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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희의 의식이 빚어낸 판타지, <시간>

연인의 사적 이야기를 넘어 시간의 철학을 말하는 <시간>

1. 잔혹한 얼굴

작가 밀란 쿤테라는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에 대한 책 <화가의 잔인한 손>의 서문을 썼다.

소멸해가는 주체의 형상이라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 앞에서 밀란 쿤테라는 우리가 연인을 연인으로 알아보게 만드는 기호적 최소 단위에 의문을 던진다. 그 의문을 <시간>이라는 영화에 맞춘 질문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연인을 연인으로 알아보게 되는 최소 단위는 무엇일까? 얼굴이라면 구체적으로 얼굴의 어떤 선, 주름 아니면 윤곽! 입술의 색, 눈빛이나 위를 향한 아니면 아래를 향한 눈 꼬리…. 얼굴이 아니라면 함께 지낸 시간만큼 누적된 공유된 기억. 몸이나 냄새, 소리? 손을 잡았을 때의 느낌은. 이 연쇄적 질문을 시작할 수 있는 최소 단위로 <시간>은 얼굴을 설정한다. 그러나 <시간>의 서사의 화살은 예컨대 성형으로 얼굴이 바뀌었을 때 나는 그 변화의 경과를 알고 있지만, 그 경과를 알지 못하는 내 연인은 나를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라는 쪽으로 가고 있지 않다. 오히려 ‘나’는 그 변화를 연인이 알지 못하게 만들어 똑같지 않은 얼굴, 같지 않은 몸으로 그를 만나려 한다. ‘나’의 사랑을 누추하게 만드는 시간에 대한 의혹이며, 얼굴 성형을 통해 가져오려는 변화다.

사회적 인정투쟁과는 상당 정도 결과 겹을 달리하는 연인과 연인 사이의 인정 혹은 인정을 통해 연인으로 가게 되거나 못 가게 되는 과정을 다룬 <시간>은 그러나 성형이라는 당대의 말썽 많은 의료적이며 사회적이고 사적인 유혹 기술을 다룸으로써 연인의 사적 이야기를 은연중 넘어선다.

<시간>이라는 영화에는 몇개의 시간 단위들이 있다. 이중 연인이 연인에 대한 육체적 호기심을 멈춘다고 추정되는 시간은 물리적이면서도 심리적 단위다. 시간이 낡게 한 사랑은 세희(박지연)가 지우(하정우)에게 품고 있는 혐의다. 상식적 혐의다. 세희는 지우와의 약속 시간에 늦어 뛰어가다가 성형 클리닉 앞에서 한 여자가 들고 가던 액자를 깨트린다. 막 성형을 마친 듯한 그녀는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쓰고 있다. 액자를 깨트린 세희는 “잠시만요. 여기서 기다려주세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선글라스의 여인은 잠깐 기다리는 대신 가던 길을 가고, 세희는 유리를 갈아 끼운(이 장면은 생략된다) 문제의 액자를 들고 지우가 기다리는 카페로 간다. 이 장면이 있기 전 영화는 성형수술 과정을 클로즈업을 동원해 소개했다. 한편, 세희를 기다리던 지우는 카페에서 일하는 여자에게 제법 긴 시선을 보낸다. 허겁지겁 들어오던 세희는 지우의 그런 시선을 막아선다. 그래서 시선의 대상이던 카페 여자는 세희로 치환된다. 질투가 시작된다. 카페 밖에서 가벼운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나 지우가 그녀들과 접촉을 하자 세희의 질투심은 걷잡을 수 없는 히스테리로 바뀐다. 다른 한편, 지우는 액자 속의 여자를 보고 무섭다고 말한다.

외부가 창으로 환하게 들어오는 카페와 젊은 연인 그리고 질투와 같은 감정들로 채워진 영화의 초반부는 도입부의 그래픽한 성형수술 장면을 거의 지워내듯 일상적이다. 그러나 세희의 카페에서의 히스테리와 곧이어 이어지는 그녀의 대사, 지우를 쳐다보는 여자의 눈을 파내고 싶다는 발언은 영화에 광기의 징후를 드리운다.

