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재단하기 _ 1인치의 오차도 용서할 수 없다
“<청풍명월>의 반정군 갑옷 비늘은 쇠처럼 간지를 낸 플라스틱이다. 갑옷 제작은 중국 본토 쑤저우에 있는 공장에서 했다. 디자인을 넘기고 1차 샘플을 받았을 땐 황당했다. 하얗고 빨갛고, 전형적인 중국 사극의 의상이었다. 비늘각부터 다시 맞췄다. 꿰매고 났을 때 둔탁한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비늘들의 각도를 맞추고, 닳은 쇠의 광택이 날 수 있도록 은분을 바르는 붓터치를 알려주고, 일정한 볼륨감을 줄 수 있는 솜 두께를 지정했다. 15일 동안 그곳에 상주하면서 샘플을 만들어 일일이 라이팅 테스트까지 했다.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두꺼운 쇠갑옷의 느낌을 찾을 때까지.”(권유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청풍명월>의 주요 의상수는 반정군 장교 갑옷 60여벌, 반정군 사병 갑옷 200여벌, 수비군 장교 갑옷 30여벌, 수비군 사병 갑옷 60여벌 등 모두 350여벌이다. 컨셉을 현실화하는 의상 제작단계는 다른 말로 막노동의 영역이자 예술 행위의 절정이다. 고급스러운 스타일이 강조된 액션영화 <달콤한 인생>에 쓰인 양복들은 국내에서도 ‘기업 회장단’급 손님들이 단골로 드나드는 양복점의 수제 작품들이다. 조상경 의상감독이 이런 ‘고급 제작실’에 의상을 맡긴 까닭은 원단 탓이 크다. “강 사장(김영철)은 나이는 들었지만 젊은 애인이 있는 멋진 신사다. 세련됐고 멋이 뭔지도 아는 캐릭터다. 그런 점을 생각하니 포멀한 솔리드 진회색 양복이나 평범한 스트라이프 양복은 어울리지 않을 듯했다.”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4인치 간격의 스트라이프나 1/2인치 간격의 스트라이프보다 과감한 1인치 간격의 스트라이프 원단을 찾아 나섰다. 그 와중에 만난 것이 영국제 브랜드 홀랜드 셸의 원단이었다. <달콤한 인생>의 양복을 예술의 경지로 부를 수 있는 건 그러나 원단 때문이 아니다. “슈트를 잘 입는 법칙 같은 게 있다. 겉옷 소매 밖으로 셔츠 소매가 1.5cm 나온다든지, 회색 정장을 입었을 때 더 예의를 갖춘 조합은 갈색 구두보다 검정 구두다 하는 식이다. <올드보이>의 우진이도 그랬지만 <달콤한 인생>의 인물들도 빈틈없는 성격들이기 때문에 그 룰에 맞춘 양복을 입혔다.” 칼같이 떨어지는 라인, 구김살 하나없는 매끈한 표면. 조상경 의상감독은 하다못해 셔츠의 양쪽 칼라 간격이 3인치가 아닌 2.75인치가 돼야 한다고 양복점과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 단춧구멍 하나까지도 수작업을 거친 <달콤한 인생>의 슈트는 벌당 기백 만원짜리의 명품이다.
정구호 의상 겸 미술감독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를 작업할 당시 옷고름 하나를 위해서도 비단을 손염색했고, 원하는 한복지의 패턴을 보여주기 위해 원단 자체를 새로 짜기도 했다. 이 의상의 제작 역시 장인의 손에서 이뤄졌다. 개봉 당시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스캔들…>의 한복은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조교 구혜자씨가 손바느질로 제작했다. 카메라와 조명은 그러나 단지 명품이란 이유로 모든 의상을 용납해주지 않는 법. “일명 돌돌이 현상이라고 해서 원단이 빛을 받았을 때 소용돌이 무늬로 음영이 질 때가 있다. 여성용 한복은 저고리와 치마로 조각이 나뉘고 색깔도 다양하게 배합돼 있어서 그런 현상이 적은데, 남자 옷은 한 색깔로 큰 실루엣이 떨어져서 경우가 다르다.” 때문에 조원(배용준)의 의상은 몇번의 수정을 거쳐 생명주를 다듬이질해서 짠 원단을 사용해 만들어졌다.
