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음악의 행복한 동거가 시작된다. 아시아 유일의 음악영화제인 제천국제음악영화제(JIMFF)가 그 두 번째 커튼을 8월9일부터 14일까지 열어젖힌다. 행사가 신설된 지난해 기대 이상의 반응을 모았던 만큼 올해 영화제는 더욱 활발한 관객 참여를 유도하고 행사를 안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음악영화제’와 ‘휴양영화제’라는 두 가지 성격을 모두 충족시키려는 주최쪽의 노력은 다채로운 프로그램에서 드러난다.
27개국에서 온 45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올해 제천영화제의 개막작은 브라질영화 <프란시스코의 두 아들>이다. 음반을 통산 2천만장이나 판매할 정도로 브라질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형제 듀오 제제와 루치아노 디 카마르고의 실화를 근거로 한 이 영화는 아들들을 성공시키기 위해 헌신한 아버지 프란시스코 디 카마르고에 초점을 맞춘다. 폐막작은 인도의 발리우드 뮤지컬영화 <파리니타>다.
음악을 주제로 삼거나 음악이 중요하게 사용된 영화들을 상영하는 ‘뮤직 인사이트’ 섹션에서 관심을 끄는 건 민감한 정치·사회적 이슈에 음악이 개입하는 풍경을 담은 다큐멘터리 작품들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래퍼가 음악을 통해 교류하고 대립하는 과정을 다룬 <분노의 채널>, 이라크 전쟁과 마이애미 슬럼의 살벌한 풍경을 대비해 보여주면서 힙합의 존재 근거를 묻는 <광란>, 아프리카 기니아공화국 수용소에 살고 있는 시에라리온 출신 뮤지션들이 밴드를 결성하는 과정을 그리는 <망명자 올스타 밴드> 등이 이들. 음악적 주제를 심화하기 위한 섹션인 ‘주제와 변주’에서는 라틴음악과 관련된 다양한 영화를 선보인다. 195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흑인 오르페>를 비롯해 브라질의 전설적 여가수 마리아 베타니아에 관한 다큐멘터리 <음악은 향기-마리아 베타니아> 등이 눈에 띄는 작품들. 올해부터 신설된 ‘영화음악 회고전’의 주인공은 이탈리아의 영화음악가 니노 로타다. <로미오와 줄리엣> <대부> 등의 음악을 만들었던 그의 영화 중 <8과 1/2> <레오파드> <길> <태양은 가득히> 4편이 소개된다.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는 ‘씨네심포니’ 섹션에서는 일본 사부 감독의 신작 <홀드 업 다운>, 지난해 캐나다에서 화제를 모은 <크.레.이.지>, 재기발랄한 좀비코미디 <도쿄 좀비>, 터키의 SF영화 <고라 행성의 불청객>이 관심을 끈다. 가족영화를 모아놓은 섹션 ‘패밀리 페스트’에서는 지난해 일본의 각종 영화상을 휩쓴 <올웨이즈-3번가의 석양>, 한 천재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천재소년 비투스> 등이 상영된다.
제천영화제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인 음악 프로그램 또한 성대하게 펼쳐진다. 청풍호반 등에서 공연을 펼치는 18개팀 중에는 세계적 재즈 가수 로라 피지를 비롯해 YB(윤도현밴드), 데프콘, 델리스파이스, 러브홀릭, 윈디시티 등도 있다. 또 에른스트 루비치의 무성영화 <들고양이>와 이탈리아의 마르코 달파네 그룹의 연주가 어우러지는 시네마 콘서트도 열린다. 올해부터 새로 만들어진 제천영화음악상도 시상한다. 첫 수상자는 고 신병하 음악감독이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www.jimff.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추천작 소개
프란시스코의 두 아들 Two Sons of Francisco 2005년/브라질/119분/감독 브레노 실베이라
브라질의 한 시골마을, 음악을 좋아하던 프란시스코 카마르고는 두 아들을 음악가로 키우고 싶어한다. 그는 없는 살림에 아이들에게 아코디언 등 악기를 사주고 매일같이 날계란을 먹이며 음악적 훈련을 시킨다. 두 아이는 어릴 때부터 작은 도시를 돌며 공연을 펼치고 인기를 모으지만,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한 아이가 사망한다. 이후 큰아들 미로스마는 까마득한 동생 웰슨과 함께 듀엣으로 ‘제제 디 카마르고와 루시아노’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아들들을 성공시키려는 아버지의 노력은 대단하다. 훗날 두 아들이 데모테이프를 만들었을 때, 이를 방송국에 전한 것도, 수없이 많은 사람을 시켜 방송신청을 한 것도 아버지다. 심도있는 캐릭터 탐구나 설득력있는 드라마 구축보다는 가난한 이들의 성공담에서 비롯된 감동이 더 큰 영화. 영화 후반부에는 실제 주인공들도 만날 수 있다.
