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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한 외양 뒤에 감춰진 엄연한 현실, <오프사이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각본을 쓴 <하얀 풍선>(1995)으로 데뷔한 자파르 파나히는 점진적인 이행의 과정을 거쳐 <오프사이드>를 통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처럼 되돌아온 영화적 세계가 원래의 그것과 같을 리 없다. <오프사이드>의 파나히는, 두 번째로 키아로스타미의 각본을 영화화한 작품이자 <택시 드라이버>(마틴 스코시즈, 1976)나 <의식>(클로드 샤브롤, 1995)을 연상케 하는 어두운 범죄극인 <붉은 황금>(2003)을 내놓은 뒤의 파나히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일상의 나른한 모험 속에 빠져든 아이들의 세계에서 정처없는 배회와 무망한 탈주의 시도로 특징되는 어른들의 세계로 이행해갔던 파나히의 경력은 좀더 간단히는 ‘낮의 영화’에서 ‘밤의 영화’로의 이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이와 어른의 중간쯤에 자리한 십대 소녀들이 (이란 내에서는) 금녀(禁女)의 구역인 축구경기장 안으로 몰래 숨어들어가려다 겪게 되는 사건들을 코믹한 터치로 그려낸 <오프사이드>는 낮과 밤, 성공과 실패, 희극과 비극으로 확연히 갈렸던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파나히 스스로가 통합하고자 하는 시도로 여겨진다. 즉 이 작품은 <써클>(2000)과 <붉은 황금>처럼 제도와 규칙이 강요되는 체제로부터의 탈주가 얼마나 힘든지 역설하는 영화이지만 앞선 두 영화의 음울한 결론에 기대기보다는 <하얀 풍선>이나 <거울>(1997)과 같은 초기작의 낙천성을 다시 한번 끌어안고 또한 이들 영화의 형식적 장치들을 두드러지게 차용하고 있다.

경기장에 남장을 하고 숨어들어가려던 소녀들은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임시로 마련된 울타리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런데 이 울타리는 어느새 소녀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며, 권리를 요구하고, 급기야 그들을 감시하는 군인들까지 포용하게 되는 연대의 공간으로 화한다. 동시대 이란 여성들을 둘러싼 상황에 대한 명백한 은유임이 분명한 이 울타리는 <써클>의 ‘원환구조’의 플롯을 통한 형식적 은유를 좀더 명료하게 시각화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파나히는 데이비드 월시와의 인터뷰에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일종의 원환 안에서 살고 있다”고 지적하며 “원환의 반경을 확장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영화가 지향하는 바이자 사람들이 노력해야 할 바라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신중한 발언은 경솔하게 ‘탈주’와 ‘위반’을 역설하는 그 어떤 이의 말보다도 (파나히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새겨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프사이드>의 코믹한 외양 뒤에 감춰진 엄연한 현실을 간과해버리기 십상이다. 제목 ‘오프사이드’는 제도의 원환을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위반을 뜻함과 동시에 일시적인 환희를 가져다줄 뿐인 위반을 뜻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적절하게 중의적이다. 즉 ‘오프사이드’는 월경(越境)인 동시에 반칙이다.

영화 내에서 소녀들이 범하는 위반의 중의성은 시청각적 장치들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여기서 파나히는 (실제 축구경기 장면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 대신) 경기장 관중의 함성과 라디오 중계방송 등의 외화면 사운드를 우리에게 계속해서 들려주는데 경기 종료와 더불어 영화도 끝난다. 플롯과 모호한 평행관계에 놓인 외화면 사운드를 통해 시간의 추이를 가늠케 하는 이러한 방식은 파나히가 낙천적인 결론을 지닌 초기작들- <하얀 풍선>에서의 새해의 시작까지 남은 시간을 알리는 방송, <거울>에서 이란 대 한국의 축구경기 중계방송- 에서 활용한 뒤로 <써클> 이후로는 자제해왔던 것이다. 따라서 음울한 결말을 예감케하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파나히의 전작에 익숙한 관객에게라면) 이러한 외화면 사운드는 그러한 섣부른 예감을 반박케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승리를 자축하는 군중으로 가득한 밤거리의 풍경으로 끝나는 결말 또한 ‘낮과 밤’과 관련된 파나히 특유의 가치체계를 상기한다면 단순한 해피엔딩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군중 속에 섞여든 소녀들은 언제라도 다시 호송차에 태워져 <써클>의 (마지막 에피소드의) 여인들처럼 유치장에 감금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나히 자신도 <오프사이드>가 이와 같은 음울한 결론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이란 대 바레인의 월드컵 예선전이 이란의 승리로 끝난 것이 지금의 결말을 만들었음을 밝힌 바 있다. 덕분에 <오프사이드>는 파나히의 영화 가운데 가장 모호하고 다양한 해석에 열린 결말을 지니게 되었다.

파나히가 동시대 이란 감독들 가운데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줄기차게 테헤란(의 사람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점일 것이다. 많은 이란영화들이 오지와 변방으로 향해 낯선 이미지들을 건져올리는 동안 그는 테헤란의 구석구석을 뒤져왔던 것이다. 특히 <붉은 황금>은 지금껏 우리가 알지 못했던 테헤란 사람들의 ‘현대적인’ 라이프스타일을 화면에 옮긴 ‘도시영화’의 걸작 가운데 하나라 할 만하다(여기에 좀더 제한적이고 미니멀한 스타일로 만들어진 키아로스타미의 ‘테헤란 영화’ <텐>(2002)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보다 한결 무게를 덜어낸 <오프사이드>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슬람에 대한 우리의 상투적인 편견들을 공박하면서 세계 여느 곳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관심과 열정, 고민을 갖고 살아가는 이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이란영화’라는 상투적 범주를 넘어선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다. 축구에 열광하는 이란인들, 특히 그녀들의 함성소리는 테헤란의 공기를 진동시키는 수많은 소리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 또한 우리의 동시대인임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표상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오프사이드>는 그 사소한 결점들을 지적하기에 앞서 우선 힘껏 응원하고픈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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