4. 촬영 돌입 _ 현장에서도 수정은 계속된다
“<청연> 때 중국 위만 황궁에서 만찬장면을 찍고 있는데 현장 진행하는 우리 의상팀장이 달려오더니 큰일났다 그러더라. <청연>의 일본인 군복과 기모노를 대여하고 관리하던 도호사 직원들이 계약기간 끝났다고 의상 싸갖고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지. 계약 연장도 불가능하다기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데 무전이 또 왔다. 장진영씨가 만찬장면 때 입을 드레스를 자기가 준비해간 의상으로 입고 싶어한다는 거다. 색깔이 뭐냐고 물으니까 붉은색이라더라. 만찬회장 식탁보가 붉은색인데!”(권유진)
촬영현장에서의 돌발 상황은 언제나 예상 밖이다. 권유진 의상감독은 동시에 터진 두 가지 사고 앞에서 거품을 물 지경이었다. 일본인 미술감독과 합의를 끝낸 설정을 여배우의 붉은 드레스가 흔드는 상황은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였다. 일본 의상팀이 군복과 기모노를 싸갖고 고국으로 돌아갈 경우 영화는 촬영 자체가 불가능했다. 권유진 의상감독은 붉은색 식탁보와 붉은색 드레스가 겹쳐진 만찬회장 촬영 모습을 지켜본 뒤, 이튿날 비행기로 상하이까지 날아가 다시 버스를 타고 쑤저우 공장으로 갔다. <청풍명월> 때 인연을 맺은 이 공장 주인에게 일본 군복 하나를 내밀고 “이와 똑같은 옷을 70벌 제작해달라”고 했다. 그가 내민 군복은 일본 의상팀 꾸러미에서 몰래 빼낸 것이었다. 아울러 그는 기모노 제작도 부탁했다. 그 자리에서 남녀 기모노 패턴을 떠주었고 원단창고를 뒤져 뽑아낸 원단들로 조합까지 지정했다. 남자 기모노 30벌, 여자 기모노 40벌. 며칠 내로 군복과 함께 창춘에 도착해야 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는 매우 극단적인 에피소드일 수 있지만, 시대물 촬영장에서 생기는 사고는 현대물 촬영장에서 생길 수 있는 사고와 충격의 크기부터 다르다. “실수를 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 없다. 현대물은 의상이 잘못됐다고 하면 하다못해 백화점에 뛰어가 사올 수라도 있지만 사극은 그럴 수가 없다. 모든 게 처음부터 확정되고 준비가 돼 있어야 하는 작업이다.”(정구호) 현대물이라고 해서 아찔한 상황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와 이우진이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대면하는 장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기 직전인 대수를 우진이 다가와 부축하는데, 한번 부축할 때마다 우진의 옷에는 피가 묻었고 의상팀은 여벌을 준비해두지 않은 상태였다. “현장 모니터 앞에 미용실이 하나 있기에 섭외했다. 나는 미용실에 대기해 있고, 팀원 한명은 우진 옆에 대기하고 있어서 컷 사인이 나자마자 우진의 옷을 받아다가 미용실로 들고 달려왔다. 그러면 나는 물빨래를 해서 드라이어로 말려 옷을 넘겼다.” 이 시간은 유지태가 박찬욱 감독 곁에서 모니터를 확인하고 다시 횡단보도 앞에 서기까지의 짧은 시간이었다. <올드보이>의 의상팀은 네댓 테이크 동안 이 과정을 반복했다.
