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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화의 조화, <강적>의 박중훈, 천정명
이종도 장미 사진 오계옥 2006-06-09

박중훈을 처음 본 건 술자리에서였다. 술병이 쌓여가면서 사람들의 혀는 알코올에 절어가는데 그의 비유는 점점 더 정확하고 현란해졌다. 받아 적지 못해 아까울 정도였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마치 며칠 전 술자리라도 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22년 동안 주연을 한 배우에게 생기는 아우라였을 것이다.

수줍어하면서 웃음을 짓는 천정명과 인사를 나눴다. 영화 속의 탈옥수 수현의 반항아는 사라지고, 봄날 바람에 솜털이 살짝 흔들리는 미소년이 앞에 있다. 두 사람이 지금은 쓰지 않는 오래된 낡은 공장 계단으로 올라섰다. 닮지도 않았고 어울려 보이지도 않는데 벌써 둘은 오래전부터 잠복근무라도 해온 짝패 같다. 점퍼와 청바지 차림으로 박중훈이 공장 건물을 어슬렁거리면, 천정명은 상처가 많이 난 두손을 군복풍의 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찌르고 슬그머니 뒤를 따랐다. 적이 친구가 되고, 범인과 형사가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강적>처럼, 둘은 안 어울릴 듯 어울리고 스며들지 않을 듯하면서 스며들었다.

배우, 깊어가는 멋을 아는 배우

박중훈이 말하는 다섯개의 박중훈

하나. 말 (김혜리 기자는 박중훈을 비유와 요약의 대가라고 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영화 잘 만들어야 돼요. 그런데 그게 힘들어. 축구평론가가 위에서 그라운드를 내려다볼 때는 다 보이지만 직접 뛴다면 경기장이 하얗게 보일 거야.”) 말을 잘한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일 거다. ‘쟤 말은 잘해.’ 이건 말을 잘하는 게 아니다. 가슴을 움직이지 못했다는 거다. 말을 잘한다는 건 청자의 입장을 생각한다는 거다. 뇌기능에서 해마가 기억을 찍어내는 공장이라면 프로그램을 보내는 곳은 편도체다. 보통 사람들이 10만큼 받아들일 때 예술가는 100이 될 수도 있다. 편도체에서 강도를 더 크게 받아들이는 거다. 예술가가 별걸 다 기억한다거나 성질을 낸다거나 하는 건 이런 거다. 충격과 감동을 접했을 때 입력을 시키는 게 남다른 거다. 말 잘하는 사람은 그런 자극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저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둘. 공기 (담배 피우세요? 커피숍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그는 상대방을 배려한다. 그런데….) 2002년 1월에 끊었다. 책상에 담배랑 라이터랑 늘 두고 보면서 끊었다. 깨끗해지는 느낌이고 피로가 덜하다. 지방 촬영 다녀오면 서울의 공기가 답답하다는 걸 느낀다. 비가 오니까 창문을 활짝 열 수 있어 좋더라. 집 앞에 산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

셋. <강적> (그의 필모그래피는 1985년부터 시작한다.) 두 가지 경우가 있겠다. 안 됐을 경우는 그저 그런 전형적인 영화 한편을 열심히 한 것이고, 잘됐을 경우는 나이 들어 보이게 나와 좋다는 거다. 감정 들어가는 신에서 주름이 많아지더라. 완성도를 떠나 외양만 볼 때는 예전에 비해 깊어진 느낌을 줄 것 같다.

넷. 40 40이란 나이가 진지하게 반추하게 만든다. 배우는 우주의 중심이 자기다. 오래 하다보니 우주의 중심이 너무 내쪽에 있었구나 반성한다. 당연한 것들이 실은 세상이 나에게 맞춰주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나이 든다는 게 신나는 일은 아니지만 지금 나이가 낙담할 나이는 아니다. 중요한 건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다시 살고 싶지도 않다는 거다. 젊음의 기준은 앞으로 계획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닌가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계획이 있을 것 같지 않나?

다섯. 옆구리 배가 나온다. 옆구리가. 운동을 하는데도 절대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잘 빠지지 않는다. 그걸 빼야 한다.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를 많이 보고 있고 영어를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더 많은 관객과 만나기 위해, 신선해지기 위해 그는 할리우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세상에서 박중훈만 아는 천정명에 대한 몇 가지(또는 여전히 모르는 몇 가지) 애가 되게 욱하다. 눈이 휙휙 돌아가는 때가 있다. 천생 20대다. 보기 좋다. 정열적이고 순수하고 기분파고 자존심 세고 유약하다. 여자를 어떻게 꼬시는지, 만나서 어떻게 리드하는지는 내가 모르겠지.

*아마 천정명은 박중훈을 이렇게 생각할 거다(그렇지만 실은 이렇다)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내가 선생님 나이는 아니고 선배님은 정없이 들리고 그래서. 내가 옛날 경험 얘기하면 내가 어려운 사람일 테고. 내가 스스럼없이 대하지만 그렇지 않게 느낄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40대 유부남이니까 처한 환경도 다르고 이질감도 있겠지. 기본적으로 나와 있는 게 녹록지는 않겠지만 편하기는 할 것이다. 사실 안성기 선배와도 오랫동안 지냈지만 기본적인 어려움은 있거든. 나는 편한 사람이다. 쉬운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실은, 정명이 못지않은 욱한 성질이 있었고…. 정명이랑 더블데이트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든 적 있다.

