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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 방문한 배우 겸 감독 다케나카 나오토
사진 이혜정김혜리 2006-05-25

서양의 관객과 평자들은 배우 다케나카 나오토(50)에게 ‘일본의 짐 캐리’, ‘일본의 로빈 윌리엄스’라는 별명을 붙여 기억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오키라는 이름만으로도 족하다. <쉘 위 댄스>에서 교습소 기둥을 부여안고 룸바 스텝을 밟던 샐러리맨 아오키, 그리고 <으랏차차 스모부>에서 모래판에만 서면 긴장성 설사를 일으켜 화장실로 달음질치는 만년 대학생 아오키. 하긴 그런 걸음걸이로 다가온 사람을 누군들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국내 개봉한 수오 마사유키, 야구치 시노부 감독(<워터 보이즈> <스윙 걸즈>)의 코미디에서 다케나카 나오토는 창대한 열정과 미약한 재능의 부조화가 기이한 불꽃을 일으키는 캐릭터들을, 폭주하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과 같은 솜씨로 그려냈다. 주인공이 점잔을 빼고 있는 동안 영화의 테마를 다짜고짜 몸으로 요약해버리는 가공할 만한 ‘장면 도둑’(Scene Stealer). 이것이 다케나카 나오토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우리는 다케나카 나오토라는 숲의 한 모퉁이에 발을 들여놓았을 뿐이었다. 그는 100편이 넘는 영화와 TV드라마에 출연한 데뷔 21년차의 배우다. 그의 연기 스펙트럼은 가장 어두운 음지에까지 닿아 있다. 첫 주연작 <천사의 내장>을 비롯해 <고닌> <프리즈 미> 등을 함께 만든 이시이 다카시 감독의 영화에서 다케나카 나오토는 절망을 폭력으로 표출하는 남자이며 <완전한 사육-신주쿠 여고생 납치사건>에서는 영육이 일치된 완전한 사랑을 유괴로 이루려 하는 비틀린 로맨티스트다. 한편, 다케나카 나오토는 1991년 베니스영화제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한 <무능한 사람>으로 입봉해 <119> <도쿄맑음> <이중주> <사요나라 컬러> 등 5편의 단독 연출 작품을 내놓은 감독이기도 하다. 부부와 가족의 갈등, 소규모 공동체의 정경을 주로 그리는 이 영화들에서, 주연까지 겸한 그의 연기는 한결 묵직하고 은근하다.

다케나카 나오토를 좀더 가까이 알고 싶다는 마음이 동했을 무렵, 올해 전주국제영화제가 배우 마스터클래스에 최민식과 나란히 그를 초청했다는 희소식을 들었다. 그의 도착에 맞춰 전주로 향한 나는, 인천공항에서 고속도로를 달려 막 당도한 다케나카 나오토가 최민식과 동석한 저녁식사에 끼어들었다. 미닫이를 열고 들어선 다케나카 나오토는 피난길에 헤어진 형제와 상봉한 양 최민식을 와락 끌어안았다. 대배우들의 포옹을 흐뭇하게 구경한 나는 자리가 정리되자 “두분, 구면이셨군요?” 하고 물었다. 멀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생전처음 뵙습니다.” <올드보이>의 연기에 반한 나머지 최민식이 그만 친구처럼 여겨졌다고 설명한 다케나카 나오토는, 어느새 조용히 장판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식사 내내 그는 끓어오르기와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간헐천 같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발레리나처럼 잰걸음으로 재떨이를 집어왔고, 반찬 맛을 묵묵히 음미하는가 싶으면 두어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조크를 던졌다. 그는 참으로 넓은 음역을 갖고 있었다.

마스터클래스가 열린 이튿날 아침, 다케나카 나오토는 입이 떡 벌어지는 양복을 차려입고 단상에 등장했다(실제로 벌어진 입술- 롤링 스톤스의 <Forty Licks> 앨범 로고- 이 잔뜩 그려진 옷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그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톰 크루즈입니다.” 그리고 “긴장을 높게 가져가고 싶어서”라고 야한 의상의 사연을 해명(?)했다. 작고 단단한 그의 몸 안에서 바야흐로 간헐천이 다시 끓어오르고 있었다.

