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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잔혹사>의 액션 확장판, <비열한 거리>

병두(조인성)가 밥상머리에서 부하들에게 묻고 답한다. “식구가 뭐여?” “같이 밥먹는 입구멍이여.” 병두는 두 종류의 입구멍에서 밥숟가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피땀 흘린다. 달리고 또 달리며, 죽이고 또 죽인다. 병두는 로타리파라는 조폭 조직의 2인자이지만 동시에 여섯명의 새끼 조폭을 자기 식구처럼 거느리고 있다. 그는 식구, 곧 가족이라는 조직 원칙을 부하들에게 무척 강조한다. 유사가족을 먹여살리는 일도 보통이 아니지만 진짜 피를 나눈 식구의 보스 노릇도 만만치 않다. 남편없는 어머니는 병환에 시달리고, 남동생은 건달 동네를 기웃거리며, 여동생은 노심초사해야 할 만큼 어여쁘고 여리다. 철거 위기에 처한 집도 시급히 구해내야 한다. 중간 보스라는 지위와 온몸을 휘감은 용 문신의 품위에도 불구하고 떼인 돈 받아내는 주요 임무를 성심성의껏 치러내는 건 이 많은 식구들 때문이다. 그렇지만 채무 해결의 떡고물로 위신과 생계를 동시에 꾸리기엔 곤란함이 크다. 초등학교 첫사랑 현주(이보영)를 아주 오랜만에 만나 세 번째 식구를 조성하려는 사업까지 시작했으니 삼류 조폭 신세의 상향조정이 절실하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할 말을 선명히 새기던 유하 감독의 어법은 <비열한 거리>에서도 이어진다. 삼류 조폭 병두가 식구들을 위해, 식구들에 의해 소모돼가는 잔혹사이니, ‘가족은, 미친 짓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방점은 소모에 찍혀 있다. 유하 감독의 말 그대로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탄생된 인간의 폭력성과 조폭성이 <비열한 거리>에서 어떻게 소비돼가는지가 본론이다. 병두는 호리호리한 키나 보스 기질로 보면 <말죽거리 잔혹사>의 우식(이정진)의 적자이나 순정파적 자세는 현수(권상우)의 피를 이어받았다. 우식이든 현수든 그들이 지닌 매서운 폭력성의 위력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쫓겨났던 큰 이유는 조폭성의 부족에 있다. 적수였던 종훈(이종혁)이 싸움에서 지고도 끝까지 학교를 장악했던 건 조폭성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교사를 스폰서로 두고 선도부라는 공식화한 조폭을 거느릴 줄 알았다. 학교 정글에서 징한 교훈을 얻었으니 거리로 나선 병두가 듬직한 스폰서를 얻기 위해 위험한 도박에 뛰어들 만도 하다.

합법적 사업가 황 회장(천호진)이 병두를 유혹한다. “성공하려면 딱 두 가지만 알면 돼. 자기한테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 그리고 그 사람이 뭘 필요로 하는지.” 황 회장은 거머리처럼 붙어서 피빨기를 멈추지 않는 검사가 골칫거리였다. 병두는 그 검사를 ‘작업’해버리고 황 회장이라는 듬직한 스폰서를 얻는다. 여기서 병두는 두 가지 도박을 동시에 벌였다. 검사 제거라는 금기의 선을 밟았고, 보스 상철(윤제문)을 젖히고 스폰서를 가로챘다. 자신의 보스와 맞서야 하고 보스와 비교조차 안 되는 거대한 공권력과 보이지 않는 합을 겨뤄야 한다. 그 짐은 오로지 병두의 몫이다. 비합법의 무력을 배후에 뿌려놓고 사업을 확장해나가는 황 회장의 입장에선 상철이란 원자재를 병두로 갈아치워 구입했을 뿐이다. 병두의 비극은 자신이 한낱 대체재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장르의 규칙을 지나치리만치 충실히 지켜오던 유하 감독이 병두처럼 위태로운 승부수를 던진다. 조폭성의 소모를 극명하게 그리기 위해 경제 권력에 더해 문화 권력이란 요소를 추가 투입하는 것이다.

병두의 절친했던 친구 민호(남궁민)는 영화감독이다. 정확히는 조폭영화로 데뷔를 준비 중인 감독 후보다. 그는 무참히 제작을 거절당하는 시나리오에 살과 피를 채우기 위해 조폭에 관한 근접 취재가 필요했고, 마침 병두를 발견해 접근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아주 선명한 ‘할 말’이 부담스럽지 않았던 건 산재된 리얼리티와 강하게 흡인하는 이야기의 직진성이 작용한 바 크다. <비열한 거리>에서 유하 감독 자신의 느낌과 경험에서 태어났을 민호라는 캐릭터와 역할은 그 자체로는 생생한 리얼리티의 산물이다. 조폭 장르의 안으로 걸어들어온 리얼리티의 문제아가 <남부건달 항쟁사>라는 또 하나의 조폭영화를 만들고 시연한다. 영화 속 영화, 영화 속 영화감독은 자기 반영의 묘미를 발휘하는 방편이지만 민호의 역할은 그 이상이다. 이 영화감독은 병두의 급소를 잡고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는 굉장한 조연이다. 마치 유하 감독이 직접 극에 뛰어들어 개입하는 듯한 상황은 이물감을 넘어 장르 내부의 개연성과 비장미에 혼란을 일으킨다. 스크린 밖의 리얼리티가 스크린 속의 리얼리티를 훼방하는 형국이랄까. 일반적인 갱스터 장르의 과장된 스타일을 최대한 일상적 톤으로 맞춘 것도 영화감독 민호의 극중 존재감을 살리기 위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역부족이다. 또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드라마를 추동하고 캐릭터의 결정적 행위에 리얼리티를 주었던 로맨스가 여기에선 이야기의 직진성을 자꾸 흩뜨려놓는다.

리얼리티 구축의 영역에서 배우를 빼놓을 수 없다. 유하 감독은 배우 고유의 개성을 뽑아내 드라마와 조율시키는 솜씨가 탁월하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권상우를 발견해냈다면 <비열한 거리>는 조인성을 찾아냈다. 영화 속 갱스터는 선하지 않지만 늘 연민의 대상이고자 한다. 병두 역시 예외는 아니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망나니 조인성이 보여줬던 연민의 파워는 병두에게로 고스란히 옮겨온다. 여기에 비열함의 스펙트럼을 넓혀놓은 천호진, 윤제문, 진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말죽거리 잔혹사>의 절정을 이뤘던 유사 이소룡의 옥상 재림이 멋보다 리얼리티를 지닌 액션으로 짜여졌다는 걸 기억한다면, <비열한 거리>의 액션은 그 확장판이라는 데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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