다른 여자의 눈을 파내는 대신 세희는 성형외과를 찾아가 자신의 얼굴, 육신을 파내려 한다. 성형외과 의사는 우선 현재의 세희보다 더 예쁜 얼굴로 만들어줄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또 피와 살이 범벅이 되는 흉한 수술 과정을 보여준다. 세희는 예쁜 얼굴이 자신의 수술 목적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수술을 강행한다. 이 영화는 성형외과 의사에게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그는 성형을 하려는 세희를 만류하며, 그녀가 수술 집도 중에 불쑥 찾아와도 반겨주며, 또 성형수술만이 아니라 외양의 변화가 가져다줄 심리적 문제도 고려한다. 이처럼 그의 역할은 돈이 목적인 성형외과 의사 수준을 넘어선다. 의사의 이러한 존재감은 이 영화가 연인의 이야기를 넘어서는 참조물의 역할을 상당 부분 수행하고 있다.

예의 프란시스 베이컨의 화가의 잔인한 시선은 푸줏간에 걸린 고기의 색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을 포착해냈으나, 이 영화에서 카메라의 시선이 그 잔혹함에 미감을 느끼는지는 분명치 않다. 미학적으로 그리 고르지 않은 클로즈업의 빈번한 사용으로 미루어 그와 상반된 충동을 느끼는 쪽에 더 가깝다. 그러나 프란시스 베이컨의 다른 충동, 즉 기 자아나 대상의 주체성이나 대상성의 소멸에 근접하고는 있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세희는 2차 자아인 새희(성현아)가 아닌 그 누구도 기 세희를 알아보지 못하는 기 자아의 적멸쪽으로 가며, 지우로 추정되는 한 남자는 트럭에 부딪히는 교통사고로 얼굴의 형상성 자체를 잃어버린다.

2. 세희와 새희: “잠시만요.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나쁜 남자>에서 정점에 달한 김기덕 감독의 페미니즘과의 불화는 소문난 일이며 페미니즘 진영의 비판, 문제제기는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나 잘못으로부터 배우는 것, 사유와 실천의 변화 가능성을 믿지 못한다면 페미니즘의 진보성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난 페미니즘의 비판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변화를 꾀한 동시대 감독 중 한 사람이 <사마리아> 이후의 김기덕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성이라는 문제를 화두로 삼고 있다가 젠더 정치학의 역학 속으로 걸어들어간 것이다. 물론 진보적 변화, 사유와 실천이라는 것이 화살마냥 휭 하고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마리아>와 <빈 집>의 젠더 정치의 일취월장이 그 다음 작품인 <>에서 뚜렷하게 확인되거나 진전돼 보이는 것은 아니나, <시간>에는 진전과 일정한 반복이 있다.

나는 이 영화가 세희의 의식이 빚어낸 판타지로 읽을 수 있는 방식으로 구조화했다고 생각한다. 도입부의 성형수술 장면은 사실 동시대의 은밀한 구경거리며 콘텐츠다. 인터넷 검색의 인기순위 수위를 늘 장식하는 스타들의 성형 소식은 말할 것도 없고, 고교 및 대학 졸업 뒤 성형 계획 및 중장년, 노년의 주름을 대비한 성형 등 주로 여성들의 성형 열풍과 그로 인해 번성하는 성형산업은 <시간>의 참조 틀이며 배경이고 콘텍스트이다. 세희 이야기의 미장센이기도 하다.

