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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보고] 베니스국제영화제, 8월30일 개막
박혜명 사진 이혜정 2006-09-05

황금사자, 63번째 주인공을 찾아 레디~ 액션

남부의 태양은 기절할 만큼 뜨겁다. 베니스에서 정신을 잃게 된다면 그 이유는 복잡한 길을 헤매다 지쳐서일 수도 있고, 물살의 움직임에 따라 방정맞게 출렁대는 바포레토(vaporetto: 베니스의 대중교통수단. 20∼30인승 쪽배다. 매우 낡았고 매우 시끄럽다) 때문에 속이 메스꺼워져서일 수도 있지만, 넋놓고 걷다가 태양빛에 과다 노출되어서라고 핑계대도 얼마든지 통할 것이다. 눈부시다 못해 휘황찬란한 이 햇빛은,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부는 9월초의 베니스를 여전히 여름 축제의 장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제6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개막 전날인 8월29일 밤에는 비가 쏟아졌다. 닷새 전부터 하루씩 당번 교대하듯 하늘이 맑고 흐렸던 터라 여차하면 개막식은 칙칙하거나 축축한 날씨 속에 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 예약이라도 해둔 것처럼 8월30일의 하늘은 아침부터 투명하고 푸르렀다. 허약한 사람은 바로 졸도시킬 수 있는 위력의 태양도 다시 내리쬐었다. 너무 찬란해서 사람들은 온종일 눈쌀을 찌푸려야 했다.

예술성과 상업성을 적절히 배분한 라인업

올해 베니스의 라인업은 그보다 더 휘황찬란하다. 브라이언 드 팔마, 알폰소 쿠아론, 스티븐 프리어즈, 대런 애로노프스키, 차이밍량, 두기봉,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곤 사토시, 오토모 가쓰히로, 알랭 레네, 장 마리 스트라우브. 미국과 아시아와 유럽에서 각각 자기만의 영화적 위치를 점한 쟁쟁한 작가들의 신작이 21편의 경쟁작 중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평생공로상 수상자로도 예정된 데이비드 린치, 바로 지난해 베니스 방문 이후 1년 만에 다시 신작을 완성한 마뇰 드 올리베이라, 올리버 스톤과 스파이크 리, 구로사와 기요시와 오시이 마모루와 아오야마 신지, 지아장커, 가린 누그로호, 알랭 로브그리예 등이 경쟁외 부문에서 초청작을 들고 이곳 리도를 찾는다.

‘다양한 라인업’ 혹은 ‘좋은 라인업’이라는 표현은 밋밋하다. 올해 베니스의 라인업은 서극, 관금붕, 스티븐 소더버그, 필립 가렐, 아벨 페라라, 파트리스 셰로, 로랑 캉테, 베르너 헤어초크, 페르난도 솔라나스 등의 신작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던 지난해보다도 영화적 다양성 확보에 대한 의지가 훨씬 더 강하게 드러난다. 미국에서 기개봉한 상업물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까지 낀 13편의 할리우드발 영화 리스트는 ‘영화제 흥행을 위한 할리우드 할당제’를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지만 그조차도 올해는 영화제 쪽이 ‘다양성의 한 부분’이라 우기면 받아줄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묶음은 아시아의 영화들이다. 그중에서도 일본영화는, 미야자키 고로의 애니메이션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까지 합하면 무려 6편에 달한다. 홍콩과 대만을 포함한 중국어권 영화는 총 7편이 초청됐다. 지난해 30∼40년대 중국영화 회고전이 열린 점까지 감안하면 베니스는 이제 할리우드 할당제뿐 아니라 아시아 할당제에도 엄청난 공을 쏟고 있다 말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 레네와 스트라우브, 로브그리예의 신작들은 영화제의 예술적 위상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블랙 달리아>의 감독, 원작자, 배우들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를 보러온 일반 관객

유럽의 예술성, 할리우드의 상업성, 아시아의 역동성을 한데 아우름으로써 제63회 베니스국제영화제의 식단은 그 어느 때보다 고르고 영양가 높다. 이는 임기 3년째에 접어든 마르코 뮐러 집행위원장이 이룬 뛰어난 성과 가운데 하나로 칭찬받아 마땅할 것이다. 영화제 라인업과 관련한 마르코 뮐러의 섭외 및 프로그래밍 능력은 지난해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다. 1999년 취임한 알베르토 바르베라의 3년과 2002년 취임한 모리츠 데 하델른의 2년. 특히 전 베를린 집행위원장으로 무려 22년을 지내고 온 하델른이 당시 베니스 시장 파울로 코스타와의 불화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리도를 떠났던 사실을 떠올린다면 뮐러의 조용한 자신감과 원만한 대인관계는 더욱 신뢰할 만하다.

