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참에겐 스크립트와 편집부터 가르친다”
신재명 무술감독은 시나리오를 일찍 달라고 조른다. 그래서 그는 촬영 2∼3년 전에 시나리오를 받은 경우도 흔하고, 영화사들도 이제는 최소 6개월에서 1년 전에 시나리오를 보내준다. 그 시간은 액션 구상과 널리 알려진 대로 배우 트레이닝을 위해 고스란히 쓰인다. <비열한 거리>에 출연한 조인성은 정우성을 필두로 주위 선배들에게 신 감독의 연습방식에 대해 수소문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어차피 그 사람 말로는 안 통하니까 그냥 죽었다 셈치고 시키는 대로 해라”고 말했다. 11살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한 ‘배우들의 저승사자’ 신재명에게 ‘충무로 액션맨’이 되는 법과 배우 트레이닝에 관해 들었다.
-베스트 액션스쿨에는 어떤 사람을 뽑나? 그리고 어떻게 훈련하는지도 궁금하다. =경험삼아 해보겠다는 사람은 운동신경이 아무리 좋아도 뽑지 않는다. 실력없고 운동경험이 없어도 여기에 평생을 걸겠다는 각오만 있다면 그 친구는 무조건 뽑는다. 물론 나중에 힘들어서 도망가더라도 다시 잡아오지. (웃음) 소질이 뛰어나도 성실함이 없는 사람은 안 잡는다. 우리 팀은 최소 몇 개월에서 십몇년 된 친구들로 이뤄졌다. 현재 전반적으로 스턴트맨이 부족한 상황이다. 과거보다 경제적 상황도 나아졌기에 의식있는 젊은 사람들이 같이 일하면 좋겠다. 새로 사람이 들어오면 스크립트와 편집부터 가르친다. 나도 무술감독을 하기 위해 연출부와 스크립터를 했다. 연출감각을 공부하면 무술감독과 스턴트맨의 역할 차를 알 수 있다. 액션을 구성하는 무술감독이 프로덕션 단계에 참여하면 두세달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한정된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지 못해도 처음부터 함께 가는 게 맞다. 시나리오의 컨셉만 있어도 작업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막말로 영화가 엎어져도 나한테는 하나의 컨셉이 남으니까 그걸 손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래서 자리잡는 데 오래 걸렸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영화가 엎어지고 연기되면서 얻었던 경험들이 재산이 돼서 지금 발휘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 팀 애들도 불만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들이 더 적극적이다.
-배우 트레이닝을 할 때 어떤 태도로 임하는지 궁금하다. =일할 때는 냉정하다. 방법론으로는 무섭다기보다는 냉정한 다정함이라고 할까. <수>의 아역배우들이 연습하다 울기에 “부모님이 와서 보셔도 너희들이 해야 하는 일은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제 마지막으로 훈련을 끝내고 애들이 인사하는데 가슴이 찡하더라. 우리 아들도 열한살이니까 더 그랬다. 가끔 일 끝내고 혼자 있으면 배우들과 같이 고생한 일이 생각나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배우들은 이 기사를 보면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웃음) 촬영장에서 돌아올 때마다 속으로 생각한다. “아무도 안 다쳐줘서 정말 고맙다”라고. 트레이닝을 잘하려면 대화가 가장 중요하다. 17년간 내가 경험한 기술이 그들에게 몇 개월 만에 옮겨질 리 없다. 그래서 내가 심하더라도 이해해달라고 일단 부탁한다. (웃음) 인성이는 처음에는 컴비네이션과 스탭을 비롯해 철저히 격투기 선수처럼 훈련시키고 나중에는 현실감을 살리도록 폼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진행했다. 좀 친해진 뒤 인성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네 연기를 보러 오지, 주야장천 액션하는 걸 보러 오는 게 아니다. 액션은 이렇게 하는데 연기는 어떻게 할 건데?’라고 물었다. 전화받고 오락실로 뛰어갈 때 어떻게 뛰어갈 거냐는 거지. 그걸 정해야 뒤통수를 때릴지, ‘몸빵’으로 밀고 들어갈지 결정할 수 있다. 주로 그런 걸 논의한다. 하다보면 유달리 몸이 뻣뻣한 사람들도 있다. 내가 밝히지 않아도 참여한 영화들을 유심히 보면 누군지 드러난다. (웃음) 그런 경우에는 억지로 다리를 찢어야 해서 고통이 더해진다.
