사에서 상이 주는 공식적인 영광을 받아내지 못했다고 해서 그 영화를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것인가? 영화들은 그냥 죽는 게 아니다. 그러니 판단을 좀더 유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