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 <극장전>에서 멈칫거렸던 여행이 다시 시작됐다. 영화감독 중래(김승우)는 내켜하지 않는 미술감독 창욱(김태우)을 앞세워 서해안으로 향한다. 창욱이 애인이라 소개한 싱어송라이터 문숙(고현정)은 불청객이다. 불청객은 두 남자 사이에서 야릇한 감정선을 조율하는데, 중래에게 좀더 기회를 준다. 문숙에 따르면 “일단 자야 애인”인데 창욱과 뽀뽀만 했다고 밝혀주니 저지르기 좋아하는 중래의 엔진에 시동이 걸린다. 중래와 문숙이 잠자리를 갖기까지의 기승전결도 대단하지만 감정과 감성의 쓰나미는 그 다음이다. 중래는 약간 치사한 방식으로 문숙을 내친 뒤 홀로 서해안 여행지로 되돌아온다. 거기서 문숙을 닮았다고 여기게 된 선희(송선미)를 만나 또 한번 남성 엔진을 발진시키는데 문숙이 불쑥 찾아오는 바람에 새로운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관계를 횡단하는 주체는 중래지만 그를 횡단하는 건 문숙이다. “우리가 (우주를) 의식해주지 않으면 우주는 무의미”하다고 믿는 문숙이 중래를 의식해주자 중래가 의미를 갖게 되는 과정이랄까. 애초 중래가 서해안에 온 건 벽에 부딪힌 시나리오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서다. ‘기적에 관하여’라는 이름의 시나리오는 우연한 사건에서 세상의 비밀을 밝힐 수 있다고 믿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다. 중래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고민은 이미지의 편견, 이미지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자기 아내가 자기 친구와 잤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갖게 된 아내에 대한 협소한 이미지의 강박이 자꾸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문숙을 향해서도 반복되고 있다며 괴로워한다. 중래는 문숙을 또 한번 내치면서 돌파구를 찾았다고 좋아한다. 그러나 노트 두장에 메모된 그 비밀을 우리는 볼 수가 없다(그것이 <해변의 여인>일지도 모르겠다).
관객(특히 여자)의 심기를 긁어대는 홍상수의 ‘야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해변의 여인>은 아주 살갑다. 나이 드니까 해가 지는 서해안이 좋다는 중래의 말처럼, 영화도 온기의 지혜를 차분하게 내뿜는 서해안을 닮았다. 감독 자신의 내심을 솔직하게 들려주는데, 심지어 그림까지 그려가며 친절히 설명해준다. 단일한 무엇으로 포착할 수 없는 수많은 디테일이나, 영화 첫 데뷔를 성공적으로 치르는 고현정을 비롯해 배우를 이끌어가는 솜씨가 역시 홍상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