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간혹 논증을 비난으로 오인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인생 별거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 똑바로 보자는 이야기다. 조롱도 냉소도 아닌 영화가 맑고 예쁘지 말라는 법이 있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 <해변의 여인>에 흐르는 정용진(37)의 음악은 홍상수 영화에 산들바람을 불어넣었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버둥대는 여자와 남자 곁에서 투명하고 간소한 정용진의 음악은 시냇물을 흘리고 나뭇가지의 잎사귀를 흔든다. <해변의 여인>에 이르러서는 소주처럼 맑은 눈물마저 솟게 한다. 4살부터 피아노를 연주한 정용진 음악감독에게 건반은 가장 사랑스럽고 긴요한 악기다. “피아노는 자유로워요. 느낌을 받는 즉시 열 손가락만 뻗으면 모든 음과 리듬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어요. 기타만 해도 줄을 뜯는 손으로는 음높이를 조절할 수 없죠. 그래서 피아노를 쓸 때는 전능함을 남용하지 않는 게 중요해요.” 단순하고 반복적인 리듬을 관통하는 ‘어린 시절 어디선가 들었던 듯한’ 멜로디를 좋아하는 홍상수 감독의 취향과도 피아노는 잘 호응한다. 정용진과 홍상수의 영화에서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 동네 골목 피아노 학원에서 뚱땅뚱땅 흘러나와 베갯머리까지 졸졸 따라오던 멜로디들과 재회한다. 간단하고 감미롭고 세련되게. 정용진 음악감독의 모토다.
집안 사정으로 음대 진학을 포기한 그는 고려대 응용동물과학과 재학 중에도 꾸준히 곡을 쓰고 밴드 활동을 했다. 사람들은 문득 생각난 듯 그에게 “당신의 음악을 들으면 그림이 떠오른다”고 말해줬다. 영화음악에 뜻을 세운 그는 독일 베를린 국립음악대학을 거쳐 미국 버클리 음대와 캘리포니아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에서 영화음악과 전자음악, 뉴미디어 작곡으로 학위를 받았다. 귀국해 영화현장을 엿보던 그의 데모 테이프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준비하는 홍상수 감독에게 전달됐다. 전작 <생활의 발견>에서 음악을 거의 배제했던 홍 감독은 그 무렵 음악을 좀더 적극적으로 써볼까 궁리하던 참이었다(한편 강단에 선 정용진 음악감독은 학생들에게 <생활의 발견>에 음악을 입히는 과제를 내주고 있었다). 건반과 사운드 모듈이 있는 홍 감독의 방에서 세 시간 내리 모티브만 주어진 즉흥곡들을 연주해야 했던 첫 만남을 정용진 음악감독은 식은땀 나는 오디션으로 추억한다. 여러 병의 술이 동난 그날 밤 정용진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트리트먼트를 받아 귀가했다. 몇몇 지인들은 신참 영화음악가인 그에게 홍상수 영화가 ‘울타리’가 될 거라 걱정하기도 했지만, 정용진 음악감독은 홍상수 감독과 작업하며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더 특이하게 만들까?”라는 강박을 버리고 상투성과 싸우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세편의 영화를 완성한 지금 두 사람은 연탄곡(連彈曲)의 주자들처럼 서로의 낌새를 챈다. 홍상수 영화에는 왜 4분의 3박자 음악이 많을까 기자가 갸웃거리자 정용진 음악감독은 훌륭한 답을 제시한다. “3박자는 춤을 추다가 잠깐씩 멈추는 박자라서가 아닐까요? 4박자는 시계 초침처럼 계속 전진하는 박자고요.”
<해변의 여인>이 만들어지는 동안, 정용진 음악감독 역시 해변의 사나이였다. 무조건 이리 오라는 홍상수 감독의 우격다짐에 못 이긴 척 장비의 절반을 싣고 서해 신두리 바닷가 모텔로 내려가 한달 넘게 머물렀다. 창을 열면 길 건너에서 배우와 스탭들이 영화를 찍고 있었다. 정용진 음악감독은 그날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들이 남긴 느낌을 입 안에 머금은 상태에서 곧장 악보에 풀어놓았다. 메트로놈조차 쓰지 않았다. <해변의 여인> 중 고현정이 부른 <바람이 불면>은 홍상수 영화 최초의 가사가 있는 오리지널곡. O.S.T에는 재즈 밴드의 연주곡과 대사와 섞인 사운드트랙만 실렸다(그녀가 흥얼대는 다른 곡 <도마뱀>은 일본 애니메이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삽입곡이다). 정용진 음악감독은 ‘누구누구의 테마’를 만들지 않는 주의다. 영화 전체의 인상과 조화로운 음악을 우르르 만들어놓은 다음, 장면과 음악이 저절로 짝을 찾아가는 광경을 지켜본다. 따라서 영화의 요체가 무엇인지 감독과 소통할 길만 내면, 편집본을 넘겨받는 시기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음악은 배우의 목소리톤, 장면의 환경까지 고려해서 악기를 구사하지 않으면 결국 영화를 해치고 말아요”라고 말하는 그가 제일 찬탄하는 영화음악가는 <아메리칸 뷰티> <그린 마일>의 토머스 뉴먼이다.
<해변의 여인> 시사에 다녀온 기자들의 술자리에서는 영화음악가 필립 글래스, 히사이시 조, 마이클 니먼의 이름자가 오갔다. 하지만 정작 정용진은 미니멀리스트 음악에 편애가 없다고 말한다. 하긴 세상이 들은 그의 음악은 1악장에 불과하다. 정용진의 다음 영화인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의 메인 타이틀을 슬쩍 엿들으니 과연 밴조와 아코디언이 쿵짝쿵짝 난리법석이다. SF 장르에도 관심이 깊은 그는 동네 아이들을 불러모아 과학교과서 단원들을 주제로 녹음한 동요집 <디스커버리 송>도 온라인에서 배급 중이다. 음악과 이야기를 실컷 듣고 작업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그의 책상 위에 펼쳐진 책 제목이 불쑥 눈 안으로 뛰어든다. <만물은 어떻게 작동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