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충무로에 부는 한국 만화 열풍 [6]

이 만화를 노려라!

<돌아온 자청비> <바람의 나라> <폐쇄자> 등 영화가 탐낼 만한 한국 만화 추천작

영화는 만화를 사랑한다. 영화가 오래전부터 스토리보드라는 공정을 통해서 만화언어를 제작과정에 활용한 역사를 고려하자면, 90년대 중반 이래의 만화 원작 영화제작 붐이 오히려 지나치게 늦었다고 느껴질 정도다. 물론 다른 매체양식을 옮겨오는 과정은 생각보다 수월하지 않기에 <비천무>(김혜린)의 경우처럼 어설픈 캐릭터 해석과 낮은 영화적 완성도로 오히려 원작 팬들의 원성만 산 경우도 있다. 하지만 원작의 몇 가지 핵심 정서를 효과적으로 영화만의 색으로 녹여낸 <비트>(허영만·박하)라든지, 원작의 설정과 이야기 뼈대를 전혀 새로운 주제와 결론으로 이끌어낸 <올드보이>(쓰지야 가론·미네기시 노부아키) 같은 매력적인 성공 사례들이 있다. 나아가 최근의 <신 시티>(프랭크 밀러)처럼 아예 만화의 시각적 표현 하나하나를 그대로 이식하는 것만으로도 영화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디서 어떻게 영화로 이식하면 좋은 도전이 되어줄 만한 원작 만화를 찾아볼 수 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드넓은 만화의 바다 그 어디에나 있다.” 이미 영화화 기획이 진행 중인 <위대한 캣츠비>나 <로맨스킬러>(강도하), <26년>(강풀) 등 인기 만화들 말고도 시기나 장르 가릴 것 없이 고르게 한번 후보군을 모아보는 것이 어떨까.

군침도는 캐릭터들

<바람의 나라>

만화가 영화로 이식될 때 종종 난점으로 꼽히곤 하는 이야기 구조의 차이, 시각적 표현의 문제 등등을 고려할 때,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작품 속의 매력적인 캐릭터 중심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좌충우돌 쌀농사 판타지물(?)인 <돌아온 자청비>(김달님/미디어 다음 연재 중)는 어떨까. 지극히 도시 아가씨다우면서도 은근히 억척스러운, 어쩌면 자신이 농신 자청비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미소년 농신 문 도령을 쫓아다니는 주인공 연이는 멋진 영화주인공이 되어줄 것이다. 이야기에 영화 <집으로…>풍의 농촌에 대한 향수까지 가미된다면 더욱더 안성맞춤. <도깨비 신부>(말리/<허브> 연재 중)의 선비 역시 매력적인 영화주인공 자리가 확고하다. 그녀는 세습무당의 자손으로 도깨비들과 대화하며, 혼령들과 인간들의 세계를 중개해야 할 운명의 소녀다. 다만 원작의 주제의식은 한국적 무속신앙 가득한 성장물이자 여러 세상의 존재들이 공존하는 이야기인 만큼, 영화화되면서 난데없는 공포 퇴마물로 변신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한국 순정만화계의 손꼽히는 대작, <바람의 나라>(김진/<We6> 연재 중)는 어떨까. 가상 고대 역사 판타지물이 지니는 가장 큰 매력은 역시 파란의 시대를 헤쳐나가면서도 지극히 인간적인 결점을 지니고 있는 영웅들이다.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와 여러 고민 속에 역사적 대업을 추구하는 대무신왕 무휼과 의인화된 사신수 정령들이 만들어내는 강력하고도 원형적인 캐릭터성은 <스타워즈>에 비견할 만하며, 아류작들의 표절의 표적이 되기에 딱 알맞다. 선이 굵으면서도 섬세한 3부작 대하 역사 판타지 활극으로 만들어낸다면 어떨까.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가?

