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찌르고 달아난 인라드의 왕자 아렌은 세상을 여행하는 마법사 하이타카를 만나 그와 동행하게 된다. 진짜 이름이 게드인 하이타카는 세계의 균형이 깨어지고 마법이 사라지는 원인을 찾아내려 하고 있다. 옛 친구인 테나의 집에 머물던 게드는 자신에게 패했던 마법사 거미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이런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거미의 함정에 빠진 게드는 마법의 힘을 잃고 만다. 이제 아렌은 마법을 잃은 채 갇혀 있는 게드를 구하고, 자신을 흉포하게 만드는 마음속의 그림자와 대결해야만 한다.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은 어슐러라 K. 르 귄의 연작소설이 원작인 애니메이션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 감독은 방대한 원작의 세계 중에서 3권 <머나먼 바닷가>를 뼈대로 삼고 4권 <테하누>의 인물을 덧붙여 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게드전기…>는 캐릭터와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원작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부친과 혈통을 존중하던 아렌은 자아분열을 겪으며 아버지를 공격하는 소년이 되었고,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벌어졌던 게드와 거미의 사투를 좀더 평범한 형태로 대신하는 역할도 맡았다. 건축가로 일하다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데뷔한 미야자키 고로는 르 귄보다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전통에 충실하고 싶어 이런 변화를 시도한 듯하다. 소년과 소녀가 세상을 구원하며 사랑을 나누는, 천진난만한 몸짓으로 세계의 근원에 다가가고자 하는 애니메이션. 그 때문에 고대의 용이 날아오르는 <게드전기…>의 마지막 장면은 원작인 <테하누>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가까워보인다.
뛰어난 원작을 각색한 애니메이션이 원작의 세계를 고스란히 복제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게드전기…>는 죽음이 있어 삶이 가치를 얻고, 어둠이 있어 빛이 존재하는, 원작의 깊은 철학 또한 옮겨오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대현자 게드가 드문드문 들려주는 세계의 균형과 마법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지만, 그의 대사는 스토리와 맞물리지 않고 이해하기도 힘든 지루한 설교에 불과하다. 자신만의 길을 찾았더라면 <게드전기…>는 판타지와 애니메이션의 두 가지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은 애니메이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하나 포기하지 못해 쩔쩔매는 이 애니메이션은 데자뷰가 넘쳐나는 지루한 이야기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고보면 미야자키 고로의 아렌이 저지른 부친살해도 왠지 풍성한 유산을 이어받은 자의 어리광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