(다음 대화는 기자가 진행한 전주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 및 개별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오늘 마스터클래스 강연에 앞서 상영된 <사요나라 컬러>(2004)는 멜로드라마이면서도 두 남녀가 직접 애정을 토로하기보다 제3자와 대화를 통해 감정을 내비치는 모습이 독특했습니다. 혹시 만드는 입장에서 모종의 쑥스러움이 있었습니까? =기본적으로 저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입니다. 초등학교부터 고교 3학년까지 좋아하는 여자애 앞에서 한마디도 입을 열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사요나라 컬러>는 제가 각본도 쓴 영화라 제가 좋아한 여학생에게 했던 행동이 고스란히 들어 있어요. 저는 곧잘 수업을 땡땡이치고 좋아하는 여학생이 수업받는 모습을 맞은편 건물 옥상에서 바라보곤 했어요. 그러다보면 왠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어, (영화 속 주인공처럼) 옥상에서 매달리기도 했죠.

-다친 데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배우들 중에는 배우가 되기 전 예민한 감수성을 끌어안고 내성적으로 산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학급의 행사마다 주도했던 타고난 엔터테이너들도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쪽이었나요? =저는 그림 그리기를 몹시 좋아했고, 여럿이 협조하는 일에는 서툴렀어요. 그래서 수단으로서의 놀이는 잘 못했죠. 초등학교 때 다운증후군을 가진 여자 급우가 한명 있었는데 그 아이는 항상 수업에서 빠져나가 홀로 운동장을 돌곤 했어요. 창문으로 그녀가 운동장을 뛰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 아이는 수업과 무관하게 혼자 있을 수 있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녀는 다른 애들과 쉽게 친구가 되지 못했지만 전 언제나 홀로 있는 그런 존재들에게 흥미가 갔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애하고는 언제든 대화를 나눴고 같이 하교했어요.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대본을 쓸 때도 저는 관객보다는 거기 참가하는 스탭과 배우 개인들을 위해, 오히려 그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기분이 듭니다. 제 분야는 결과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종류의 일이지만, 정말 소중한 것은 모든 사람이 같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영화가 완성되고 나면 갑자기 홀로 된 느낌입니다. <사요나라 컬러> 촬영이 끝난 다음 강가에서 혼자 울기도 했어요. 나이가 오십인데 말이죠.

내가 아닌 사람이 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1956년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나신 걸로 아는데, 어떤 풍경을 가진 동네였나요? <무능한 사람> <119> <사요나라 컬러> 등 감독한 작품을 보면 늘 바다를 낀 아름다운 풍광이 들어 있고, 심지어 <도쿄맑음>처럼 도시가 배경인 영화에도 하늘과 나무가 있는 열린 풍경이 하나쯤 들어 있더군요. =제가 태어난 가나가와현 요코하마는 어부들의 작은 마을이었어요. 바다와 산이 근처에 있어 행복한 여름방학을 가질 수 있었죠. 제가 감독한 영화 5편을 돌아보면 특별히 의식한 것은 아닌데 바다와 강이라는 요소가 빠지지 않았네요. 몸 속에 배어 있기 때문인지 그런 풍경을 꼭 넣게 됩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주영화를 만드셨고 다마미술대학 재학 중에도 8mm영화를 연출했습니다. 스스로 오타쿠였다고 회고할 수 있나요? =그런 의미로는 오타쿠 맞습니다. 다른 애들이 좋아하는 영화에는 무관심했고 공포영화에 탐닉해서 특히 1930년대 유니버설의 몬스터 시리즈에 나오는 프랑켄슈타인, 오페라의 유령, 드라큘라, 늑대인간 캐릭터를 몹시 좋아했습니다. (생각에 잠겨) 그리고 본드걸도. (좌중 폭소) 숀 코너리가 007이던 시대의 <골드핑거> <썬더볼>에 나온 본드걸을 특히 좋아했어요. 음, 제가 본드걸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죠.