하지만 원작 만화에서 캐릭터만 차용하기에는 만화가 지닌 재미있는 설정과 이야기 구조들이 아까울 때가 더 많다. 물론 영화의 러닝타임과 만화의 지면이 지니는 흐름의 차이가 있지만, 어떤 이야기 컨셉들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어떻게든 영화로도 옮겨보고 싶은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쁜음식>(채민/<허브> 연재 중)은 누드모델이 직업인 한 여자와 그녀에게 얹혀사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지금의 무덤덤하고 뭔가 어긋나고 있는 현재의 일상과 사귀기 시작할 무렵의 비슷하지만 더 밝았던(하지만 결국 현재의 상황에 대한 씨앗을 품고 있던) 상황이 서로 번갈아 등장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결과와 원인의 두 시간이 교차되는 구조, 그것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섬세한 일상의 디테일이 돋보이는데, 이 정도의 원재료를 제대로 영화로 소화해낸다면 왕가위도 부럽지 않을 듯하다. 재미있는 이야기 방식이라면 <취중진담>(송채성)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연인, 가족, 그냥 평범한 낙오자들의 오해와 갈등과 화해가 술을 통해서 엮이는 단편 에피소드들의 모음이다. 세상에 대한 따듯한 시선, 진지한 이야기에도 적절한 양념처럼 빠지지 않는 코믹한 감수성, 그리고 한잔 술 인연의 매력이다. 각 에피소드의 인물들이 서로 카메오 출연하며 엮이는 <펄프 픽션>이나 <씬 시티> 같은 방식으로 연출하면 한편의 영화로서도 멋지게 성립할 수 있는 좋은 재료다. 하지만 이왕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면, 만화의 강점이 돋보이는 장르인 판타지/SF를 빼놓으면 섭섭하다. <폐쇄자>(유시진)라는 작품은 수많은 평행 우주 가운데 각각의 세계를 열고 닫는 능력에 대한 이야기다. 현대 한국에 살고 있는 평범한 남자주인공과 항상 그의 곁을 맴도는 청년,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정체는 판타지영화의 장르적 규칙과도 좋은 호환성을 이룬다. 게다가 철학적인 주제의 분위기와 섬세한 결말 처리는 더욱 좋은 영화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남자주인공들의 사이가 유사 동성애적 관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은 요새의 영화 트렌드와도 어울리는 일종의 보너스.

완전 공감이야

만화는 다른 어떤 대중문화 매체보다 더욱 대중과 가깝게 살아왔고, 덕분에 동시대적인 공감의 코드를 잘 발달시켜왔다. 한국 만화가 지니는 특유의 한국적 대중 취향의 코드, 한국사회에 대한 미묘한 비유들 혹은 그냥 한국 특유의 소재는 역시 영화에서 참고하기 좋은 분야다. 음악 밴드를 주제로 한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복고정서와 안타까움은 확실히 감동적이었지만 무언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바로 밴드를 하는 것, 아직도 음악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의 즐거움 말이다. 만화 <스멜 라이크 30 스피릿>(고리타/미디어 다음 연재 중)이 바로 그 자리를 메워준다. 80∼90년대의 한국 록 키드들이 30줄 회사원이 된 2000년대 현재, 바로 그들이 직장인 밴드를 만들어 좌충우돌하는 이야기 속에는 비루한 현실만큼이나 긍정적 희망의 판타지가 섞여 들어간다.

공감의 코드가 충분하다면 반드시 장편 극만화 형식을 지닌 원작만 바라볼 이유도 없다. <남쪽손님>(오영진)은 경수로 사업의 일환으로 장기간 북한으로 파견나갔던 평범한 회사원 오 대리가 겪은 북한 생활 경험담이다. 이 만화는 미국이나 프랑스 기자가 볼 수 없는 것, 정치적인 협상이나 이벤트를 하러 가는 한국의 고위 정치인이나 운동가들이 느낄 수 없는 평범한 남한인의 평범한 북한 생활들로 가득하다. 다르면서도 같은 북한 사람들과 사회가 짤막한 에피소드들 속에서 때로는 웃기게, 때로는 찡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이 시대의 남한 사람이기에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이런 이야기들이 영화 형식에 알맞게 조율되어 완성된다면 어떤 다큐나 홍보영상보다 더욱 많은 것을 생각하고 알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뭐, 촬영상의 문제가 생길 법하다면 아예 애니메이션영화로 만드는 것도 괜찮을 듯.

물론 여기서 잠시 언급한 이런 작품들 말고도 한국 만화의 아카이브에는 영화 소재가 널려 있다. 이미 영화적인 이야기와 연출을 모두 갖추고 인기까지 있는 몇몇 작품들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적합한 영화 컨셉과 적합한 원작을 결합시킨다는 열린 눈으로, 지금 당장 서점 만화코너로 직행할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