불 붙은 로마영화제와의 전쟁

지난 몇년간 마치 바다 한가운데 놓인 바포레토처럼 주체없이 흔들리던 베니스영화제는 비로소 정거장에 안착한 것인가. 모든 일이 그렇듯 쉽게 단정내릴 순 없다. “이탈리아 영화계는 축제들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베니스영화제와 로마영화제의 전쟁이다.” 이탈리아 언론들이 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끼얹은 이 찬물은 오는 10월 초, 그러니까 베니스영화제와 불과 한달 간격을 두고 열릴 로마영화제에 대한 것이다. 그러잖아도 해마다 할리우드 스타 유치에 혈안이 되는 베니스를 약올리기라도 하듯 로마영화제는 출범 첫해부터 특A급 스타 니콜 키드먼의 방문을 확정지었다. 로마영화제의 출범은 단지 한 나라 안에서 벌어질 라인업과 스타 유치 경쟁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말 이탈리아 정부가 문화예술부문 재정지원을 40% 삭감키로 결정하면서 더욱 허리를 졸라매야 할 상황인데다 경쟁 영화제로 인해 베니스에 돌아올 정부 지원의 몫은 좀더 축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베니스의 자체적인 숙원사업도 좌절될 위기에 놓였다. 베니스의 숙원사업이란 ‘팔라조 델 시네마’, 즉 영화제 본부 건물의 신축이다. 새로운 팔라조 델 시네마 건축과 관련해 영화제가 부족하다고 밝힌 예산 액수는 약 100만유로(12억6천만원). 현재 영화제 본부 건물이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5천여명. 현지 언론들이 지적하는 대로 “그중 대부분은 기자들이고, 따라서 업계 관계자들이 발디딜 틈이 없다”. 협소한 장소문제는 그동안 베니스영화제의 마켓 활성화에 주요한 장애로 인식돼왔다. 영화제 본부 건물을 현재보다 큰 규모로 신축하게 되면 마켓 관련 시설을 적극 늘릴 수 있고 이것이 전세계 업계 관계자들을 더 많이 끌어들이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 이탈리아 언론과 영화제쪽의 예상이다. 영화제 개막 기자회견에서 마르코 뮐러는 “협소한 장소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해보고자 상영관 좌석을 1500석 정도 늘렸다”고 밝히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중요한 영화제는 마켓과 함께 성장하는데 베니스는 이를 뒷받침해줄 여력이 현재로선 모자란다. 지금보다 확대된 공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팔라조 델 시네마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다.”

경쟁부문 심사위원인 박찬욱 감독

이탈리아 현지 언론들은 한달 뒤에 있을 제1회 로마영화제와 베니스와의 긴장 관계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호기심을 나타내고 있다. 마시모 카차리 베니스 시장은 발터 벨트로니 로마 시장과 같은 당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 인터뷰에서 “정부가 로마영화제를 지원하면 총을 들겠다”는 거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반면 개막 기자회견장에서의 마르코 뮐러는 매우 지혜롭게 말을 에두르며 “로마영화제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현지 언론들은 베니스영화제의 고질적인 또 다른 문제들, 가령 리도섬 내에 저렴한 숙소가 거의 없어 기자나 게스트들이 리도섬 바깥에 숙소를 잡고 날마다 곤돌라나 바포레토로 영화제 장소까지 이동하는 불편함 역시 로마영화제와의 경쟁에서 베니스를 불리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 될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마르코 뮐러는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얻을 기회와 관심 때문에 감독들은 베니스의 명성을 더 원한다”고 답했다. 그의 말은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사람들은 베니스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여유로운 확신으로 비친다.