-유니버설 몬스터 시리즈의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늑대인간 같은 캐릭터들의 어떤 면에 끌린 걸까요? =그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혼자라는 것이죠. 모두가 고독한 존재들입니다. 뭐 본드걸은, 고독한 이미지는 없지만요. 하지만 본드걸도 어디선가는 고독함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일을 즐기는 데에 그치지 않고 직접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셨다는 것은 보통 이상의 의욕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요. =영화에 끌린 계기는 고교 1학년 때 후지카 싱글 8이라는 8mm 카메라와의 만남이었어요. 필름이 몹시 작아 한번에 3분밖에 못 찍는 카메라였죠. 미술반원이었는데, 문화제를 위한 미술부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목적으로 부비를 써서 처음 카메라를 구입했어요. 그러고 보니 그 영화도 부원들과 스케치 여행 간 바다에서 찍었네요. 하지만 사실은, 제가 좋아하던 미술부 여학생을 필름으로 찍고 싶어서 다른 애들을 구슬린 거였답니다. 그런데 다른 애들은 모두 촬영하고도 막상 좋아하는 여자는 찍을 수가 없는 거예요. 돈이 없었던 저는 필름을 세개밖에 사지 못해 주어진 시간은 9분뿐이었는데, 9분 동안 필사적으로 찍었건만 결국 그녀는 못 담았습니다. 그래서 문화제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속에는 그녀 한 사람만 빠져 있었죠. 그것이 저와 영화의 첫만남입니다. 극장에서 영화 보는 일도 좋아했어요. 극장의 불이 꺼지는 순간이 무척 로맨틱하다고 느꼈습니다. 처음 카세트 레코더가 생기자 극장에 몰래 숨겨 들어가 사운드를 녹음한 다음, 머리맡에 넣고 영화의 음향을 다시 들으며 장면들을 하나하나 되살리며 잠이 들곤 했습니다.

-영화에 대한 매혹과 연기를 향한 의욕은 비슷한 시기에 찾아왔나요? =학창 시절 남들 앞에서 제대로 말을 못했고 국어 낭독수업에서도 속으로는 읽고 싶으면서도 손을 들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고교 1학년 때 타인의 모습을 빌리면 남들 앞에서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저는 굉장히 콤플렉스가 많아서 내가 아닌 사람이 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축구부의 다카다라는 멋진 친구를 흉내내다가 친구들과 커뮤니케이션을 더 잘할 수 있게 됐고 수업 내용보다 각 과목 선생님의 개성에 집중해 흉내를 내보이면서 친구들과 활발히 어울리게 됐죠. 하지만 그러니까 나중엔 친구들이 진정한 네 모습을 모르겠다며 거꾸로 제 곁을 떠나더군요.

-그 문제는 아직 미결 상태인가요? =해결됐다고 봐야겠죠? 결혼을 해서 아이도 둘씩이나 가졌으니까요.

캐릭터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장을 받아들이면서 태어나는 것이죠

-“처음부터 영화를 하고 싶었으나 생계를 고려해 TV 연예프로그램부터 경력을 시작했다”고 한 TV쇼에서 밝힌 바 있는데 좀더 자세히 당시 정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테레비 엥게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입상해 연예계에 데뷔하기까지의 생활이 궁금합니다. =미대 그래픽 디자인과에 진학했지만 1학년 때 영상연구회에 가입한 것이 저의 길을 정했죠. 당시는 이소룡을 숭배해서, 처음 찍은 영화도 이소룡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연극의 기본을 공부하고 싶어 극단 청년좌에 들어갔지만, 어려서부터 협조성이 없다는 평을 들어온 터에다 창피함도 많이 타서, 열심히 연습을 안 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생 취급을 받았습니다. 저는 연기는 늘 변화하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애드리브를 하다가 지적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극본에 없는 연기를 하는데 무대 위에 선 제 등을 선배 배우들이 때린 겁니다. 그 일에 충격을 받아 TV방송사를 찾아갔습니다. 다른 배우의 흉내는 여러 가지 낼 수 있는데 일을 줄 수 없냐고요. 그렇게 코미디계에 데뷔한 것이죠.

