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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로메르의 시대극
2001-08-30

한없이 불투명에 가까운 진실

Die Marquise Von O 1976년, 감독 에릭 로메르 출연 에디드 클레버 <EBS> 9월1일(토) 밤 10시10분

개인적으로, 특정 감독에 대해 글쓰기를 조금 꺼리는 습관이 있다. 에릭 로메르 감독 역시 그중 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설명하자면, 영화라는 매체의 ‘비밀’을 지극히 관조적으로, 그러면서도 완벽에 가깝게 이해하고 있는 희귀한 연출자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에 관해 논하다보면 영화에 관한 중대한 사항, 혹은 비밀을 술술 누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탓일까? <O후작부인>은 일상의 미스터리와 심리극을 절묘하게 교차시키는 로메르 감독의 독특한 연출방식이 스며 있는 영화다. 특이한 건, 이 영화가 그의 여타 작품과는 다르게 시대극이라는 점이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까지 에릭 로메르 감독은 ‘도덕이야기’ 연작에 골몰해 있었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1969)과 <클레르의 무릎>(1970) 등 현대인들의 도덕적 딜레마, 욕망과 무위 사이의 갈등을 세심하게 영상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O후작부인>은 로메르 감독이 처음으로 만든 시대극으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원작을 각색한 작업이다. 이 영화는 로메르 영화가 굳이 현대를 다루지 않고,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무대를 옮기더라도 똑같은 영화적 울림을 지닐 수 있음을 웅변한다.

영화는 18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한 여인의 임신을 둘러싸고 가족과 임신을 한 여성 사이의 소동극이 코믹하게 펼쳐지고 있다. 러시아군이 이탈리아를 공격할 당시 미망인인 후작부인은 폭격을 피해 잠시 대피한다. 러시아 군인들은 그녀를 겁탈하려고 하고, 우연히 지나던 러시아 장교가 부인을 위험에서 구출해낸다. 그런데 얼마 뒤 후작부인은 자신이 임신했음을 알게 된다. 문제는 남성과 성적관계를 맺은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 주변에선 후작부인의 몸가짐을 탓하는 입소문이 번지고, 가족들조차 그녀의 행동을 나무란다.

<O후작부인>은 귀족사회의 엄격한 도덕률, 그리고 그 안에서 갇혀버린 어느 여인의 삶을 추적한다. 후작부인은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법한 러시아 장교의 아이를 임신하고도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 그녀의 행동은 세인들에게 추문이 되어버린다. 부인의 어머니조차 “너의 남편될 사람이 사실은 집안의 하인이더구나!”라며 은근히 떠보면서 부인 스스로 자초지종을 터놓을 것을 종용한다. 아버지는 딸의 문제로 속을 썩이고, 때로는 과한 언행을 보이다가 자식 앞에서 눈물을 터뜨리면서 펑펑 흐느껴 운다. 후작부인은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공개적으로 자신을 임신시킨 남자를 찾는 광고를 낸다. 그런데 영화를 보노라면 후작부인의 ‘무지’가 어디까지 진실인지 약간 의심이 가는 구석도 있다. 그녀는 정말로 아이의 아버지를 모르는 걸까, 가족들 역시 알면서 모르는 척 가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낳는 거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꽤나 분석적이면서 논리 분명한 코미디가 돼버린다. <O후작부인>에서 로메르 감독은 굳이 시대극을 선택한 이유를 드러낸다. 감독은 도덕과 예의범절, 그리고 엄한 신분관계로 뒤얽힌 귀족사회의 모습을 경유하면서 삶의 유희성과 아이러니를 끄집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O후작부인>은 ‘도덕이야기’를 끝낸 에릭 로메르에겐 마치 휴식 같은 작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의 영화는 <해변의 폴린느> 등의 ‘희극과 격언’ 연작들, 다시 말해서 영화의 형식적인 측면을 덜 의식하면서, 간결하고 깔끔한 문체의 가벼운 영화들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