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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 뒤 시작된 ‘마지막 날들’, <라스트 데이즈> [2]

벌레는 블레이크에게만 달라붙는다

블레이크는 집에 들어가는 대신 온실에 들어가서 삽을 가지고 나온다. 그리고 집 바깥 언덕길을 내려오다가 미끄러진다. 이 장면이 시종일관 반복되는 이 언덕길이 나오는 첫 번째 숏이다. 이 장면은 같은 구도, 같은 위치에서 반복된다. 그러므로 잘 기억할 것. 이 언덕이 나올 때마다 시간은 기묘해진다. 말하자면 시간의 언덕. 그 언덕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기. 이 장면까지 앰비언트 사운드가 단 한번도 빠진 숏이 없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것은 다음 장면에서 아시아와 스캇이 서로 껴안고 자고 있는 이층 방(그런데 이층이 맞을까? 혹시 삼층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 영화에는 계단의 트릭이 있다)을 보여줄 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이 10번째 숏은 이 영화에서 첫 번째 현실적인 디제시스의 장면이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화면과 사운드가 일치한다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그 이층 방에 누워 있는 그들 옆에는 소리를 ‘죽인’ 텔레비전이 켜 있고 그 화면에 태권도를 가르치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때 창문 저 너머에서는 블레이크가 삽으로 땅을 파고 있다. 땅을 파는 것은 거기에 무엇을 숨기거나 찾기 위해서이다. 둘은 동시에 진행된다. 태권도와 땅을 파는 행위. 그 두개의 행위. 말하자면 둘 사이의 연관성, 혹은 유사성. 몸을 통해서 어떤 깨달음으로 가는 길. 거기서 무언가를 찾아낸 블레이크는 그 상자를 들고 간다. 그 상자는 톰 무어 박스이다. 하지만 거기서 꺼낸 것은 와인이 아니다. 부엌에서 시리얼을 꺼내들고 우유를 타던 블레이크는 냉장고에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발견한다. 거기에는 마치 블레이크를 기다린 것 같은 메시지가 있다. “총은 침실 벽장에 있다” 블레이크는 그걸 떼면서 “고마워”라고 대답한다. 누가 그것을 붙여놓은 것일까? 블레이크는 그것이 어떻게 자기에게 보내진 메시지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까?(이 집에는 여러 개의 침실 방이 있다). 총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 왜 고마울까? 편지는 목적지에 항상 도착한다고 말해야 할까? 이 말의 핵심은 모든 편지는 상징적 네트워크 안에서 억압된 메시지의 자문자답이라는 것이다. 블레이크는 자기가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자기가 찾아낸다, 라고 그 장면은 보여진다. 하지만 자기가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자기가 찾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붙여놓은 블레이크와 그것을 찾아낸 블레이크는 반복이 아니라 보낸 자와 받는 자 사이의 전도이다. 그때 블레이크는 벌레가 와서 물었는지 갑자기 자기 목을 찰싹 때린다. 숲속의 집에서 벌레를 쫓는 행위는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행위를 영화 내내 블레이크만 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이 집에 머무는 스캇과 루카스, 니콜, 아시아 중에 아무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혹은 옐로페이퍼 전화번호부 광고 영업을 위해 이 집을 찾아온 테디우스 토마스와 대화할 때에도 블레이크만 벌레를 쫓는다. 왜 벌레는 블레이크에게만 달려드는 것일까? 그가 다른 사람과 무엇이 다르기에 그에게만 달려드는 것일까?

다시 좀더 앞으로. 블레이크는 침실이 있는 방에 와서 벽장을 뒤진다. 그런 다음 여자 슬립으로 갈아입은 블레이크는 총을 들고 다른 방에서 (숏 8에서 텔레비전이 보이고 창문 저편으로 땅을 파던 블레이크가 보이던 바로 그 방) 자고 있는 스캇과 아시아의 방에 와서 총을 겨눈다. 영화 내내 블레이크는 옷을 갈아입고 또 갈아입는데, 그는 마치 그것을 변신하듯이 갈아입는다. 그런데 완전하게 다른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흰 티셔츠와 빨간 추리닝 바지, 여성 슬립, 갈색 재킷, 방한모가 달린 점퍼, 붉은 줄무늬 스웨터, 노란색 줄무늬 카디건, 청바지, 그리고 선글라스를 더하거나 뺀다. 그런데 이 옷은 연속성이 없다. 숏이 바뀌면 앞의 숏에서 없던 옷을 걸치거나 같은 숏으로 되돌아왔을 때 다른 옷을 걸치기도 한다. 거기 어떤 규칙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거기에 의도적으로 어떤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 여기서 핵심이다. 그는 무언가를 계속 벗거나 입는다. 그는 다른 무엇이 되고 싶어한다. 변신이라기보다는 무거운 육신의 겉옷. 옷을 갈아입고 총을 든 블레이크가 아시아와 스캇, 루카스와 니콜이 자고 있는 방을 거닐 때마다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들린다. 물론 그 방에 물이 고여 있을 리가 없다. 그는 아직도 여기 도착하지 못했거나, 그 폭포가 내리는 물가가 그를 부르고 있거나, 혹은 블레이크가 먼저 도착하고 그 소리가 아직 여기에 오지 못했다. 소리로부터 떨어져 나온 블레이크. 그런데 블레이크가 방을 나가자 아시아는 누군가 이 방을 다녀간 것을 느끼고 깨어난다.