-모방 연기로 일할 기회를 얻으셨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코미디언으로서 당신은 육체를 최대한 활용하는 배우입니다. 극단적 예로 <쉘 위 댄스>와 <으랏차차 스모부>의 캐릭터가 있죠. 또, 어제 잠깐 보니 휴대폰 줄에 ‘유령 신부’ 피규어를 달고 계시더군요. 팀 버튼의 <피위의 모험>에 나오는 피위 허먼 캐릭터를 좋아한다는 말씀도 해주셨고요. 요컨대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이나 무성영화 시대 슬랩스틱코미디에서 보는 기계화된 육체의 움직임을 통한 연기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신 게 아닐까요? 유니버설 호러 캐릭터 중 일부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고요. =글쎄요. 저는 연기에 대해 미리 정해놓는 작업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배우라는 일을 특별한 직업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 현실에서 매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사는데, 배우가 대본을 미리 읽고 어떻게 하겠다고 정한다는 게 납득이 안 돼요. 배우는 전체적인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연기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설계란 감독이 만드는 것이고 배우는 단지 현장으로 나아가 거기서 감독을 느끼고 의지할 수만 있다면 제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캐릭터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장을 받아들이면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감독할 때는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안 읽어도 좋다는 말을 하죠. 설계도는 스탭들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니 배우는 그 부분은 생각 안 해도 된다고요.

나에게 연기는 재즈 세션과 비슷해요

-이시이 다카시(<천사의 내장> <고닌> 외), 수오 마사유키(<팬시 댄스> <으랏차차 스모부> <쉘 위 댄스>), 쓰카모토 신야(<동경의 주먹> <쌍생아>), 야구치 시노부(<워터 보이즈> <스윙 걸즈>) 감독이 두편 이상 작품을 함께한 분들인데, 그분들과 함께한 경험 중에 특기할 만한 기억이 있습니까? =이시이 다카시 감독은 배우를 궁지에 모는 스타일입니다. 특히 잠 안 자고 촬영하기를 즐겨요. 저의 첫 주연작 <천사의 내장>에서 수조 안에 들어가 여성을 범하는 꿈장면이 있었어요. 잠수를 못해서 떠오르는 몸을 가라앉히느라 무거운 추를 달았는데 이대로 죽는 게 아닐까 싶었죠. 지난해 <캐치 어 웨이브>라는 ‘서핑판 <워터 보이즈>’ 같은 영화를 찍으며 태풍이 부는 바다에서 휩쓸려 몇번이고 죽을 뻔했는데, 이시이 감독님 덕분에 목숨 걸고 찍는 영화에 익숙해져 괜찮았습니다. (웃음) 수오 마사유키 감독님과는 방송에서 먼저 만났는데 처음에는 “감독을 무시하고 연기하는 배우”라는 짐작으로 저를 싫어했어요. 그런데 제 연기를 모니터로 보시다 웃음을 못 참고 급기야 뛰쳐나가더군요. 이후 오해를 풀고 <쉘 위 댄스>를 함께 찍게 됐습니다. 존경하는 배우 야쿠쇼 고지와 공연하는 장면에서 너무 긴장해 제가 20차례 NG를 냈는데 계속 웃으시면서 “필름은 다케나카를 위해 존재한다” 하셨어요. 제가 양성애자가 아님에도 그 순간에는 사랑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더군요. 그나저나 원래 구부정한 분이셨는데 영화를 찍으며 발레리나 주연배우와 결혼하시더니 자세가 똑발라져서 깜짝 놀랐답니다. (웃음)

-공교롭게도 당신은 <SO WHAT> <핑퐁> <워터 보이즈> <스윙걸즈> 등 스포츠나 음악을 소재로 한 앙상블 청춘영화에서 교사나 코치로 아이들의 모험을 응원하는 역할을 반복해서 맡았습니다. 일본의 청춘만화나 소설에서 전통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인가요? 아니면 단순히 우연인가요? =아까 말씀드린 <캐치 어 웨이브>에서도 젊은이들에게 서핑을 가르치는 역을 맡았는데, 각본가가 저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하더군요. 스포츠와 별 관련도 없는 저인데, 좀 신기합니다.

