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천둥이는 정말 뛰고 싶었을까? <각설탕>

경마시스템의 구조를 말(馬)의 순수 욕구로 오해한 <각설탕>

*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해서 읽으십시오.

<각설탕>의 장르는 뭘까? 우선 스포츠영화는 아니다. 마칠인삼(馬七人三)의 경마에서 천둥의 경주역량이 ‘고무줄’ 처리되고, 기수의 기승술이나 조교사의 전략구상이 전무한 영화를 스포츠영화로 보긴 힘들다. 여성영화로 보기도 어렵다. 직업세계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이 노골적으로 나오지만, 시은에게 쏟아지는 성차별이 다른 동료여성에겐 그다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박해의 본질이 ‘주인공이기에 존재하는 역경’, 즉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콤플렉스’를 형성하기 위해 동원된 역경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각설탕>의 장르는 엔딩 크레딧의 사진들이 증명하듯 ‘인간과 동물간의 우정’을 그린 ‘(반려)동물영화’이다. 인간과 정을 나눈 동물이 죽는 슬픈 영화를 ‘동물 신파’로 정의한다면, 동화 <플란다스의 개> <집없는 아이>부터 <내사랑 토람이>(TV)나 <에이트 빌로우>까지, ‘동물 신파’의 최루성은 인간 신파의 최루성을 훨씬 능가한다. 어른보다는 아이가, 인간보다는 동물이 희생될 때, 무고함과 순정함에 더 많은 눈물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각설탕>은 ‘동물 신파’로서 충분히 울린다. 그러나 <플란다스의 개>나 <내사랑 토람이>가 주는 감동은 없다. 동물의 일방적 희생을 우정으로 미화하는 ‘도덕의 아전인수’가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각설탕>에서 선악은 분명하다. 시은-윤 조교사-마주(백일섭)는 선하고, 철이-김 조교사-장 마주는 악하다. 이들이 악한 이유는 지나친 승부욕 때문인데, 그것의 절정이 “다리가 똑 부러져도 좋으니, 발주대에만 나가도 원이 없겠다”는 기수를 출전시켜 죽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출전을 소원하던 기수에게 출전기회를 준 김 조교사의 행위는 (죽음은 의도된 게 아니었으므로) ‘인식있는 과실’임에도 악행이고, 달리다 죽을 게 뻔한 기수를 출전시켜 죽게 한 윤 조교사의 행위는 ‘미필적 고의’임에도 (기수의 선택을 존중한) 선행으로 이해하는 게 합당한가? 이는 윤 조교사의 변명을 들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가능했던 건 윤 조교사가 시은의 편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편은 착하고, 남의 편은 악하다. 도덕의 아전인수의 시작.

시은은 천둥이 수술을 거부하는 몸짓을 ‘경마에서 뛰다가 죽기를 원함’으로 유추하여 순직게 한다. 그런데 수술 거부가 ‘순직의 의지’임을 어찌 확신할 수 있을까? 백보 양보하여 순직의 의사표시가 맞다치자. 그러나 그것이 온전한 천둥의 의지일까? 대개의 순직이 그러하듯 시스템의 의지가 암묵적으로 강요된 건 아니었을까?(<챔피언>에서 링에서 죽은 선수 역할을 했던 유오성이 순직의 미학을 말하는 아이러니!) 순직은 숭고한가, 우매한가, 잔학한가? 천둥은 믿었던 가족에게 팔려 온갖 고초를 겪다가 다시 시은을 만났을 때 경주마가 될 것을 요구받는다. 뛰는 것을 좋아해도 경마의 룰에 맞춰 뛰기는 힘들다. 출발법을 익히고 1승을 올리기까지 살이 패도록 맞는다. 체력이 달려 코피를 흘리는데도, 시은은 ‘각설탕’과 채찍으로 “철이는 꼭 이기고 싶다”는 말로 천둥을 압박한다. 천둥은 다시 버려질 것이 두려워 시은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내면화한다. <말아톤>의 엄마는 초원의 뛰고자 하는 의지가 초코파이 때문인지, 버려질까 두려워서인지 회의하지만, 시은은 천둥의 의지를 성찰하지 않는다. 채찍 자국을 보고도 자신이 지나친 승부욕의 김 조교사와 똑같아지고 있음을 반성하지 못한다. 천둥의 죽음을 숭고한 자기실현이자 장렬한 전사로 믿을 뿐, 자신이 천둥을 착취해왔음을 끝끝내 깨닫지 못한다(이때 이름 짓던 때를 떠올린다. “이름은 짓는 사람 마음이니까.” 주종관계의 확인. 프라이데이와 로빈슨 크루소). 도덕의 아전인수의 완성.

나쁜 저들과 착한 우리라는 이분도식에 갇힌 채 마주(馬主)는 조교사를, 조교사는 기수를, 기수는 말을 착취하는 경마시스템의 구조를 인지하지 못하고, 왜 기수와 말의 달리고 싶은 순수 욕구는 자본의 욕망에 포획되어 밟혀죽거나 피 토하며 죽을 운명을 감수해야만 하는지 반문치 못한다. 그녀가 천둥을 동생처럼 사랑했다면 (경마시스템에 저항하진 못하더라도) ‘경마도 싫고, 동생 죽여 우승하는 것도 싫으니, 제주도 목장에서 너랑 나랑 자유롭게 달려나 보자’고 했어야 옳지 않은가? 시은과 천둥에게 한마디씩만 하고 싶다. 시은에게. “달리다 죽게끔 하는 게 그게 누나 사랑이에요?” 천둥에게. “얘야, 본래 아는 놈이 더 무섭단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