블레이크가 계단을 내려오자 벨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벨소리와 함께 물소리가 사라진다. 바깥에 나가 문을 열어보니 옐로페이퍼 전화번호부 광고를 위해 테디우스 토마스라는 사내가 방문했다. 그는 블레이크와 함께 거실에서 고객 만족도 조사를 하면서 계속 광고를 하자고 긴 설득을 한다. 그런데 토마스는 블레이크가 무슨 직업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이상한 상황. 이를테면 커트 코베인을 만나서 광고 영업을 하는데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이미 지적한 사실의 환기. 이때 블레이크는 계속 벌레를 쫓는다. 하지만 토마스에게는 단 한 마리의 벌레도 달려들지 않는다. 블레이크에게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지 않는 냄새가 나는 것이다. 혹은 벌레에게 무언가 유혹적인 것이 있다. 토마스가 떠난 다음 오랫동안 정신을 잃은 블레이크는 가까스로 일어나 다른 방으로 간다. 그리고 그 방문을 닫는다.

일인이역 퍼즐의 힌트

여기까지 블레이크를 쫓아오던 영화가 갑자기 이번에는 아시아와 스캇의 방으로 간다. 그녀는 일어나서 계단을 따라 내려온 다음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보이즈 투 맨의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그 방문을 여니 기대어 있던 블레이크가 쓰러진다(숏 34). 이제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영화는 다시 현관 앞이다. 이번에는 단정하게 옷을 입은 두 청년이 방문한다. 아시아는 스캇을 깨우고, 스캇은 계단을 내려간다. 그때 복도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블레이크의 반복이다. 다만 블레이크 대신 스캇이 그 행위를 반복하고, 도착한 사람은 옐로페이퍼 전화번호부 광고를 하는 테디우스 토마스가 아니라 자신들을 엘더 프리버그라는 동명이인의 쌍둥이이며, 자신들은 말일선교회의 모르몬교이며 선교를 하기 위해 왔다고 소개하는 두 청년이다. 그런데 와인을 권하자 거절하면서 자신들은 와인 대신 물을 마신다는 두 쌍둥이에게 정말 기도하면 예수님을 만나냐고 묻자 한명의 엘더가 “14살 소년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자 머리 위에 두 형상이 나타나 한 형상이 말하길 이쪽이 내 아들 예수이다”라고 복음을 전한다. 이 숏 42는 커다란 텔레비전이 있는 블레이크의 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블레이크가 텔레비전을 켜자 보이즈 투 맨의 <(당신께) 무릎을 꿇고>(On bended knee)가 시작된다. 마치 이 장면은 엘더 프리버그의 대사와 노래의 가사를 이어붙인 것처럼 이어진다. 그런데 이 노래는 스캇을 깨우기 전, 그러니까 벨이 울리기 전, 그러므로 두명의 쌍둥이 엘더 프리버그가 도착하기 전, 아시아가 계단을 따라 내려왔을 때 이미 노래의 중간이 어디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엘더 프리버그는 가겠다고 말하고, 다시 방문해도 되느냐고 묻는다. (숏 45) 블레이크는 노래를 들으면서 기어가다가 문에 기댄다. (숏 46) 그때 문이 열리고 아시아가 들어온다. (숏트 34의 반복) 아시아는 블레이크를 일으켜 세우고 문을 닫고 나간다. (숏 49) 이것은 단지 시간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 편집을 성립시키는 시간의 근거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 두개의 시간이 있다. 하나는 블레이크가 토마스를 만난 다음 방에 가서 음악을 듣다가 쓰러진다. 그것을 아시아가 발견한다. 다른 하나는 아시아가 깨운 스캇(과 루카스)이 쌍둥이 엘더 프리버그를 만난다. 그때 이 두개의 신을 연결하는 것은 아시아지만, 아시아의 행위는 시간적으로 어긋나 있다.

