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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리버럴, 맘껏 웃다
2001-08-29

<엽기적인 그녀>가 준 기시감의 정체는?

● <엽기적인 그녀>를 보러 갔을 때, 나는 감기로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콧물은 쉼없이 흘렀고, 근육통으로 다리는 후들거렸다. 그러나 나는 한 차례의 밥벌이를 위해 심야극장을 찾았다. 그리고 이내 밤일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엽기적인 그녀>가 내 감기를 낫게 해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은 감기를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횡경막이 요동치는 동안 근육통은 숨죽이고 있었다.

<엽기적인 그녀>는 웃기는 영화다. 그것은 이 영화가 건강에 매우 좋은 영화라는 뜻이다. 웃음이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이롭다는 데 현대 의학자들은 합의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다른 동물들에 견주어 건강에 유리한 조건 하나를 더 지닌 셈이다. 사람만이 웃을 수 있는 동물이니 말이다.

웃음이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라는 ‘명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로 전해진다. 그 ‘명언’은,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언’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는 말 가운데 가장 실없는 말일 것이다. 여기서 실없다는 것은 그 명제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너무 당연해서 어린아이도 알 만한 사실을 대철학자께서 친히 발설하셨다는 점에서 실없다는 말이다. 그런 실없는 말들을 역사상 가장 많이 발설한 사람은 지난 1994년에 작고한 김일성 주석일 것이다. 그의 저작물들을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은 그것들을 가까이하는 것이 국가보안법을 어기는 일이어서만이 아니라, 그의 방대한 ‘노작’들 대부분이 너무나도 지당한, 그래서 하나마나 한 말씀들로만 채워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지적은 김윤식 교수(일 것이다, 내 기억이 옳다면)가 오래 전에 자신의 책 어딘가에 적어놓은 것이다. 김 주석은 왜 그리도 지당한 말들을 늘이고 늘여 그렇게 많은 책을 펴냈을까? 그것이 알고 싶다. 더구나 그런 지당한 말씀들말고는 그의 ‘노작’을 채우고 있는 것이 죄다 틀린 말들이라면 말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엽기적인 그녀>는 웃기는 영화다. 그것이 유발하는 웃음은 코믹순정만화가 주는 웃음과 비슷하다. 소년소녀적 연애가 주는 웃음. 거기에는 비꼼도, 페이소스도 없다. 그러니까 <엽기적인 그녀>의 웃음은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이나 박재동의 시사만화들이 유발하는, 더러 반성이나 스트레스 같은 쓴맛을 뒤에 남기는 지적 웃음과는 다르다. <엽기적인 그녀>를 보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릴 때, 그 웃음은 악의적 웃음도 아니고, 쓴웃음도 아니고, 차가운 웃음도 아니고, 애달픈 웃음도 아니고, 복잡한 웃음도 아니다. 그 웃음은 단순명료한 웃음이고 가벼운 웃음이다. 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주로 1977년생인 견우(차태현)와 1978년생인 그의 애인(전지현·영화 속에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다. 아니면 내가 감기 기운에 흘려들었거나. ‘그녀’라고 하자) 사이의 성 역할의 교환과 그것의 만화적 과장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성 역할이 진짜로 뒤바뀐 것은 아니다. 그녀는, 외양은 왈가닥이지만 내면은 전통적 여성상(순정/눈물)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죽은 옛 애인을 못 잊어하고, 자기가 떠나보낸 남자를 안타깝게 그린다. 영화 속에서 견우는 어릿광대다. 그는 줄곧 터지고 당하면서 관객을 웃긴다. 그렇지만 관객은 이 청년의 안위를 크게 염려하지 않는다. 그녀나 어머니가 견우를 죽을 만큼 패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즐거운 기시감을 경험했다. 어머니 손에 억지로 끌려 여탕엘 가는 유년의 견우에게서. 그리고 뭐든 손에 잡히는 걸로 아들을 후려치려고 하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그런데, 1977년생도 이런 체험을 하며 자랐나? 1977년은 내 우울한 대학 생활의 초입이었다. 내 기억이 옳다면, 그 해에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노래는 <부루라이또 요꼬하마>라는 일본 대중가요와 샌드 페블스의 <나 어떡해>였다. 바로 그 해에 대학가요제라는 것이 시작됐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또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70년대 영화를 떠올렸다. <바보들의 행진> 속의 젊은이들도 <엽기적인 그녀> 속의 젊은이들만큼이나 발랄하지만, 그 바보들에게는 개인적 취향을 압도하는 시대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늘이 <바보들의 행진>을 <엽기적인 그녀>보다 더 무겁게 만들었을 것이다. 장발을 단속하는 경찰관과 머리를 길게 기른 젊은이가 쫓고 쫓길 때, 그 장면이 유발하는 웃음은 쓴웃음이었다.

섬세한 리버럴이라면, <엽기적인 그녀>의 몇몇 장면에 눈살을 찌푸렸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 영화가 사회적 소수파를 웃음의 부수적 장치로 ‘악용’하고 있다고 투덜거렸을 수도 있다. 예컨대 대머리, 장애인, 조무래기 범죄자, 여장 남자(동성애자) 같은 이들 말이다. 이들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가장 순수한 웃음조차 소수파에 대한 다수파의 (무의식적) 조롱을 양식으로 삼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누구 못지않게 섬세한 리버럴을 자처하는 나로서도 그 장면들이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나는 검열관으로서 ‘가’(可)라고 쓴다. 고종석/ 소설가·<한국일보> 편집위원 aromach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