-그 영화 속에서 분한 캐릭터는 ‘스승’이라고 해도 속내를 보면 본인이 묻어둔 사춘기의 꿈을 아이들한테 편승해 뒤늦게 실현하는 인물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당신은 마치 젊은 배우들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노련한 독주자처럼 보여요. 실제 이런 캐스팅으로 작업하는 재미는 무엇입니까? =선배, 후배라는 인식은 없어요. 베테랑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늘 아마추어 기분으로 있고 싶어요. 테크닉을 써서 연기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이지만, 기교란 하다보면 익게 마련이라 싫어하는 감독과 일할 때는 빨리 끝내고 싶어서 테크닉을 구사하기도 하죠. 원래는 이런 대사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든 빨리 끝내고 싶어서 그냥 하는 경우도 있어요. 인물 구도를 보아서 작품을 고르지는 않습니다. 나에게 연기는 재즈 세션과 비슷한 부분이 있죠.

-배우로서 당신의 커리어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TV연기를 한국 관객은 공식적으로 접하기 힘듭니다. 드라마나 직접 진행을 맡은 오락프로그램 중에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고 배우로서 중요한 경험을 얻었다고 여기는 작품이 있으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역사적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대하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주연을 맡아 시대극이지만 현대적 대사를 도입한다거나, 매일 높은 긴장을 유지하며 50부작을 촬영했죠. 결국 빈혈에 걸릴 지경이 됐지만 자기를 궁지에 몰아넣으며 뭔가를 한다는 게 많은 공부가 됐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부족한 부분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다행히 39%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해서 다행스러웠어요. 그러나 기본적으로 권력자는 제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아닙니다.

영화 만들기는 좋아하는 공간을 찾고 사람을 모으는 작업

-젊은 시절부터 영화연출을 수련하셨는데 1991년 첫 감독작 <무능한 사람>이 베니스영화제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했을 때 혹시 연기를 접고 연출에 매진할까라는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많은 사람을 계속 만나고 싶었고 마침 아이도 태어나서 안정적인 생활도 필요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무능한 사람>은 한 전쟁영화를 찍다 알게 된 쇼치쿠 프로듀서 오쿠야마 가즈요시가 “그렇게 영화가 좋으면 1억엔을 투자하겠으니 만들어보라”는 꿈같은 제의를 해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완성 뒤 영화사 사람들과 봤을 때 “볼 사람이 누가 있겠냐”는 반응이었는데 베니스에서 상을 받자 “정말 좋은 영화!”라고 평가가 반전됐습니다. (웃음)

-배우가 감독을 겸할 경우 극복해야 할 위험으로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로버트 레드퍼드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경우는 스스로를 미화한다는 놀림을 받기도 하는데요. =무엇보다 제작비와 일정에 신경이 가죠. 캐스팅의 조합도 중요합니다. 캐스팅에 따라 침묵으로도 충분히 커버가 되는 대목이 생기니까요. 단, 편한 것이 곧 즐거운 것은 아니죠. 결과를 놓고 보면 관객이 많을수록 좋겠지만, 관객이 몰리지 않는 영화가 더 재미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제 취향이 편협한지 극장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관객이 칭찬하는 영화가 납득이 안 가서 빗속에 눈물을 흘리며 돌아온 적도 있어요. 하지만 모순과의 싸움이 어차피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영화 중에도 조용히 공개됐다 막 내린 영화가 있지만, 많은 관객이 드는 것보다 3, 4년이 흐른 뒤 전차 안의 대화 속에서 우연히 “그 영화 봤어?”라며 제 영화가 언급될 때 무한한 기쁨을 얻어요. 특히 그렇게 말해준 여성이 예쁘면 예쁠수록 기쁨이 큽니다. (폭소) 자신의 연기를 연출할 때는 기대가 없기 때문에 모니터도 안 봅니다. 본인의 연기를 편집하는 작업은 특히 힘듭니다. 올해 10월 새 작품을 연출할 예정인데 제가 출연하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세편 정도는, 아니 어쩌면 제가 감독하는 영화에는 영영 배우로 출연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어요.