*내가 천정명의 애인이라면 기뻐할 것들, 서운해할 것들 쟤는 여자가 좋아할 조건을 다 갖췄다. 닭살과는 아니다. 귀여울 것 같다. 듬직하기도 하지만. 월드컵경기장에서 보스니아전을 응원하는데 내내 서서 ‘패스해, 이렇게 해’ 하면서 응원하더라. 정열적이고 낭만적이다. 또 다리가 예쁘다. 예쁜 다리에, 튼튼한 복근에, 구레나룻 사이에 난 솜털에…. 불안한 건 있을 거다. 수려한 외모니까. 삐치면 먼저 전화할 것 같지는 않다. 여자가 먼저 해야 할 것 같고. 내가 여자라면 티셔츠랑 청바지랑 스니커즈랑 해서 귀엽게 입히고 다니겠어.

남자, 근성과 낭만을 아는 남자

천정명이 말하는 다섯개의 천정명

하나. 근성 (그는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선한 눈빛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런데….) 한번 해야겠으면 꽂히는 스타일이다. 예를 들어 내 앞에 물병이 있는데 (테이블에 놓인 물병을 잡으며) 이걸 갖고 싶다, 그러면 꼭 가져야 한다. 소유욕이 강하고 자기 것에 대한 집착도 있다. 학교 다닐 때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뒤에 앉는 친구였는데 커터칼 같은 걸로 등의 교복 이음새를 톡톡 끊었다. 그만 좀 하라고 왜 그러냐고 화를 냈다. 얄미운 친구였다. 그 친구를 혼내주려고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한번 벼르고 있다가 열심히 때려줬다.

둘. 브래드 피트 브래드 피트는 내 우상이다. 자유분방한 것이 좋고 스타일도 멋지다. 라이프스타일이나 연기에서 풍기는 느낌,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든다. 다음에는 <쎄븐> 같은 영화를 하고 싶다. 브래드 피트가 맡은 형사 역할도. (안젤리나 졸리가 딸을 낳았다는 뉴스를 읽었다고 했더니) 축하한다고 전해달라. (웃음)

셋. <강적> <패션 70’s> 끝나고 영화 제의가 많이 들어왔다. 어떤 영화를 할까 고르고 있었다. 그중에서 괜찮았던 것이 <강적>. 역할도 마음에 들었지만 형사 역을 박중훈 선배가 하신다고 해서 해보고 싶었고 호기심이 생겼다. 한 작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선배랑 같이 하는 건 처음이라 긴장을 많이 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드리는 건 아닐지. (그는 박중훈을 주로 형님이라고 불렀다) 형님께서 촬영 중간중간에 힘이 돼 주시고 좋은 말도 해주셨다.

넷. <굿바이 솔로> (나문희는 ‘김혜리가 만난 사람’에서 천정명이 어느 연예 프로그램에 나와 인터뷰를 하는데 <굿바이 솔로> 얘기를 안 하더라고 서운해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나문희 선생님과 같이 했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작별 인사를 하며 그동안 잘 지내라고 인사하는 신. 어떤 사람이 남자친구 있냐고 하면 꼭 애인 있다고 얘기하라고 하면서. (웃음) 나문희 선생님이 극중에서 말을 못하시는데 둘이서만 통하는 그런 대화가 있었다. 서로 애처럼 재미나게 장난치면서….

다섯. 남자 (예전에는 소년이지 않았나? 지금은 남자로 성장한 것 같다고 그를 도발해봤다.) 얌전한 역할을 주로 맡았는데… 시트콤을 하면서 유해졌다. 젖살이 있어서 ‘이런 역할은 안 돼’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게 콤플렉스가 돼서 강인한 역할을 하고 싶었다. 남자다운 모습은 잠재돼 있었던 것 같다. 남자다운 것이란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것. 자기 일에 책임감, 자부심이 있는 것. 영화도 뒷골목 분위기가 나는 남성적인 것을 좋아한다. 홍콩영화같이.

*세상에서 천정명만 아는 박중훈에 대한 몇 가지(또는 여전히 모르는 몇 가지) 형님의 집이 궁금했다. 형수님도 보고 싶었다. 자식들도. 도대체 집에 가면 어떤 가장이실까. 그래서 한번 놀러간 적이 있다. 형님 집에서 놀다가 밥도 먹었다. 아기 방이나 형님의 침실이라든지 서재라든지, 참 좋았다. 포근했다. 형님이 가정적이셔서 깜짝 놀랐다. 연기를 할 때에는 철저한 편이시다. 철두철미한 면이 있다. 경력과 연륜에서 우러나는 그런 것. 축구만 봐도 신인들만 내보내서 하면 팀 운영이 안 된다. 이을용이나 최진철 등의 선수를 계속 두는 이유가 경험에 있다. 그런 점에서 형님은 존경할 만한 분이다.

*아마 박중훈은 천정명을 이렇게 생각할 거다(그렇지만 실은 이렇다) 얼굴은 생각을 안 할 것 같지만 사실 생각을 하고 산다 정도? (웃음) 농담이다.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순한 면이 있는 반면 강한 면도 있다. 단순하고 순수해 보이지만 복잡한 사람이기도 하다. 화나면 무섭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스타일. 한번 당한 것은 기억해서 두배, 세배, 열배로 갚아준다. 악바리 근성이 있다.

*내가 박중훈의 애인이라면 기뻐할 것들, 서운해할 것들 이건 대답하기 어렵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아서. 일단 잘 챙겨줘서 좋을 것 같다. 형님은 촬영장 나가면 남을 배려하는 편이다. 유머 감각도 남다른 분이다. 센스가 있다고 해야 하나. 사람을 대할 때나 현장에 오셨을 때 자세가 모범적이다. 감독님과 상의할 때도 따질 건 따지고 그런 면이 부럽다. 서운해할 것들은 없는데. (한참 고민하다가) 너무 바쁘셔서 데이트할 시간이 없는 건 속상하지 않을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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