분노의 채널 Channel of Rage 2003년/이스라엘/72분/감독 아낫 할라치미
2000년 무렵, 서브리미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스라엘의 유대인 코비 시모니와 TN이라는 예명을 가진 팔레스타인계의 타메르 나파르는 함께 활동한다. 그들은 “오로지 힙합만이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부르짖으며 함께 공연하고, 함께 현실을 고민하기도 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두 사람의 민족적·국가적 장벽은 힙합이라는 음악적 매개를 통해서 극복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시위가 격화되고 이스라엘의 맞대응이 거세지자 두 사람의 관계는 멀어지기 시작한다. 서브리미널은 온몸에 이스라엘 국기를 감싸고서 아랍인들을 비난하고, TN은 소극적인 방식으로 반대 입장을 밝힌다. 한때 폭력을 예술적으로 승화하는 수단으로 보였던 랩은 이제 서로를 공격하는 미사일이 되고, 총이 되고, 수류탄이 된다. 과연 예술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가.
광란 Rampage 2006년/호주/103분/감독 조지 지토스
“이라크보다 마이애미에서 더 총알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다큐멘터리 감독 조지 지토스는 <전쟁의 사운드트랙, 이라크>를 제작하던 중 바그다드의 랩배틀에 참가한 한 병사한테 이 같은 얘기를 듣는다. 지토스와 만났던 병사는 22살의 엘리엇 로벳이다. 감독은 결국 마이애미를 찾아 생활 자체가 힙합이요, 랩인 엘리엇의 형제와 가족, 친구들을 만난다. 18살짜리 동생 마커스부터 14살짜리 막내동생 덴젤까지, 이들에게 랩은 예술적 표현이라기보다 마이애미의 슬럼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을 담은 발언이다. 전장을 연상케 할 만큼 각종 총기가 널리 보급돼 있고, 폭력과 범죄가 끊이지 않는 이 빈민가 사람들은 해소되지 않는 빈부격차와 끔찍한 삶의 조건을 랩이라는 그릇을 통해 분출한다. <광란>은 힙합의 사회적 뿌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이슬란드의 외침 Screaming Masterpiece 2005년/아이슬란드/87분/감독 아리 알렉산더 에르지스 마그누손
대서양 북부에 자리한 아이슬란드는 국토의 70%가 불모지이고 12%가 빙하로 이뤄진 척박한 토양의 국가다. 인구 30만명이라는 조촐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는 90개의 음악학교와 400개의 오케스트라와 고적단이 존재하며 6천명이 각종 합창단에 소속돼 있다. 아이슬란드의 또 하나 자랑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록밴드들이다. 우리에겐 비욕이나 시규어 로스 정도만이 알려져 있지만, 아이슬란드의 곳곳에서 독특한 개성의 밴드들을 숱하게 만날 수 있다. <아이슬란드의 외침>은 이 조그만 나라가 어떻게 수많은 개성 강한 밴드들을 배출하게 됐는지를 차분하게 조명한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예술적 전통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상업성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음악을 펼치는 젊은이들의 존재라는 사실을 이 다큐는 보여준다.
고라 행성의 불청객 G.O.R.A 2004년/터키/123분/감독 오메르 파루크 소락
터키의 SF영화라고? 터키의 스타 배우 셈 일마즈가 연기하는 아리프는 UFO 사진을 유치하게 조작해서 팔아먹는 잔사기꾼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외계인에게 납치돼 고라 행성으로 끌려간다. 이곳에서는 무언가 음모가 일어나고 있고, 이 통통한 아저씨는 특유의 입담과 엉뚱함을 무기로 이 사건에 뛰어든다. <고라 행성의 불청객>은 ‘웰메이드 영화’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게이 외계인이 등장하고, <스타워즈>나 <매트릭스>을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한 장면도 있지만, 도무지 정리가 안 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터키에서 가장 많은 제작비를 들여 제작된 이 영화는 콧수염 난 아저씨가 우주의 영웅으로 활약한다는 ‘제3세계’적인 설정만으로도 흥미로운 영화다.