-좋아하는 무술감독이나 액션 스타일을 선택하라면. =견자단. 거의 우상이다. 처음에는 성룡을 좋아했지만. 절제하는 액션 스타일이나 스턴트에 반했다. 국내에서 제일 좋아하는 분은 까마득한 대선배 황인식 선생님. <사제출마>에 합기도의 달인으로 출연했고, 왼발을 유독 잘 쓰신다. (흥미롭게도 견자단은 과거 인상적인 액션배우로 황인식을 꼽은 적이 있다.) 견자단이 무술감독한 작품이 출연작보다 못한 이유는 그의 몸놀림을 따라갈 수 있는 배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같은 배우들의 트레이닝이 중요하다. 바꿔 말하면 액션 스타일이 있거나 액션이 가능한 스턴트맨을 배우로 훈련시키는 방법도 적극적으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짝패>가 그런 케이스다. 류승완 감독이나 정두홍 무술감독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해나가기 때문이다. 그러한 액션 마니아적 영화나 뮤지컬영화처럼 새로운 시도들이 빈번해져서 상업영화의 폭이 넓어져야 한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준비도 만만찮았을 것 같다. =데모영상 작업만 20번쯤 했다. 배우들이 연습한 동작을 까먹을까봐 촬영이 끝나면 교문을 내 차로 막고 ‘못 가, 운동하고 가!’라고 했다. 처음에는 배우들이 싫어했지. 이틀 운동하고 하루 쉬어야 했으니까. 게다가 쉬는 날은 학교 운동장으로 몇시까지 나오라고 괴롭혔다. 나중에는 축구 한 게임 하자고 꾀어서 축구 끝나면 운동 시키고 했다. (웃음) 그때 상우랑 배우들이 축구를 좋아해서. 그 다음에는 ‘오늘부터는 운동장 말고 옥상으로 와라. 아대로 온몸을 감고’라고 했다.
-다른 감독, 무술감독들이 <똥개>의 유치장 장면을 자주 언급한다. =가장 두려움에 떨면서 만들었다. 배우들이 다칠까봐 겁나고 전전긍긍했던 작품이다. 그 장면은 거의 단 한컷도 애드리브없이 연출된 액션이다. 체육관에서 연습할 때는 정우성, 김태욱씨가 오면 ‘일단 때리세요’라고 시키고 ‘1시간 동안 때렸으니까 이제 맞으세요’라고 진행했다. 대한민국 톱스타인데 맞으라고 하니 일단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때리고 목 조르는 일로만 일주일에 두세번씩, 한달이 흐르면서 원성이 자자했다. 그런데 데모를 배우에게 보여주니까 ‘난 자신있어. 이거 할 거야’라고 하면서 둘 다 적극적으로 덤비더라.
-<비열한 거리>의 굴다리 격투장면은 단단히 각오하고 찍은 장면 같다. =모든 주·조연이 병원에 다녀왔다. 특히 인성이는 체육관에서는 발뒤꿈치로 잘 때렸는데 현장 상황이 더 어려우니까 종아리로 때리면서 근육이 파열됐다. 이 친구가 계속 참고 진행해서 결국 마지막에는 발뒤꿈치로 때리고 OK가 났다. 촬영 끝나고보니 종아리 전체에 피멍이 들었더라. 그럴 때마다 눈물나게 고맙다. ‘촬영 들어가기 전부터 애들 다 병원 보내면 어떡하냐’는 책망도 많았지만 그렇게 안 하면 현장에서 더 큰 사고가 날 것 같아서 배우들 체력훈련을 지독하게 시켰다.
-최양일 감독의 신작 <수>는 어떤 컨셉의 액션을 준비하고 있나. =리얼 액션보다 훨씬 강한 하드코어다. 킬러 이야기라서 강렬한 액션이 될 가능성이 크다. 클로즈업 부분은 CG로 처리할 공산이 크다. 예를 들어 한명이 누군가를 찌를 때 칼이 들어간 부분은 따로 찍는 방식으로. 누가 여러 명을 찌르고 지나갈 때도 풀숏으로 화면이 나오면서 잔인함과 속도감이 공존하는 액션을 구상 중이다.