우선 오해할 수 있는 오류의 지적. 이 숏은 진행되었다가 다시 뒤로 돌아와서 같은 시간을 다른 장소에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보이즈 투 맨의 노래는 설명이 안 된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셋 중 하나이다. 하나는 둘 중 하나는 허구이거나 환상이다. 그래서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둘 중 어느 쪽이 허구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없다. 두 번째, 만일 이것이 서로 다른 두개의 시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두신이 있다. 둘은 서로 다른 날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하나의 신을 진행한 다음 이미 선행된 다음 신으로 돌아와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이 계속 진행되는 중 다른 시간의 신이 들어가서 앞의 신의 숏이 다른 신의 숏의 진행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다. 구스 반 산트는 필요 이상으로 블레이크가 토마스와 대화하는 장면을 카메라를 멈춰 세우고 길게 보여준다. 그들의 대화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다. 그때 구스 반 산트는 공간을 지각하라고 긴 시간 동안 보여주는 것이다. 그걸 눈여겨본 다음 블레이크가 토마스와 이야기를 나눌 때와 스캇과 루카스가 두명의 엘더 프리버그와 대화할 때 방의 문이 하나는 열려 있고, 다른 하나는 닫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보이즈 투 맨의 음악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왜 엘더 프리버그와 이야기할 때 열린 문으로 그 음악이 들리지 않는가? 두신은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시간이다. 환기할 만한 지적. 이 영화의 사운드의 제목, ‘지각의 문들’. 그런데 두 번째 생각에 기대어 세 번째 설명이 추가되어야 한다. 내 생각은 이렇다. 만일 블레이크가 두명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까 두개의 시간, 블레이크가 보이즈 투 맨을 듣는 시간과 스캇이 엘더 프리버그와 이야기하는 시간 모두에 각자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다음을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아시아가 나간 다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블레이크는 총을 들고 일어난다. 그런데 다음 장면은 숲에서 온실을 향해 걸어가는 블레이크를 보여준다. 그때 현관에서 스캇과 두 쌍둥이 엘더 프리버그는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숏 54) 그러니까 숏 45(이제 가야겠다고 말하는 엘더 프리버그)와 숏 55(문 앞에서 인사하는 스캇과 두명의 엘더 프리버그)는 서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그런데 두 숏 사이에 문에 기대어 쓰러진 블레이크의 장면이 숏 34에서 보여진 다음 숏 47에서 똑같은 구도로 동일한 내용의 행위로 반복된다. 그 사이에 보이즈 투 맨의 노래가 있다. 블레이크는 온실에 들어가서 두 쌍둥이가 가는 것을 본다. 이때 한명의 블레이크는 소리와 행위가 장소와 육신으로부터 서로 떨어져 있지만 다른 한명의 블레이크는 소리와 행위(와 장소)의 일치를 듣게 된다. 수없는 일인이역의 흔적. 혹은 일인이역의 퍼즐의 힌트.

기이한 공집합의 시간 속 블레이크

그런 다음 세 번째 방문객이 이 집을 찾아온다. 그들은 도노반과 사립탐정(으로 스캇이 추정하는 뚱보)이다. 사립탐정은 진짜 중국인 마술사 칭링푸를 흉내낸 영국인 가짜 마술사 청링수에 관한 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는 이빨로 쏜 총알을 잡는 쇼가 어쩌면 아내의 배신일지도 모르는 죽음으로 끝난다. 코트니 러브에 대한 은유? 하지만 동시에 그보다는 가짜와 진짜 혹은 일인이역의 이야기의 반복이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 안의 이야기. 도노반과 사립탐정이 현관 앞에서 문을 두드리자 스캇이 나와서 블레이크는 없으니 다음에 오라고 말한다. 이제 여기서 네 번째 가설이 필요해진다. 도노반과 사립탐정은 블레이크가 여자친구인 비키와 페이지의 집에 있을지도 모르니 가보자고 말한다(그런데 영화에는 비키와 페이지는 나오지 않는다). 블레이크는 온실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다. 이때 카메라는 작은 온실 안에서 메모하고 있는 블레이크를 360도 회전한다(이런 카메라의 움직임은 영화 전체에서 유일하다). 그러자 온실 저 너머에서 하얀 차를 타고 떠나는 스캇과 루카스, 니콜, 아시아가 보인다. 차가 떠난 다음 블레이크가 온실에서 나온다(숏 64). 도노반과 사립탐정이 탄 차와 스캇과 루카스, 니콜, 아시아가 탄 차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간다. 이 장면은 블레이크의 집, 스캇과 그의 일행이 가는 집, 도노반과 사립탐정이 찾아가는 비키 혹은 페이지의 집이 있을 때 성립된다.