-<무능한 사람>을 본 평론가들은 오즈 야스지로 감독님의 작풍이 있다고 평하기도 했는데요. =<무능한 사람>의 제작사인 쇼치쿠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님이 소속해 있던 영화사이기도 하죠. 저는 학창 시절 오즈 감독님의 영화를 보았을 때 뭔가 이상한, 특이한 영화라고 생각했지 예술영화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중간부터 보더라도 독특한 카메라 앵글 때문에 오즈 감독의 영화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거든요. 오즈 감독님의 <도쿄의 황혼>을 무척 좋아해서 <무능한 사람>을 찍을 때 그 작품의 여러 요소를 도입했습니다.

-직접 연출하신 <119> <도쿄맑음> <이중주> <사요나라 컬러>는 가족 이야기와 멜로드라마를 선호하는 취향을 보여주는데요. =영화는 관객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의 테마에 집중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제 영화 만들기는 그보다는 좋아하는 공간을 찾고 사람을 모으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한가한 시골 마을 소방수들 이야기인 <119>의 경우 홋카이도에서 찍었는데, 그 마을의 구형 소방차가 천천히 해안선을 달리는 광경과 거기 탄 소방수들의 평화롭게 웃는 얼굴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도쿄맑음>은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 에세이집에서 해바라기 사진을 보고 착안했고요. 그렇게 구상한 영화들이 우연히 가족이라는 테마로 수렴된 거죠. <이중주>는 쇼치쿠에 제안한 기획 두개가 어그러지고 굉장히 우울한 터에 내용도 안 보고 수락한 작품인데 나중에 읽어 보니 꽤나 어두운 내용이지 뭡니까. 그만 코미디로 만들어버렸죠.

-영감은 이미지에서 얻고 영화 만드는 작업은 재즈의 잼 세션처럼 한다고 표현해도 좋을까요? =재즈뿐 아니라 음악은 두루 좋아합니다. 영화를 만드는 동안 스탄 겟츠, 호아오 질베르토, 폴리스, 스팅의 음악을 즐겨 듣습니다. 영화와 음악은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리듬을 타는 자세로 영화에 임합니다. 제게 영화는 하나의 인상입니다. 아니, 한장의 앨범, 한권의 책 역시 다 듣고 읽은 뒤 남는 인상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피아니스트 아내와 별거하는 남편으로 분한 <이중주>를 보면 줄곧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휘파람을 붑니다. 실제로도 멜로디와 리듬을 항상 타면서 생활하지 않을까 상상해봤습니다. =언제나 그래요. 머릿속에서 음악이 들려오죠. 늘 휘파람을 불고 있어요(<The Girl From Ipanema>를 휘파람으로 들려준다). “(…)그가 지나가면 모두 감탄하네. 걸음걸이는 삼바 춤처럼, 경쾌하고 부드럽게 흔들리네.”

감독은 말이 아닌 에너지로 느끼게 하는 존재죠

-사소한 궁금증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개봉한 <완전한 사육…>을 보면 당신의 캐릭터가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여고생을 납치하고 기적처럼 목적을 달성하지만 결국 잡혀서 수감됩니다. 그런데 변호사가 “사형이나 무기징역 외 판결도 가능하다”고 말하자, 오히려 절망합니다. 마치 극형을 받아야만 자신의 행위와 사랑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그런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입만 움직이고 대사의 사운드는 들리지 않는데요. 뭐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감독 바보!”라고 말했습니다. (좌중 폭소) 그 영화에서 여고생 역 배우와 섹스장면을 찍을 때 감독이 자기는 흥미없는 신이라며 자리를 비웠거든요. 당시 저는 화가 나서 “이봐요 감독님! 어디 가는 겁니까!”라고 소리쳤죠. 감독님이 대사의 내용을 아냐고요? 모를걸요.

-감독은 어떤 신이든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나중에는 화낸 일을 후회했고 스스로 한심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자리를 비운 것도 하나의 연출이 아니었을까 싶었거든요. 감독이란 옆에 없어도 존재감으로 살아 있으니까요.