-연출에 욕심이 있다고 들었다. =내후년 정도에는 1년에 무술감독은 한 작품만 하면서 그 작품에 연출부로 들어가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싶다. 지금도 시나리오 쓰는 건 공부하고 있다. 방은진씨 참 대단하다. 일면식도 없지만 내가 모델로 삼는 사람 중 하나다. 스타의식을 접고 2년 동안 연출부 막내부터 시작해서 <오로라공주> 같은 좋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자체가 존경스럽다.
함께 일한 영화 감독들이 본 신재명
“배우를 잘 컨트롤하고 액션에 신념을 준다”
유하 감독/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말죽거리 잔혹사> 때는 신 감독에 대한 개인적 정보가 전혀 없었다. 권상우가 추천하기에 그저 ‘배우가 편한 무술감독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액션영화가 처음이었지만 컨셉은 분명했다. 날것의 액션, 콘티에 갇히지 않은 액션을 하고 싶었다. 충분히 시간이 없었기에 합을 완전히 짠 상태에서 들어가진 못했다. 그래서 서로 여러 가지 논의하는 과정에서 마찰도 좀 있었다. <비열한 거리>의 무술감독과 감독이 다투는 부분이 그래서 만들어졌다. (웃음) 그때는 좀 애증이 있었지. 그는 배우를 잘 컨트롤하고 액션에 신념을 주는 무술감독이다. 힘든 상황에서 힘을 북돋우는 데 능하다. <말죽거리…>처럼 주먹을 부딪치는 리얼 액션은 연출자 입장에서는 계속 밀고나가고 싶다. 그런데 길게 찍다보면 부상자가 생기는 건 불가피하다.
<비열한 거리>에서는 서로 성향을 잘 파악해서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그래서 <말죽거리…> 때보다 조그만 디테일도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신재명 무술감독은 스타 조련에 분명 일가견이 있다. 배우를 참여하도록 하는 재주가 뛰어나고 배우들의 심리나 감정을 잘 포착한다. 현장에서 심리적으로 밀고 당기는 것을 잘한다. <말죽거리…>는 애들 싸움이고 <비열한 거리>는 어른 싸움이라 액션의 규모나 정밀도가 비교가 안 된다. 무엇보다 신 감독은 현장에서 진짜로 독하다. 자동차 유리를 깨는 장면에서 눈도 깜짝 안 하고 진행하는데 나라면 그렇게는 못한다. 신 감독이 내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면 그런 장면들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그는 다정함을 발휘하는 경우도 많다. 재촬영 때 인성이를 데려가서 달래주고 하는 면이 연출자로서는 많이 고마웠다.
“특유의 질퍽한 액션 정서가 있다”
류승완 감독/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다찌마와 Lee>
신재명 무술감독은 권종관 감독 소개로 만났다. 나는 액션을 좋아했지만 연출부 시절에는 액션영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 만난 신 감독은 일단 너무 겸손하고 영화에 대한 열정이 넘쳐났다. 서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할 시기였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마지막 공사장 액션신은 신 감독과 베스트팀이 없었다면 못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난 무술감독 역할에 시큰둥했다. 무엇보다 그와 작업하면서 무술감독 역할과 장점이 무엇인지를 처음 배웠다. <다찌마와 Lee> 작업 때도 짧은 시간에 스턴트팀의 고생이 많았는데 너무 잘해주었다. 신 감독은 특유의 질퍽한 정서가 있다. 그래서 리얼 액션을 포착하는 데 탁월한 실력을 보인다. <비열한 거리>의 굴다리 패싸움신을 보고 경탄했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똥개>의 유치장신은 기념비적인 액션을 보여준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한국에서만 만들 수 있는 장면이라는 점이다. 여러 가지 여건 탓에 함께 작업을 못하고 있지만 신재명 무술감독이 작업한 영화들은 항상 눈여겨보고 있다.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나가는 그의 모습에 데뷔작을 함께했던 동료로서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신재명 무술감독이 지금 만들어나가는 액션 스타일이 한국영화 액션의 중요한 영역을 확보하리라 믿는다. 바람이 있다면 질퍽한 액션 스타일을 더 깊이 발전시켜서 세계의 누구도 따라올 수 있는 정서를 획득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은 분명 가능할 것이다. 신재명 액션 스타일은 이미 구축되었다. 현재 충무로에는 뭐든지 잘하는 멀티플레이어보다 그처럼 자신의 스타일을 깊이있게 아우르는 장인이 많아져야 더 다양하고 새로운 영화들이 나올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재 추세대로 작업해서 한국 영화계의 큰 축을 오랫동안 지탱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