그런데 숏 67은 우리가 반복해서 본 그 계단, 블레이크가 올라왔던 그 계단, 아시아가 내려왔던 그 계단, 스캇이 내려간 계단, 카메라가 서서 바라보는 정면에 화병이 놓인 그 계단, 그 계단을 따라 도노반이 올라오면서 블레이크를 부르는 장면이다. 설명은 둘 중 하나이다. 하나는 비키 혹은 페이지의 집에 가던 도노반과 사립탐정이 다시 돌아와서 블레이크를 찾으며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다른 날 다시 찾아왔거나 혹은 그 이전에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숏 88에서 반복해서 도노반이 블레이크를 부르며 올라오는 장면으로 반복된다. 차이는 이때 도노반은 사립탐정과 함께 계단을 올라온다는 것이다. 숏 67과 숏 88은 둘 중 하나이다. 같은 장면을 반복한 것이거나, 아니면 도노반과 사립탐정은 두번 찾아온 것이다. 만일 반복한 것이라면 숏 68에서 숏 87까지는 무효가 된다. 두번 찾아온 것이라면 이 두번의 방문은 한번 찾아온 다음 돌아갔다가 다시 되돌아온 것이 하나이고(그러므로 연속된 한번의 방문),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두번 방문한 것이다(불연속적인 두번의 방문). 그때 두번 방문했다는 말은 두번이 다른 날이라는 뜻이다.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어려운 이유는 스캇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모피를 두른 비너스>를 듣는 대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포함이 이상한 것은 스캇이 노래를 듣는 시퀀스가 도노반이 계단을 올라오는 두번의 반복 숏 사이에 들어가 있거나 그 역이 아니라 그 둘이 일종의 공집합을 가진 상태로 서로 걸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공집합 안에서 블레이크는 양쪽에 다르게 걸쳐 서 있다.

두 시간의 공존 속 두명의 블레이크

이걸 그냥 뫼비우스의 띠라고 말하면 결국 아무것도 설명이 안 된다. 혹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으려는 포기이다. 이 이상한 공집합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선을 생각하는 것은 두개의 숏 사이를 매개하는 유클리드적 시간으로부터 리만적 시간 안으로 굴곡을 그리는 두개의 세계 사이의 이해이다. 하나는 시간을 세계의 표현으로 다루는 현실태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 세계의 표현된 것이 되는 잠재태이다. 그런데 하나가 다른 하나 사이로 들어가고, 다른 하나가 그 안에서 다시 나온다. 그때 둘 사이의 공집합의 충족이유를 설명할 때 이 이야기가 성립된다. 그러므로 이 순서를 순환이 아니라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의 컷 아웃으로서의 계열의 이동의 방법으로 따라올 것. 스캇과 루카스, 아시아, 니콜이 집을 떠난 것은 숏 63이다. (낮) 그런 다음 그들은 숏 77에서 돌아온다. (밤) 그 사이에 도노반이 계단을 올라온 장면이 있다. (숏 67) 하지만 이 장면은 블레이크가 집 바깥으로 도망친 다음 호수에 앉아 있는 장면으로 끝난다. 도노반은 숏 93에서 다시 계단을 올라갈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노반이 집에 들어온 다음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스캇은 거실에 들어오자마자 벨벳 언드그라운드의 음반을 꺼내 <모피를 두른 비너스>를 튼다. 그리고 앉아서 그 노래를 따라 부른다. (숏 77) 이 숏은 계속 진행되지만 스캇은 음악을 듣다가 일어나서 부엌에 간다. 그런데 부엌에 블레이크가 있다. 그걸 루카스가 본다. 스캇은 부엌에 갔다가 돌아와 다시 음악을 듣는다. 그런데 (음악을 들으면서 앉아 있는 스캇을 보여주는) 숏 79에서 (음악이 끝났는데도 그대로 앉아 있는 스캇을 보여주는) 숏 80은 카메라는 그 위치에 그대로 있는데 갑자기 점프 컷으로 연결하였다. 이게 점프 컷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자세는 그대로인데 음악이 편집으로 잘려나가서 그냥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스캇이 고개를 돌려 부엌을 보니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같은 위치의 시선인데 한번은 스캇과 블레이크가 이야기하는 것을 루카스가 보고(숏 78), 다음번에는 스캇이 같은 장소를 보니 아무도 없다. (숏 81) 그런데 한참 더 진행된 다음 숏 101에서 스캇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같은 자세로, 같은 노래를, 같은 부분을 따라 부른다.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는 방법. 숏 77에서 숏 101까지는 모두 스캇이 <모피를 두른 비너스>를 따라 부르면서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 설명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 그러면 스캇이 집에 도착하기 전에 도노반이 계단을 오른 장면이(숏 67) 반복되는 숏(숏 88)를 왜 스캇은 생각하는가?

