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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된 우회로를 거친 하나의 이야기, <내 청춘에게 고함>
이종도 2006-07-11

서른둘 먹은 말년 병장이자 박사과정 대학원생 인호(김태우)는 말년 휴가를 나왔다가 반갑지 않은 동창생의 결혼식에 끌려나간다. 3년째 돈을 안 갚고 있는 친구를 만나는데 그 친구는 돈이 없다며 5만원만 준다. 그 친구는 뒤풀이 자리에선 호기롭게 뒤풀이 비용을 낸다. 아내(백정림)의 바람기도 의심스러운 차에 인호는 한껏 짜증이 난다. 마침 결혼식에서 얼쩡대던 여인(신동미)이 인호 앞을 지나간다. 인호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몇년 전 만남을 자꾸 떠올리며 친한 척을 해본다. 전세는 역전되어, 술집에서 여인은 이렇게 끈적끈적하게 묻는다. ‘여기를 둘러싼 공기를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인호는 능청스레 대답을 한다. ‘가스요?’ 김보연의 <생각>이라는 노래가, 오래된 LP로 가득한 학사주점풍의 술집에서 흐르고 있다.

그런데 이거야말로 영화 속에 의뭉스럽게 흘러다니는 영화의 ‘가스’, 즉 분위기다. 저마다 나이가 다른 세 청춘의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던져주면서, 영화는 그 ‘가스’와 소리(김보연의 <생각>)와 기찻길로 청춘의 이미지를 찾아보라고 권한다. 영화는 청춘에서 가장 멀어진 인호 이야기, 청춘의 한복판에 던져진 공중전화 수리공 근우(이상우)의 이야기, 이제 막 청춘으로 진입한 휴학생 정희(김혜나)의 이야기를 묶었다. 그런데 첫 토막인 정희의 이야기는 여물지 않고 풋냄새가 나며, 근우의 이야기는 엉뚱한 판타지 같다. 마지막 인호의 이야기에 와서야 이 세 이야기가 어렴풋하게 엮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믿게 된다. 세 사람은 만나지도 않고, 연관도 없으니 영화는 상관없는 이야기 묶음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게 더 타당한 해석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다시 인호의 얘기로 돌아가자. 여인은 ‘가스’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여인도 인호도 그게 사랑이라고 믿지 않는다. 노래를 듣고 있지만 그건 두 사람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한낱 소리다. 인호는 귀대하기 전에 아내에게 고백을 했다가 더 놀라운 고백을 받는다. 그런데 부부는 서로에게 고백을 하면서도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솔직하지 않다. 하나마나한 자기 속이나 편하게 하기 위한 변명을 고백이랍시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느닷없이, 인호는 외출하는 아내의 뒤통수에 대고 이제 담배도 술도 끊을 것이라고 말한다. 담배를 끊든 술을 끊든 중요한 건 하나도 안 바뀔 것 같은데 말이다. 아내의 외출은 남자친구(정인기)와의 여행 때문인데, 남자친구는 아내에게 철길 소리를 들어보라고 권한다. 기차가 떠나고 난 뒤의 외로움을 들어보라 말하지만 남자친구도, 아내도 듣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다. 기차 떠난 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15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와 사기를 당해 집을 잃은 언니 때문에 스무살 청춘이 한없이 우울해진 정희나 연인의 전화를 엿듣다가 그만 목소리의 주인공인 여자에게 빠져버린 근우이지 절대로 인호나 인호의 아내가 아니다. 영화는 그렇게 청춘은 상실이고 색이 바라게 되는 거짓말이라고 우울하게 고백한다.

물론 이렇게 길고, 또한 단절되어 있는 우회로를 거쳐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나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에 대해 영화는 답을 제대로 주지 못한다. 그러나 서툴고 어색하게 자기 앞의 청춘에 겨워하는 정희의 이야기를 거쳐, 스스로의 세계를 잘못된 방식으로라도 지키고자 하는 근우의 이야기를 건너, 미묘한 뉘앙스 속에 상실감과 치사한 계산과 희망을 동시에 감지하는 인호의 이야기로 오면서 영화는 그 과정 속에 답을 던진다. 세심하게 귀기울여 듣지 않으면 놓치게 되는 라디오 뉴스 같은 데서 미약하나마 영화는 답을 들려주고 있다. 왜 누군가는 호텔 방에서 불을 지르고, 왜 누군가는 노래방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폭행하는가. 어쩌면 아무 의미없을 그런 청춘의 부산물에 대해 영화는 궁금해한다. 영화는 예민하게 포착한 인간관계의 동학과 갈등의 드라마를 통해 역순으로 그 의미없어 보이는 청춘을 재구성한다. 불을 지르고야 마는 청춘의 예민함과 폭발력이 정희의 이야기다. 엿들은 전화에서 여자가 부른 <생각>을 노래방에서 부르면서, 여자를 걷어찬 불륜의 남자를 두들겨패는 게 근우의 이야기다. 아무리 근사하게 보이려고 해도 고작 그것은 파출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후줄근한 범죄이거나, 몰래카메라와 도청으로 빠져든 어리석은 감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청춘의 모순은 쉽사리 교정되지 않는다. 청춘은 법이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불의 연대이다.

김태우, 또는 인호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격정만 넘치는 치기어린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김태우가 느긋이 계단참에 누워서 저참에게 제대날짜를 보고 받는 장면부터 영화는 노련해진다. 아내와 오랜만에 밥상에 함께 앉아서는, 설렁탕을 먹으면서 아내에게 ‘뜨거운 맛에 먹는 거’라고 할 때 그 말 한마디로 부부 사이를 떠도는 소원하고 냉랭한 ‘가스’를 감지하게 된다. ‘와이로’를 먹이라고 충고하는 친구에게 젊은 날 술 담배도 안 하며 착하게 살았다고 강변하지만, 인호는 3년 만에 만난 돈 안 갚은 친구에게 ‘널 지켜보고 있다’고 협박할 줄 아는 복잡한 캐릭터다. 영화는 직설법으로 말하지 않고 에둘러가면서 청춘의 진상을 섬세한 뉘앙스로 잡아낸다. 소중한 것을 하나둘 상실해가며 청춘을 잃어가는 표정이 영화 속에 있다. 그건 김태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하고 싶어지는데, 뻔뻔하면서도 착한 척하고, 절망했으면서도 안 그런 척하는 김태우의 연기는 청춘의 상실에 대한 연기적 등가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조감독을 했던 신인감독 김영남은 예사롭지 않은 장면과 대사 구성력으로 미묘한 공기를 포착하는 재주를 보였다. 이야기를 하나로 꿰뚫어가는 좀더 명확한 어조와 일관된 어투를 다음 작품에서는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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