도입부 성형장면이 나온 뒤, 세희는 막 성형을 마치고 나온 여자에게 당부한다. 위에서 한번 인용했던 말이다. “잠시만요.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이후 우리가 이 장면의 반복을 다시 만나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다. 세희가 새희 이후 두 번째 수술을 마치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이전의 세희처럼 보이는 여자가 뛰어와 영화의 초장이 반복된다. 즉, 액자를 깨고 위의 대사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의 시간상 구조로 보면, 이후 전개된 현실적 진행은 없으며 세희가 성형외과에서 나오는 여자와 부딪친 뒤 갖게 된 순간적 판타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 판타지의 미장센이 성형사회인 것이다. 위의 “잠시만요. 여기서 기다려주세요”는 세희가 성형을 마치고 이미 과거가 된 사진 액자를 들고 가는 여자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하지만, 두말할 필요도 없이 관객에게 건네는 말이다.

단 한번 영화는 세희가 아닌 새희로 하여금 관객에게 직접 말 걸도록 한다. 지우는 세희가 성형해 재구성한 새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어땠냐는 새희의 질문에 지우는 새로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우는 잠들고, 새희는 카메라를 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원하는 대로 되었어요. 제가 행복해 보이나요? 그런데 이상하게 슬프네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요.” 이것은 지우가 영화 속에서 편집하고 있는 영화가 <빈 집>이라는 것과 함께 제시된 자기 성찰적 순간이다.

세희는 자신을 새희로 재구성해 지우와 일종의 사랑의 양피지, 겹쳐씀으로써 그 의미를 중첩시킨 뒤 다시 새희로 서명함으로써 새로운 관계로 끌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보인다. 사라진 세희는 지우에게 사랑한다는 말이 첩첩히 씌어진 편지를 보내고, 지우가 글자를 알아보지 못하자 새희는 지우에게 이것을 해석해주고 자신의 이름을 덧대어 쓴다. 그러나 지우는 칼로 새희의 겹쳐쓴 모음을 긁어낸다.

3. 시간의 적대

영화가 “잠시만요. 여기서 기다려주세요”라고 이야기했고, 그래서 우리는 기다렸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관계의 재구성이나 흔적의 발견, 중첩이나 겹쳐쓰기 대신 세희와 지우의 소멸을 본다. 이것은 뱀이 자신의 꼬리를 먹으며 생명을 연장하다가 죽어가는 것과 같다. 즉 세희와 새희 그리고 제3의 여자는 재탄생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삶의 리듬은 중지된다. 그것은 얼굴을 지움으로써 연기의 연쇄에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가 점차 사라져가는 와중에 관계의 주체는 인정의 그물을 빠져나가고 심리적 현실만이 명령을 하게 되면서 주체는 점점 텅 빈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형수술이 정육점의 난도질이라며 세희의 수술을 문책하는 지우에게 의사는 협박과 저주를 퍼붓는다. 네 아버지도 널 못 알아보게 하루 만에 바꿔버릴 수 있어!

마지막으로 의사가 세희에게 묻는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해드릴까요? 지우와 세희는 의사의 말을 받아들여 수술대에 오른다. 그들은 아버지도 연인도 자신을 알아볼 수 없는 사회적 고립 속으로 의사에게 동의를 보낸 뒤 자발적으로 걸어들어간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절대 권력자는 젊은 연인인 세희와 지우를 말리고 협박하기도 하고 권유하며 중재하다가 그들을 일정한 틀로 제조해내는 성형외과 의사다. 세희의 변덕스러움은 젊은 연인의 변덕일 뿐이지만 의사의 칼, 난도질은 시간의 비가역성에 절대적으로 동조한다. 이 영화에 진정한 공포가 있다면 그것은 세희의 변해가는 얼굴이 아니라, 의사의 칼, 그의 권력이다. 세희는 늘 똑같은 몸, 얼굴이어서 미안해라고 말하고 성형수술 뒤 5개월의 잠적 뒤 다시 태어남, 시간의 갱신을 기도했다. 세희가 원한 것은 과거와 중첩된 새로운 시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이나, 시간은 연인의 편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시간의 적대는 오래된 연인의 그것을 넘어 생체 권력을 포함하는 사회적 측면으로 슬그머니 확장된다. 난 철학자가 아니지만 이 영화는 철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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