홀드 업 다운 Hold Up Down 2005년/일본/97분/감독 사부
<포스트맨 블루스> <드라이브> 등 독특한 정서의 코미디를 만들어온 사부 감독의 신작. 어이없이 허술한 사람들이 일으키는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펼쳐진다. 두 남자는 은행을 털지만 자동차가 견인돼 지하철 물품보관함에 돈을 집어넣으려 한다. 동전이 없어 지하철 노숙자 겸 가수의 동전을 뺏지만, 분노한 노숙자에게 쫓기다 열쇠를 잃어버리고 만다. 열쇠를 가진 노숙자는 형사들이 몰고가던 차에 치이고, 형사들은 무책임하게 노숙자를 내다버린다. 성당에서 사고를 친 남자는 강에서 떠내려오는 노숙자를 예수라고 착각하며 극진히 모신다. 이 소동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몇몇 희한한 캐릭터가 더 등장하며 이야기는 꼬여만 간다. ‘얼음예수’가 길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도쿄 좀비 Tokyo Zombie 2005년/일본/103분/감독 사토 사키치
도쿄의 어느 소화기 공장의 근로자 후지오와 미쓰오는 일보다는 유술에 훨씬 관심이 많다. 어수룩한 후지오는 미쓰오가 가르쳐주는 기술을 전혀 소화하지 못하지만 열정만큼은 대단하다. 우연히 직장상사를 살해하게 된 이들은 인근의 ‘검은 후지산’에 시체를 버린다. 검은 후지산은 온갖 쓰레기를 불법투기하는 곳으로, 시체유기는 물론이고 생매장까지 공공연하게 행해진다. 그리고 그때 시체들은 좀비로 변해 이들을 덮치고, 도쿄는 좀비가 들끓는 세상이 된다. 사토 사키치 감독의 데뷔작 <도쿄 좀비>는 좀비 호러영화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좀비영화를 뒤틀고 뒤틀어 비주류 감성의 유머로 바꿔낸 이 변칙 리듬의 황당무계 코미디는 허허실실 재미를 준다. 특히 아줌마 파마를 한 아사노 다다노부의 맥풀린 모습은 괴상한 매력을 발산한다.
<올웨이즈-3번가의 석양> Always-Sunset on Third Street 2005년/ 133분/ 감독 야마자키 다카시
도쿄타워가 한창 하늘 높이 솟아오르던 전후의 도쿄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멋진 사회생활을 꿈꾸며 상경한 소녀는 자동차 수리공장에 들어가게 되고, 한때 전도유망할지도 모른다는 꿈을 갖고 있었으나 지금은 아동용 모험소설 작가가 된 주인공은 오갈 곳 없는 소년 준노스케와 함께 지내게 된다. 1973년에 연재를 시작, 30여년간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은 원작 만화를 영화화한 작품. 도쿄타워가 한창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던 전후의 도쿄에서 한 고아 소년이 좌절한 소설가와 함께 살게 된다. 2006년 아카데미상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등 주요 부문을 비롯한 12개 부문을 석권했으며, 2005년 일본에서 약 2700만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도쿄의 서민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렸다.
<망명자 올스타 밴드> The Refugee All Stars 2005년/ 78분/ 감독 잭 나일스, 뱅커 화이트
시에라리온에서는 1991년부터 2002년까지 내전이 일어났다. 시에라리온에서 탈출한 사람들 중 기니아에 피신해 있는 사람들이 밴드를 결성하기로 한다. 다큐멘터리인 <망명자 올스타 밴드>는 이야기의 사실성만큼이나 강렬한 아프리카의 음악적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 음악, 희망, 두려움, 영감과 같은 음악과 삶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밴드의 행로를 따라가며 발자국을 남긴다. 유엔에서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나라’ 시에라리온에서 탈출, 변변한 악기도 없는 이들이 천상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감독 잭 나일스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카메룬에서 활동하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 함께 감독을 맡은 뱅커 화이트는 1990년대 중반 아프리카 문화유산을 발굴, 연구하기 위한 연구소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하바나 블루스> Habana Blues 2005/ 110분/ 감독 베니토 잠브라노
쿠바의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음악으로 성공해서 하바나를 떠나고 싶어하는 젊은 뮤지션 루이와 티토는 쿠바에 살고 있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대형 콘서트에서 리허설을 하다가 음악 프로듀서가 쿠바를 방문, 재능있는 뮤지션들을 찾아 그들에게 스페인에서 음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꿈에 부푼다. 음악이 줄 수 있는 희망만큼이나 개개인이 스스로에게 동기부여하는 희망이 얼마나 강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쿠바 음악’의 오늘을 일궈낸 뮤지션들이 아닌, 현재와 미래를 쥐고 있는 뮤지션들에 초점을 맞춘 영화이기도 하다. 감독 베니토 잠브라노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쿠바에서 영화를 공부한 인물. 장편 데뷔작인 <솔라스>로 1999년 베를린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다.
<크.레.이.지> C.R.A.Z.Y 2005년/ 125분/ 감독 장 마크 발레
장 피에르 주네가 홈드라마를 만난 듯한 영화. 재기발랄하고 독특한, 때로 현실과 어긋나 있는 듯한 이야기가 지극히 복고적이면서 일상적인 환경을 바탕으로 벌어진다. 1960년 크리스마스에 잭이 태어난다. 하지만 잭의 집안은 이미 말썽꾸러기 아들들로 홍수 직전이다. 다섯 아들을 아끼지만 지극히 보수적인 아버지의 사랑과 60년대 특유의 사회 분위기에서 빚어지는 부자간의 갈등, 화해의 이야기가 유년, 청소년,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주인공 잭의 자아 발견, 성 정체성 발견의 드라마와 겹쳐진다. 60~70년대 몬트리올이 주무대이기 때문에 그 시대를 주름잡았던 록음악이 현란하게 귀를 사로잡는다. 장 마크 발레 감독은 단편 <마법의 말들>로 선댄스영화제 공식경쟁 부문에 초청된 적이 있으며, <크.레.이.지>는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