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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세계”의 증명, <짝패>
이영진 2006-05-23

도시 한가운데서 범죄자들과 드잡이하며 살아가는 형사 태수(정두홍). 죽마고우 왕재(안길강)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곧바로 고향 온성으로 향한다. 유년 시절 왕재와 함께 뭉쳐다녔던 필호(이범수)는 태수에게 왕재가 “멋모르고 날뛰는” 10대들의 싸움에 휘말려 결국 목숨을 잃었다고 말한다. 장례식이 끝난 뒤 태수는 서울로 돌아가기를 미룬다. 그리고 왕재를 죽인 범인을 직접 찾으러 나선다. 왕재를 친형처럼 따르던 석환(류승완)도 “형 쑤신 놈덜 찾아다가 뼉따구까지 싹 다 발라버릴” 것이라며 씩씩대고, 결국 두 사람은 투합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왕재를 죽인 이가 ‘영원한 친구’를 약속한 필호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당황한다.

류승완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 <짝패>는 익숙한 줄거리의 영화다. 굳이 <친구>를 들지 않더라도, 변치 않는 우정을 약속했던 친구들이 세월이 지나 결국 칼부림을 벌이는 남성 비극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다. 그 익숙함을 <짝패>는 비틀거나 숨기지 않는다. 이를테면 누가 왕재를 죽였는지 일찌감치 일러준다. 눈썰미 좋은 관객은 왕재의 죽음 앞에서 “그놈이 성질 죽이고 참았어야 하는 건디…”라며 복수를 다짐하는 대신 한발 물러서는 필호를 일찌감치 의심할 수 있다. 이어서 나오는 태수의 회상은 그 의심을 확증으로 굳힌다. 20년 뒤에 꺼내먹자며 뱀술을 땅에 묻고, 나미의 <영원한 친구>를 부르며 함께 어울리던 그때 그 ‘친구들’은 이제 없다.

“여기, 옛날에 우리 클띠 그 온성이 아니유, 지금….” 오프닝의 참혹한 악몽이 현실이 되고, 언제나 그대로일 것 같았던 고향이 폭력의 도시로 변했음을 태수는 깨닫는다. 관광특구로 개발되어 대형 카지노가 들어선다는 솔깃한 이권 유혹 앞에서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다. 왕재와 태수에게 눌려 언제나 넘버3 양아치에 머물러야 했던 필호에게는 더없는 인생역전의 기회이고, 마을 사람들 또한 일확천금 횡재의 가능성에 양심을 판다. <아라한 장풍대작전> <주먹이 운다> 등에서도 그러했듯이, 류승완 감독은 이번에도 파괴된 전통 혹은 관계의 복원을 시도한다. 그러나 전작들과 달리 세상을 위험에서 구하거나 자신의 존재증명을 하지 못한다. 아수라에서 살아남은 석환이 할 수 있는 말이란 고작 “X발”이다.

<짝패>는 <아라한 장풍대작전> <주먹이 운다>보다는 장편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혹은 <피도 눈물도 없이>에 더 가깝다. 칼받이가 되는 줄 모르고 세상에 뛰어든 동생을 구하려는 형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돈가방 쟁탈전을 벌이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정확히 말하면 거액을 손에 넣게 된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두 여자처럼,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밖에 없는 태수와 석환은 파괴된 것을 회복하지도, 사라진 것을 되살리지도 못한다. 자본과 권력의 세계에서 주먹 하나 믿고 할 수 있는 일이란 힘있는 자들을 위한 대리전일 뿐이다. “강헌 눔이 오래 가는 게 아니라 오래 가는 눔이 강헌 거드라”라고 말하는 필호 또한 서울 치들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그들은 모두 칼을 맞고서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는 왕재와 똑같은 비극을 맞이한다. 세상이 내건 판돈을 거머쥐기에 애당초 그들은 모두 별볼일없는 ‘짝패’다.

복수극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류승완 감독은 정두홍 무술감독과 함께 벌이는 ‘액션활극’의 쾌감에 좀더 방점을 찍는다. 캐릭터를 만들고 드라마를 비꼬는 재미를 포기하는 대신 그는 그 공백을 “와이어없이 벌이는 생짜 액션”으로 가득 채운다(‘리얼리즘드라마와 액션 장르의 기묘한 동거’에서 비롯되는 불균형의 요소들을 제거하는 대신 <짝패>는 액션이라는 단일한 궤적 위에 인물들과 이야기를 차례대로 배치한다). 이를테면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태수와 불법적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석환의 갈등 같은 건 없다. 대신 한 단계씩 액션의 강도를 높여가며, 보는 이의 시선을 가로챈다. 힙합과 야구방망이로 무장한 100여명의 10대들과 거리에서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나 운당정에서 단계별로 업그레이드된 실력의 상대자들과 겨루는 장면 등은 육체의 스펙터클, 그 자체다. 인물들의 끓는 분노의 감정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정도다. 류승완, 정두홍 두 사람은 물론 서울액션스쿨 출신 무술연기자들의 대규모 실연은 감독의 의도대로 실제 싸움판에 뛰어든 것 같은 생생함을 증폭시킨다.

<짝패>는 비교적 적은 25억원의 예산으로 찍은 슈퍼 16mm영화다. 또렷한 35mm필름보다 색감이 다소 번지는 단점이 있지만, <짝패>는 그 단점을 장점으로 바꿔놓는다. 이를테면 조악한 간판들로 번득이는 자본주의 공간 온성을 표현하기에 슈퍼 16mm라는 선택은 더없이 적절하다. 의뭉스러운 필호를 효과적으로 표현해낸 이범수의 악역 연기 또한 돋보인다. 사람 좋은 말로 누군가를 달래다가 눈자위를 한번 뒤집고서 폭력을 행사하는 필호 덕에 다소 심심한 내러티브에 긴장이 선다. 류승완 감독이 그동안 함께 작업하기 즐겨했던 스탭들 대신 김영철 촬영감독, 조화성 미술감독 등 새로운 동료들과의 액션 협주도 색다른 느낌을 더해주는 요소. <짝패>는 적어도 “류승완의 세계를 증명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이 과욕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영화인 것만은 분명하다. 김봉석의 지적처럼(<씨네21> 553호), 누가 이런 영화를 만들려고 덤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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