나는 질문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노반의 계단이 중간에 들어가 있는 까닭은 숏 77에서 숏 101까지를 보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혹은 그것을 스캇의 회상이라는 방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숏이다. 말하자면 영화에서 말하는 절대적으로 금지의 숏(plan interdit). 여기서 스캇을 중심에 놓고 시퀀스를 나눌지 블레이크를 중심에 놓고 시퀀스를 나눌지에 의해서 의미가 변한다. 물론 둘 다 성립한다. 내 생각에 이 영화가 쇼크를 주는 것은 구스 반 산트가 둘 다 성립되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선형 진행되는 영화에서 현행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둘 사이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도록 금지의 숏을 설정한 다음 그 둘의 공존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하나는 여전히 진행 중인데 다른 하나는 동시에 현재를 경유하여 과거로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때 시간은 규정 가능하지만 끝내 규정되지는 않는다. 규정되지 않는 규정 가능한 시간. 그럼으로써 두개의 시간의 공존. 두개의 시간의 공존 속의 두명의 블레이크.

의상의 연결

우선 스캇을 중심으로 놓고 진행하는 이야기의 선. 스캇은 음악을 듣다가 음악연습실에서 음악적 고민을 말하는 루카스를 불러내서 이층에 올라간다. 그때 아래층에서 블레이크의 언플러그드 기타소리가 들린다. 스캇은 루카스에게 데모 테이프로 블레이크를 괴롭히지 말라고 이야기한 다음 침대에서 껴안고 키스를 한다. (숏 85) 여기서 이 이야기는 일단 중단된다. 왜냐하면 다음 장면은 한밤중에 걸어가는 블레이크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입은 옷은 음악 연습실에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앞, 계단을 올라오며 블레이크를 부르는 도노반을 피해서 집 바깥으로 나와 호수에 혼자 앉아 있을 때 입고 있었던 옷이다. 그런 다음 블레이크는 자기 방에서 방한모가 있는 옷을 입는다. 그런데 그때 도노반이 사립탐정과 함께 블레이크를 부르면서 계단을 올라온다. (숏 88) 블레이크는 달아나고, 도노반과 사립탐정은 아시아와 스캇이 있던 방에서 대화를 나눈다. 말하자면 지금 집에 스캇과 아시아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시간적으로 스캇과 아시아, 루카스, 니콜이 집에 돌아오기 전이다. 즉, 스캇이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듣기 전이라는 뜻이다. 블레이크는 달아나고, 카메라는 블레이크가 화면 바깥으로 나간 다음에도 한참을 그냥 바람에 흔들리는 숲을 보여준다. (숏 93) 도노반과 사립탐정이 차를 타고 떠나고, 그 다음 스캇과 루카스, 아시아, 니콜이 돌아온다(이미 거실에 들어와서 <모피를 두른 비너스>를 튼 숏 74에 시간적으로 선행하는 숏 99).

이번에는 이 이야기가 블레이크쪽에서 진행된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블레이크에게 <모피를 두른 비너스>의 음악소리가 들린다. 블레이크는 음식을 계속 만들고 있는데 스캇이 다가와서 유타에 다녀와야겠다고 말한다. 아마도 숏 78에서 부엌을 바라보는 루카스의 시선으로 보였던 장면을 부엌 안에서 진행한 숏일 것이다. 그 말을 한 다음 스캇은 나가서 <모피를 두른 비너스>를 들으면서 따라 부른다. 음악 연습실에 온 블레이크에게 루카스가 와서 옆의 의자에 앉으면서 도쿄 공연 중에 섹스를 나누었던 일본인 소녀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한 다음 그녀를 생각하면서 만든 노래 데모 테이프를 건네준다. 그때 스캇이 들어와서 귓속말을 하고 루카스와 함께 나간다. 혼자 남은 블레이크는 <죽음에서 탄생까지>(Death to birth)를 혼자서 언플러그드로 부른다. 이 노래는 스캇과 루카스가 침대에서 키스를 하며 껴안을 때(숏 85) 아래층에서 들리던 음악이다. 그러므로 숏 85와 숏 102는 동일 시간이다. 그런데 한밤중에 숲길을 걸어가는 블레이크의 장면은(숏 103) 앞의 숏의 연속이 아니라 도노반이 부르며 계단을 올라오자 옷을 입고 달아나던 블레이크의 장면(숏 91)의 연속이다. 큰 방한모가 달린 점퍼를 입은 블레이크의 모습, 즉 의상의 연결.