-연출한 영화에서 쓰카모토 신야, 수오 마사야키, 나카타 히데오, 모리타 요시미쓰 등 많은 감독을 연기자로 캐스팅해 카메라 앞에 세우셨죠? =캐스팅 이유는 조금씩 달라요. 나카다 히데오는 얼굴이 좋아서, 쓰카모토 신야는 연기가 재미있어서, 수오 마사유키 감독은 그가 숭배하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과 일한 여배우가 <도쿄맑음>에 출연한 김에 단역으로 캐스팅했어요. 물론 서로의 영화 현장을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고요.

-감독으로서 그분들과 일하면서 배운 바가 있습니까? =감독은 말이 아니라 에너지로 느끼게 하는 존재입니다. 감독은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구애받는 것만으로도 영향을 끼칩니다. 감독이 신경 쓰는 걸 알면 배우는 거기에 따라 움직이게 되니까요. 모든 감독이 연기지도를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아무 말 없는 감독이나, 그저 “다시 한번!”만 반복하는 감독이라도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으면 동물적 감각으로 전해집니다. 어렸을 때를 돌아봐도, 공부를 못하고 친구가 없는 아이라도 “이 아이한테는 뭔가 있어”라고 느꼈던 상대가 있지 않나요? 단지 일로서만 임하며 “오케이, 오케이” 하는 감독은 어쩐지 쓸쓸하죠. 최악의 감독에게서도 에너지는 느낄 수 있어요. 그것이 내가 일을 까다롭게 고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쁜 경험도, 아니 나쁜 경험이 오히려 더 공부가 됩니다.

-신작을 중국 상하이를 오가며 촬영하고 계십니다. 이소룡을 동경하는 중년 남자로 분하신다고요. =<밤, 상하이>라는 코미디인데, 하룻밤 사이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전부 밤장면으로 이뤄진 영화인데, 감독의 의견이 자주 바뀌어서 “에이, 또 바뀌었잖아!”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다케나카는 보통 불평없이 수긍하는 편이랍니다. 아까 <완전한 사육…>의 경우는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죠.

-배우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 한번쯤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평생에 걸쳐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합니다. 거울을 본다 한들 좌우가 반대로 비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배우는 연기하는 스스로를 항상 바라보아야 하기에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하는 셈이고 그만큼 항상 벽은 존재할 것입니다. 저는 그 벽을 영원히 느끼며 살아갈 것 같습니다. 역으로 벽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한번도 배우로서 이제는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 안착했다고 안심한 적이 없습니까? =이제 50살이 되었기 때문에 남들이 경은?? 전보다 많이 써주는 것 같아요. (웃음) 의자를 빼준다거나 말이죠. 저를 따르는 젊은 배우들이 하나씩 늘어나 수십명씩 같이 밥을 먹기라도 하면 결국 제가 돈내는 입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최근까지 선배들한테 얻어먹는 입장이었는데, 세월 참 빠릅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은 무엇인가요? =저의 어머니는 병약하셨습니다.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서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집에서 돌아가셨죠. 눈을 뜬 채로 숨을 거두신 그 얼굴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마치 인간의 육신이 하나의 물체로 변해버리는 느낌이었어요. 지난해 저는, 520명이 사망한 일본 최대의 항공기 추락사고의 20주년을 기해 제작된 TV드라마에 출연했는데요. 진실을 추적하는 조사관 역을 연기하기 위해 실제 사건에 대한 리서치를 하면서 추락한 시체의 끔찍한 상태를 보고 추락 직전 32분의 블랙박스 녹음을 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끔찍한 간접체험이 매일 꿈에 찾아와 괴로웠습니다. 그 뒤 난 줄곧 생각하고 있어요. 살아 있는 것은, 기적이라고.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의 죽음을 초래하는 전쟁이야말로 최대의 비극입니다. 이런, 어쩐다죠? 어두운 이야기로 끝나버렸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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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시스턴트 소동성, 장근범·통역 이은용, 배승주(이상 마스터클래스), 유성진 장소협찬 전주 동락원, 루갈다원·취재협조 전주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