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루이즈는 ‘가설의 명수’다. 그의 가설은 근거라 할 만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또한 출구만 있지, 출구 안과 바깥의 구분이 없는 경우가 다수다. 때문에 그 출구는 또 다른 출구와 붙어 있는 사이의 연장일 뿐이지 말 그대로 나가는 곳이 아니다. 한마디로 거대하게 연장되는 문짝 또는 문턱들의 세계일 뿐이다. 그 문짝과 문턱 위에 현실과 환상이, 실재하는 것과 조작된 것이 서로 뒤엉켜 환영의 재로 쌓인다. 루이즈가 상상의 미로를 짓는 영화의 주술사라면 그 미로는 바로 거대한 그 문짝과 문턱의 연쇄로 지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구불구불하게 접힌 루이즈식의 바로크적 꿈꾸기다. 비록 과거의 작품들에 비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현저히 떨어지는 수준이지만, 라울 루이즈가 이 영화를 만들면서 염두에 둔 것 역시 그런 점일 것이다. <클림트>는 클림트에 관한 전기라기보다 클림트에 관한 루이즈의 독단적 가설이다.
그 가설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이미 몸의 기동성을 잃고 정신을 놓쳐버린 클림트의 상태가 이 영화의 시작이다. 죽음 앞에 직면한 주인공으로 영화를 시작하는 것이 이런 영화에서 특이한 일은 아니다. 대개 한 시대를 풍미한 실존 예술가들을 영화에 담을 때 제작의 동기가 되는 것은 그들의 작품에 대한 재해석을 내리고 싶어서라기보다 믿기지 않을 만큼 거칠고 풍진 그들의 삶 자체가 매혹의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죽음에서 시작하여 탄생으로 거꾸로 이어지거나, 뒤에서 앞으로 역행하는 것은 자주 보는 일이다. 그건 흥망성쇠의 추이를 그려보려는 노력이고, 프리다 칼로를 다룰 때 <프리다>가, 잭슨 폴록을 다룰 때 <폴락>이 모두 그런 흥망성쇠의 묘사라는 매혹을 따랐다. 그러나 <클림트>에서 이미 의식을 잃은 클림트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것은 다소 다른 이유다. 아니면 여기서는 그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좀더 분명하다. 이것은 단순히 현재에서 과거로 넘어가는 타임머신의 역할이 아니라, 가설이 펼쳐질 첫 번째 출구이기 때문이다.
클림트(존 말코비치)의 병실에 에곤 실레(니콜라이 킨스키)가 찾아오는 첫 장면에서 클림트는 이미 반쯤 죽은 몸이다. 그는 죽어가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생사를 ‘헤맨다’. 헤맨다는 말보다 영화 <클림트>를 설명하기에 더 적절한 술어는 없어 보인다. 그의 무의식은 지금 기억과 경험과 절망으로 뒤범벅되어 논리도 이성도 없는 과거의 세계를 헤매기 시작한다. 장식주의와 추악한 외설이라는 이유로 지탄받으며 지원금까지 끊길 위험에 놓이곤 했던 지난한 작업기가 펼쳐질 즈음 혹은 ‘빈의 카사노바’로 불릴 정도로 밤의 음욕을 즐겼던 난봉꾼으로서의 사생활이 드러날 때쯤 클림트의 이 헤매는 이야기는 1900년의 파리만국박람회 즉 20세기의 전람을 맞는다. 그러고 나면 영화사 최초의 감독 중 한명인 멜리에스가 클림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찍었다며 그에게 보여주고, 클림트는 평생의 연인 미디(베로니카 페레스)를 뒤로하고 그 안에 나온 레아(새프런 버로스)라는 여주인공에게 연모를 느낀다. 여기서 영화는 빈 분리파로 유명한 그의 예술세계의 사조를, 바람둥이 기질의 사생활을 초점화하기보다 레아를 중심으로 제자리걸음을 하는 클림트의 모습을 쫓는다. 예술의 혼에 대한 감동을 요구하는 장면도 없고, 그 이면에 펼쳐진 왕성한 생식력에 관한 신랄하고 말초적인 보고서도 없다. 영화 속에서 클림트는 한바탕 언쟁을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혼신을 다해 작업하는 그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내가 당신의 딸이에요” 혹은 “당신의 아이를 임신했어요”라고 말하는 여자와 딸들에게 그저 한번 긍정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다.
클림트는 그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아 분열의 출구로 빠져들고 또 빠져든다. 영화 속에서 자신을 연기했던 배우와 자꾸 마주치고 한편으론 자신이 만들어낸 왜곡된 분신과 마주친다. 사랑하는 레아를 만나러 이리저리 헤매지만, 그녀는 진짜이기도 하고 가짜이기도 하다. 갑작스러운 장소의 이동과 혼란스러운 인물들의 침투가 이어지고, 외부와 내부는 혼돈에 빠진다. 마치 그의 그림처럼 영화는 깨진 유리 거울들의 합인 듯 조각으로 뭉친 전체다. 드디어 마지막에 이르면 평생 함께한 연인 미디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미지의 여인 레아와 자신의 분신이 세개의 출구 앞에 각각 서서 그에게 말을 건다. <클림트>는 그의 회화에 대해 말하는 장면에 인색하다. 막 도착한 영화의 시대에 느낄 만한 화가의 혼란을 더 집요하게 추적한다. 아마도, 이 영화 속에 담긴 클림트와 영화와의 관계는 얼마간 픽션일 것이다. 레아를 영화 속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고, 심지어 레아를 찾아갔던 방이 울프 공작이 마련해놓은 ‘관음의 방’이며, 그곳에서 클림트가 울프 공작의 시선에 붙잡힌 배우가 된다는 사실이 이 점을 더욱 확신하게 한다. 가령, 복제의 예술품이라는 영화의 시대 속에서 오로지 단 하나의 진품을 그려나가야 하는 예술가의 고집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에 다름 아니다. 그건 20세기 서구 모더니티의 복제술에 봉착해버린 화가의 혼란이다. 그렇지만 루이즈가 클림트를 위해 마련한 것도 역으로 이 영화라는 요물의 본질이다. 죽음, 클림트의 그림에 배어 있는 그 만연한 기운을, 그리고 생과 사를 헤매는 클림트의 마지막 무의식을 펼쳐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죽음의 환등(phantasmagoria)을 켜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루이즈는 생과 사, 그 사이를 헤매고 있는 클림트의 영혼을 그려내고 싶어한 것이다. 죽음 직전에 펼쳐지는 주마등 또는 죽음의 환등. 그것이 바로 죽는 순간 클림트가 보았을 무엇이라고 루이즈는 가설을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