블레이크의 기억의 시간

그러므로 이 장면은 스캇이 아니라 블레이크를 놓고 다시 시간을 따라가면 블레이크가 스캇과 루카스와 함께 보낸 마지막 밤을 기억하는 장면으로 놓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블레이크의 기억의 시간 안으로 들어간 것일까? 누구라도 이 영화를 본 다음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말하는 음악 연습실에서 블레이크 혼자 데모 테이프를 틀고 거기에 맞추어서 기타를 치고 드럼을 두들기는 걸 느리게 돌리 트랙 백을 하면서 보여주는 롱테이크 장면. (숏 71) 디스토션을 걸어서 피드백을 일으키는 사운드의 무아지경 속에서(말 그대로 ‘너바나’!) 카메라는 무심하게 점점 뒤로 물러나고, 햇살은 오후 늦게 정원의 풀 위로 떨어지고, 바람은 창문 곁의 나무를 조심스럽게 흔들고 지나간다. 말하자면 영화 사상 음악을 연주하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 그러나 이 장면은 영화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이상하게 진행된다. 하나는 카메라가 뒤로 계속 물러나고 있는데 소리의 물리적 변화가 전혀 없다. 이 소리는 이제까지와 달리 음원을 화면 안에 구체적으로 기입한 사운드이다. 나는 처음에 거의 줌에 가깝게 보이는 이 달리 트랙이 음악으로부터 자연의 소리로 이행하는 카메라의 이동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자연의 움직임은 나무를 흔드는 바람을 통해서 보이지만 여전히 화면에서 들리는 건 방 안의 사운드이다. 사운드의 크기가 동일하다는 것은 이 장면이 지닌 비실재를 보증하는 것이다. 혹은 물리적 거리의 위치가 아니라 이 장면의 고정점이 심리적이라는 것을 들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한 건 이 장면이 뜬금없다는 것이다. 그냥 갑자기 등장해서 느닷없이 시작한다. 내기 보기에 이 장면의 시작점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다. 이 숏은 블레이크가 도노반으로부터 달아나서 집 바깥으로 나간 다음 호수에 앉아 있는 블레이크를 바라본 다음(숏 70) 바로 뒤이어 붙어 있다. 그때 두 장면을 연결하는 매듭은 음악 연습실에서 블레이크가 데모 테이프를 틀어놓고 하는 연주가 호수에 앉아 있는 블레이크가 떠올리는 잃어버린 시간, 이미 있었던 사건, 시간의 흐름 안의 기억일 수밖에 없다. 아니, 기억이라기보다는 말하자면 추억. 그러므로 갖게 되는 상실의 감정. 그때 기억 저편으로 점점 잊혀져가는 이 순간은 카메라가 그 광경으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져나가면서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그때 영원한 것은 내일도, 모래도, 그 자리를 비출 햇살과 바람밖에 없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블레이크의 연주는 데모 테이프에 덧붙여진 것이다. 루카스는 혼자 있는 블레이크에게 데모 테이프의 사연과 함께 건네준 다음 스캇과 함께 이층에 올라가 섹스를 한다. 루카스의 말에 의하면 그 연주에는 가사 말이 없다. 그래서 그걸 좀 도와달라고 말한다. 이번에는 카메라가 방 안에 머문다. 블레이크는 <죽음에서 탄생까지>를 부른다. 그런데 이 노래 부르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롱테이크로 찍었다. 두번의 롱테이크. 두번의 라이브. 연주만 있는 장면과 가사만 있는 언플러그드. 두명의 블레이크. 두 가지 기억. 혹은 한 것과 하지 않은 것. 하지만 어느 쪽이?

