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와 퍼즐맞추기가 스릴러의 기본적인 요소들이라면 <세이예스>에 붙여진 ‘비극적 스릴러’라는 카피는 뭔가 아귀가 안 맞는 느낌이다. 덕분에 스릴러에 대한 기대치를 가지고 이 영화를 본 관객은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다. 대신 <세이예스>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미덕도 많다. 중반부에 등장하는 덤프트럭을 이용한 카신은 그동안의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며, 후반부를 붉게 물들이는 하드고어는 <텔미썸딩>을 능가할 만큼 잔혹하다. 작가인 여혜영은 말한다. “이 영화의 키워드는 공포였어요.” 감독인 김성홍 역시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제작자인 황기성의 언급은 그러나 이와 다르다. “스릴러에 멜로를 가미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말처럼 “하나의 장르로 영화를 구분짓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여혜영의 표현에 따르면 “오랜 세월 매달려 죽도록 고생했던” 작품이 관객의 외면을 받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부산 출생의 여혜영은 본래 부산대 미대를 졸업한 미술학도였다. 그녀가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1년의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에 <어두운 영혼의 무덤>이 당선되면서부터. 각색으로 참여하여 데뷔작으로 기록되는 <눈꽃>은 그 원작자가 김수현이었던 만큼 여혜영의 개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던 작품이다. 이혜영을 신비에 싸인 팜므파탈로 등장시킨 <아주 특별한 변신>은 일종의 에로틱스릴러다. 같은 해에 제작된 <손톱>을 여혜영은 “잊을 수 없는 작품”으로 꼽는다. 자신의 개성을 충분히 발휘한 최초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였을 뿐 아니라 비평과 흥행에서 고루 좋은 성적표를 받았던 것이다. 김성홍 감독이 <손톱>의 시나리오 작가로 여혜영을 선택한 데에는 그녀의 공모당선작 <어두운 영혼의 무덤>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대한 냉정한 응시와 공포를 자아내는 스릴러적 요소가 자신이 추구하던 작품세계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이 <올가미>를 거쳐 최근에 완성한 작품이 바로 <세이예스>다.
“가질 수 없다면 파고든다!”<손톱>의 카피는 영화의 내용을 그대로 압축하고 있다. 재능없는 노처녀 화가 혜란이 남편과 경력 등 모든 것을 다 갖춘 여고동창생 소영의 삶을 질투하고 결국 그것을 파멸시켜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가 <손톱>이다. 그 과정에 미스터리나 반전 따위는 없다. 어찌 보면 우직할 정도로 한 방향으로만 몰아붙인다. 사정은 <올가미>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들의 사랑을 독차지해버린 며느리에 대한 질투와 분노가 한 중년여인을 광기에 휩싸이게 하여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일종의 직설화법이죠. 에둘러가거나 꼬아놓지 않고 그대로 핵심을 찌르는 것.” 그 직설화법이 원초적 공포를 자아낸다. <손톱>에 이어 <올가미>가 개봉됐을 때 당시의 평단에서는 적은 제작비와 캐릭터 중심의 시나리오에 주목해 ‘한국적 스릴러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해보기도 했다. <세이예스>는 그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앞으로 더 나아간다. 공포의 대상은 지인(知人)에서 타인으로 바뀌었고, 제작비는 급상승했으며, 액션과 호러가 대폭 강화된 것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면 시나리오 크레디트에 감독 자신을 포함하여 무려 5명의 작가들이 올라 있는데 여혜영도 그들 중 하나다. 모든 캐릭터들에 대한 잔인할 만큼 냉소적인 응시가 일품인 이 작품에서 여혜영의 터치가 살아 있는 장면은 어디쯤일까를 상상해보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고스트 맘마>는 뜻밖에도 눈물샘을 자극하는 따뜻한 판타지멜로.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은 아내가 이승에 남겨진 남편과 아이의 주변을 맴돌며 벌이는 다양한 사건들이 코미디와 멜로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이뤄 흥행에서도 크게 성공했다. “반드시 호러나 스릴러를 고집할 생각은 없어요.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어떤 장르이건 상관없는 것 아닌가요?” 당연한 답변이지만 왠지 서운하다. 이른바 비인기장르(?)로 꼽히는 호러나 스릴러 분야에서 그녀만큼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가꿔온 작가를 따로 찾아보기 힘든 까닭이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92년 박철수의 <눈꽃>
94년이석기의 <아주 특별한 변신> ⓥ
김성홍의 <손톱> ⓥ ★
96년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한지승의 <고스트 맘마> ⓥ ★
97년김성홍의 <올가미> ⓥ
2001년김성홍의 <세이예스>
ⓥ는 비디오 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