영화 촬영장에서 수고하지 않는 스탭이 어딨겠냐마는, 의상팀의 현장 작업을 그들의 탁상 작업와 비교하면 그 간극은 유독 크게 다가온다. 영화의상 작업자들은 책상 앞에 앉았을 때는 시나리오를 놓고 지적으로 캐릭터 분석을 하거나 우아한 시각 자료들을 들추거나 색색의 시안들을 견주다가도, 현장에 나가면 물에 젖은 옷을 선풍기 앞에서 말리고 자켓에서 떨어져나간 단추 하나를 찾아 꿰매다가 촬영이 끝나면 산더미 같은 옷을 거둬 일일이 개켜놓기 바쁘다. 뿐만 아니라 "엄마 같은 마음으로" 현장을 돌봐야 할 책임도 있다. 깊고 추운 겨울날 <형사 Duelist>의 촬영장에서 정경희 의상감독은 350mm짜리의 커다란 신발과 솜버선을 수도 없이 만들어 놓았다. 보조출연자들의 발이 동상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배우들은 그 신발 속에 양말과 짚신과 솜버선을 겹겹 신고 긴 겨울을 났다. 행여 한 사람이라도 옷 잃은 선녀 꼴이 날까, 양말 한 짝까지 보관해줘야 하는 것 또한 전적으로 의상팀의 몫이다. 영화의상은 심오하고 치밀한 예술의 경지이면서 동시에 누구라도 감당할 수 있는 단순한 육체노동에 의해 완성된다. 영화 의상을 생각할 때 둘 중 어느 것도 간과하기 어렵다.
영화 촬영장에서 수고하지 않는 스탭이 어딨겠냐마는, 의상팀의 현장 작업을 그들의 탁상 작업와 비교하면 그 간극은 유독 크게 다가온다. 책상 앞에 앉아서는 날카롭게 캐릭터 분석을 하고 우아한 시각자료를 들추다가도, 현장에만 나가면 물에 젖은 옷 말리기 바쁘고 자켓에서 떨어져나간 단추 찾아다 꿰매기 바쁘고 그러다 촬영이 끝나면 산더미 같은 옷을 거둬 일일이 개켜놓기 바쁘다. “엄마 같은 마음으로” 현장을 돌봐야 할 책임도 있다. 깊고 추운 겨울날 <형사 Duelist>의 촬영장에서 정경희 의상감독은 350mm짜리의 커다란 신발과 솜버선을 수도 없이 만들어 놓았다. 보조출연자들의 발이 동상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배우들은 그 신발 속에 양말과 짚신과 솜버선을 겹겹 신고 긴 겨울을 났다. 영화의상은 심오하고 치밀한 예술의 경지이면서 동시에 누구라도 감당할 수 있는 단순한 육체노동에 의해 완성된다.
영화의상이 존재하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괴물>의 최근 예고편에는 강두 역의 송강호가 하얀 환자복을 입은 채 병원을 뛰쳐나와 거리를 헤매는 장면이 등장한다. 촬영 당시 봉준호 감독은 강두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괴물과 대면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조상경은 반대했다. “강두 하나만 놓고 보면 뭘 입어도 상관없겠지만 괴물과 대면하는 장면이었다. 평상복 차림으로 괴물과 대면할 경우 우리 영화에서 괴물이 갖는 캐릭터가 희석될 거라고 생각했다.” 의상감독의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여기에 애초 녹색이던 환자복 색깔이 표백제로 탈색되어 낡은 흰색으로 바뀌었다. 강두의 의상 하나로 강두-괴물의 대면, 괴물의 캐릭터는 더 공고해졌다.
영국 출신의 코스튬 디자이너 샌디 파웰은 <올란도> <벨벳 골드마인> <셰익스피어 인 러브> <갱스 오브 뉴욕> <파 프롬 헤븐> <에비에이터> 등의 작품을 통해 입이 떡 벌어질만한 영화의상의 세계를 구축해온 인물이다. 그의 의상이 예술로 대접받는 까닭은 그가 단지 화려한 복식세계를 스크린 위에 수놓아서가 아니다. 샌디 파웰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옷을 좋아했지만 패션디자이너를 꿈꾼 적은 없다고 했다. “패션 디자이너의 일은 그저 옷에 관한 것일 뿐이다.” 금자의 원피스와 정빈의 검은 한복이 어필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노란 물방울 원피스는 금자가 잃어버린 시간이고, 정빈의 검은 치맛자락은 그녀 안에 억눌려 있던 욕망의 증거다. 따로 꺼내놓고 보면 볼품없을 강두의 하얀 환자복은 <괴물> 안에 존재함으로서 막대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막노동과 예술행위의 사이에서 완성되는 영화의상의 주인이 세상에 하나뿐인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