영화 밖에서 온 네 번째 방문객

이제 네 번째 방문객을 말할 차례이다. 이 방문객이 이제까지와 다른 이유는 문을 두들긴 다음 집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집 안에 들어와 있고, 그런 다음 문을 열고 나가는 장면은 있지만 집 바깥으로 떠나는 장면이 없다. 자막에는 레코드회사에서 온 사람으로 되어 있지만 블레이크와의 대화를 보면 그녀의 직업을 알 수 없다. 마치 블레이크의 어머니처럼 그를 근심하면서 말하는 대사. 이 영화에서 블레이크의 딸을 유일하게 걱정하는 사람.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사람. 그러므로 영화의 그림자없이 그 사람 자체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등장인물. 구태여 그 자리에 (그룹 소닉 유스의) 킴 고든이 블레이크에게 꼭 그러해야했느냐고 묻는다. 커트 코베인이 자신들의 정신적 음악적 부모라고 말한 그룹 소닉 유스(<라스트 데이즈>의 사운드디자인 자문을 맡은 것은 소닉 유스의 서스틴 무어이다). 말하자면 킴 고든의 방문은 영화 바깥에서 영화 안으로 들어와 막지 못한 과거의 사건에 대한 슬픔을 말한 다음 다시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블레이크가 마지막으로 집 바깥으로 떠나서 작은 도시의 라이브 클럽을 방문했을 때 그를 알아보는 유일한 인물인 하모니 코린이라는 문화적 아이콘과 작별인사를 하는 것과 겹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뉴욕 거리에서 자라나서 19살에 래리 클라크의 <키즈>의 시나리오를 쓴 다음 21살에 <검모>로 이른바 ‘퍽 유’(F@#$ You) 시네마에 합류한 미국영화의 얼터너티브 그런지 세대의 주인공. 하모니 코린은 블레이크에게 목요일에 다시 만나자고 말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할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블레이크는 집으로 힘겹게 새벽에 걸어 올라온다. 그때 다시 물소리가 들리고, 마치 처음으로 돌아온 것처럼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온실에 도착하자 맞은편 집에서 이 집을 떠나는 스캇과 루카스, 그리고 니콜이 보인다. 그들이 떠나면서 도대체 아시아는 어디로 간 거냐고 묻는다. 두 가지 생각. 그런데 정말 아시아가 있기는 있었던 것일까? 다른 하나. 아시아가 있기는 있었다. 그런데 아시아는 중간에 가버렸기 때문에 그 자리에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까 아시아가 나오는 장면은 과거에 속하는 장면이며, 지금 현재 진행 중인 장면에는 스캇과 루카스, 니콜만이 있다면? 한 가지 더. 구태여 아시아가 블레이크를 만진(touch) 유일한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떠나면서 루카스는 온실을 바라보고 거기서 블레이크가 어른거린다. 결국 모두 온실에서 끝난다. 쌍둥이 엘더 프리버그를 보는 블레이크는 온실에 있다. (숏 55) 사립탐정이 이 집을 떠나면서 저기 있는 건물이 무엇이냐고 묻자 도노반은 온실이라고 대답한다. (숏 77) 루카스와 스캇, 니콜이 이 집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루카스가 보는 것은 온실이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숏 112) 결국 영화는 블레이크가 온실에 도착한 다음 이 집을 떠나는 사람들이 온실을 보는 것으로 끝난다. 어떻게 시작해도 결국 온실로 돌아온다. 그런 다음 이튿날 아침 온실에서 한 남자가 죽은 블레이크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죽은 블레이크에게서 그의 영혼이 힘겹게 일어나 계단을 타고 오르는 것이 보여진다.

‘마지막 날들’의 의미

구스 반 산트가 다룬 ‘마지막 날들’은 커트 코베인이 자살하기 직전의 마지막 나날들이 아니다. 잘 알려진 사실. 커트 코베인은 자살을 했고, 그런 다음 며칠 뒤에 발견되었다. 구스 반 산트가 다룬 ‘마지막 날들’은 자살한 다음 그의 죽음이 발견되기까지의 ‘마지막 날들’이다. 말하자면 실재적인 죽음과 상징적 죽음의 불일치. 그 사이의 틈. 모든 미스터리의 시간. 그런데 이 시간에 없는 것은 오직 커트 코베인의 시간뿐이다. 구스 반 산트는 이 시간을 온전하게 커트 코베인을 위해서 바친다. 말하자면 애도의 시간. 블레이크는 영화가 시작했을 때 이미 죽은 다음이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의 육신을 찾으러 돌아온다. 블레이크는 22개의 폭포와 숲으로 이루어진 망자의 강, 삶의 저 편, 말하자면 요단강, 그중 하나를 건너가려다가 되돌아서 다시 돌아온다. 그때 그가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통해서 돌아오는 것뿐이다. 시종일관 영화는 물소리가 들리고 첨벙거리는 사운드가 더해진다. 블레이크는 요단강을 건너고 있는 중이다. 같은 말이지만 다른 표현. 그는 삶의 이편에서 죽음의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중이다. 떠나려다가 돌아온 블레이크와 이제 결심을 하려는 블레이크. 이미 벌이진 사건과 이제 해야 할 결심. 드러난 사건과 잠재적인 심리적 동요. 그러므로 여기에 두명의 블레이크가 있다. 하나는 이미 죽은 블레이크가 자기를 기억하면서 되돌아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자신이 죽은지 모르는 시간 안의 블레이크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시간은 자꾸만 뒤로 돌아가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두개의 시간. 하나는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게 온다. 그때 소리는 블레이크보다 먼저 도착하거나 나중에 도착한다. 다른 하나는 시간 안에서만 활동한다. 하지만 이미 죽은 블레이크는 썩어가고 있고, 벌레들은 그에게만 자꾸 달려든다. 이미 죽은 블레이크는 죽음의 과정을 반복하고, 기억 안의 블레이크는 자기의 운명을 결심한다. 경험과 예정 사이의 차이와 그 안에서 누가 누구를 뒤따르는지 그 순서를 알 수 없는 숨바꼭질. 그때 블레이크가 싸우는 전쟁은 자기의 죽음과의 싸움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전쟁이다. 구스 반 산트는 바로 여기에 개입한다. 블레이크가 자살한 다음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 그가 이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영화적 방법이다. 혹은 윤리적 선택이다. 그러나 죽음은 이미 벌어진 사건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야기의 선은 결국 온실로 돌아오고 또 돌아온다. 말 그대로 영원회귀. 그런데 죽은 다음 다시 돌아와서 자기의 죽음을 알리고 떠나간 죽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말하자면 2천년 만의 반복. 예수의 죽음과 부활. 교회 종소리는 그를 부르고, 그가 하느님을 부르자 교회 종소리가 응답한다. 블레이크와 예수. 두 개의 죽음. 쌍둥이 엘더 프리버그가 말하는 14살 소년의 이야기와 보이즈 투 맨의 노래의 몽타주. 죽어서 사람들 사이에 살아남은 두 개의 이미지. 블레이크에 대한 기억. 커트 코베인에 대한 추모. 구스 반 산트는 그가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더한 간청이 있겠는가?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