<블랙 달리아>, 영화제의 화려한 포문을 열다

올해와 같은 라인업이 계속된다면 뮐러의 확신은 당연히 오만과 허풍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개막식 행사를 앞둔 8월31일 저녁, 개막작 <블랙 달리아>의 게스트들은 레드카펫을 밟았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스칼렛 요한슨, 조시 하트넷, 아론 에크하트, 미아 커시너 등 배우들 그리고 원작자 제임스 엘로이는 예정된 시간을 40분이나 넘겨 행사장에 도착했지만 이들을 보기 위해 바포레토나 곤돌라를 타고 리도섬까지 온 팬들의 환호는 그칠 줄 몰랐다. 포토라인에 설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수십명의 사진기자들과 그 권한을 받지 못해 레드 카펫 바깥으로 밀려난 수백명의 사진기자들은 할리우드의 명감독과 스타들을 향해 다 함께 플래시를 터뜨렸다(마카로니 ID라고 부르는 그 권한의 부여 기준은 참으로 애매하다). 이유 불문하고 일간지 기자들만 입장 가능한 상영 스케줄의 신설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짜여진 모든 기자회견 일정에 아침부터 혀를 내둘렀던 전세계 주간지·월간지 기자들도 억울함을 잠시 억눌렀다. 어쨌거나, 뮐러의 말마따나 ‘베니스의 명성을 원해’ 이곳을 찾은 세계 영화계 거장들의 영화 축제는 시작됐다. 영화제를 둘러싼 모든 문제와 불편함과 불합리함에 대한 고뇌와 감정들도 그 열하루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잠들어 있을 것이다.

[개막식 화보 보기]

“감전 쇼크와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아가길 바란다”

카트린 드뇌브·박찬욱 등 심사위원단 8인의 기자회견

개막식에 앞서 오후 1시 열린 심사위원단 기자회견에는 경쟁부문 심사위원장 카트린 드뇌브를 비롯해 감독 비가스 루나, 카메론 크로, 감독 겸 제작자 미켈레 플라치도, 페드로 코스타와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제작자 파울로 브랑코, 배우 슐판 하마토바 그리고 감독 박찬욱이 마르코 뮐러 집행위원장과 함께 기자회견장에 자리했다. 마르코 뮐러는 박찬욱을 “그간 좋은 작품을 만들어왔고 지난해 <친절한 금자씨> 출품에 이어 올해 심사위원으로 초대된 감독”이라고 소개했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몇몇 기자들은 박찬욱 감독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카트린 드뇌브에게 묻겠다. 심사위원장으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위원장이기에 앞서 나 역시 심사위원 중 한명이다. 의견의 조화와 정확성을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박찬욱 감독에게 묻겠다. 심사위원으로서 올해 베니스영화제를 대하는 소감을 말해달라. 그리고 같은 아시아 감독으로서 두기봉 감독의 영화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올해 경쟁부문에는 한국영화가 단 한편도 없어서 처음엔 영화제쪽에 내심 섭섭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영화가 있으면 어떻게 공정하게 심사해야 할지 고민이 됐을 텐데,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최대한 공정하게 심사를 하고 싶다. 두기봉 감독의 영화는 많이 봐왔고 감독으로서 그를 언제나 존경해왔다.

-미켈레 플라치도에게 묻겠다. 로마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가 어떻게 갈 것이라고 생각하나. =베니스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영화제이고, 때문에 누가 생각하더라도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를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이라 본다. 로마가 영화제를 여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앞으로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카메론 크로 감독에게 묻겠다. 관객이 올해 베니스를 어떤 식으로 기대하기를 바라는가. =베니스영화제는 열정적이고 영향력이 크다. 집행위원장이 일을 잘하고 있으며 이것이 좋은 결과를 맺고 있다. 지금 뿌린 씨앗도 겨울과 봄으로 이어지며 결과를 낼 것이다. 영화제는 중앙전력 공급소와 같다. 지금 배출하고 모은 전력들은 가을과 겨울, 봄 그리고 그 이후에 올 계절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할 것이다. 감전 쇼크와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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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지원 김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