나는 구스 반 산트가 <라스트 데이즈>에서 그렇게 멀리 나아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전인미답의 경지. 그가 가장 멀리 나아간 영화는 <게리>이다. 혹은 구스 반 산트는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보다 더 나아가지 못했다. 혹은 허우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에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라스트 데이즈>는 최근 하나의 유행이 된 이야기 패턴 안에서 사고하는 시간의 덫에 관한 사후의 왜상 앞에서 고정점을 놓고 벌이는 게임이다. 사실상 구스 반 산트의 <라스트 데이즈>는 M. 나이트 샤말란의 <식스 센스>,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 클럽>, 브라이언 유즈너의 <유주얼 서스펙트>,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디 아더즈>로 이어지는 일련의 ‘보이지 않는 사람’의 구조를 지닌 영화이다. 그러나 구스 반 산트가 그들과 다른 점은 그는 게임을 하는 대신 시간의 구조에 대해서 사고하는 방법을 놓고 윤리의 기회를 질문한다는 것이다. 블레이크는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때 이 시간의 사슬 안에서 블레이크는 질문한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것보다 죽은 편이 더 나았을까?(커트 코베인의 유서. “잊혀지느니 차라리 불타버리겠다”) 이 질문을 죽기 전에 한 것과 죽은 다음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그때 만일 살아 있는 쪽을 택했다면 잊혀지는 것을 죽은 내가 지켜보아야 한다. 옐로페이퍼 전화번호부 광고를 하러 온 토마스는 이미 블레이크가 누군지 기억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라스트 데이즈>는 두번의 기회에 대한 이야기이다. 블레이크는 두번 죽는다. 한번은 선택하고, 다음 한번은 그 선택을 알고 그 행위를 한다. 구스 반 산트는 그 두 개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선택이 행위를 바라보고, 행위가 선택을 쳐다보는 시간의 만곡 안으로 들어간다. 말하자면 죽음이라는 실재. 어떻게 해서도 윤리적 질문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건. 혹은 윤리의 잉여. <라스트 데이즈>는 어떻게 말해도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그것은 이 이야기가 비극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극이라는 이야기의 선. 그러므로 이 영화가 마지막에 남긴 질문은 이것이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 말의 방점, 차라리.

추신 첫 번째.

나는 지난 4월6일 커트 코베인을 추모하면서 영화아카데미 학생들과 함께 세미나 수업시간에 <라스트 데이즈>를 본 다음 토론하고 생각해보았다. 그 중 몇몇 아이디어는 매우 예민하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들의 지적 중 일부는 내 생각을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그들과 함께 쓴 것이다.

추신 두 번째.

구스 반 산트는 <라스트 데이즈>를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었다. 내용이 다른 것은 아니지만 화면 프레임의 사이즈가 다르다. 하나는 4:3이고, 다른 하나는 16:9이다. 그리고 구스 반 산트는 영화관 상영버전을 4:3으로 명시하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네코아에서는 16:9 버전으로 상영하고 있었다. 그 결과 4:3에서 무작위로 ‘오려낸’ 16:9 사이즈는 양 옆이 더 있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 상단부가 모두 잘려나갔다. 그 결과는 매우 끔찍하다. 이를테면 아시아와 스캇이 자고 있을 때 옆에서 텔레비전 모니터로 태권도 시범을 방영하는 동안 창문 바깥 프레임 상단에서 땅을 파고 있는 그 아름다운 장면에서 블레이크는 모두 잘려나가고 없었다. 또한 블레이크가 옐로페이지 전화번호부 광고를 위해 찾아온 테디우스 토마스와 기나긴 이야기를 할 때 역시 그들 사이 저편 벽에 걸려 있는 사냥하는 그림은 모두 잘려나가고 하단 일부 하단만 화면에 남아 있었다. 내가 이 글에서 참고한 것은 구스 반 산트가 영화관 버전이라고 명시한 4:3 사이즈이다. 만일 당신이 ‘사지절단’된 16:9 사이즈로 보았다면 원래의 그 아름다운 구도를 꼭 다시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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