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
촬영시작 4월15일 제작 영화사 아침·씨네월드 개봉예정 추석
사석이건 공석이건 이준익 감독은 웬만해서 배반하지 않는다. 오늘도 뭔가 유쾌한 명제를 얻어 듣고 가리라, 는 기대감을 이번에도 어기지 않았다. “성격 좋은 게 실력이야”, “스타일은 살기 위한 무기야. 근데 변하지 않는 스타일은 스타일이 아니지” 등등. 성격 좋은 게 실력이야, 같은 말은 새롭지 않은 것 같지만 이준익 감독은 그 하나하나를 몸에 붙여 실전에 응용하며 산다. 최석환 작가와 작품을 줄곧 함께하는 것도 좋은 성격 때문이고, <황산벌>과 <왕의 남자>의 B카메라였던 나승용을 이번에 촬영감독으로 데뷔시키는 것도 좋은 성격 때문이란다. 대체 좋은 성격의 의미가 뭘까?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고 열려 있는 성격이지.” 대단한 걸 가르켜주는 영화학교도 없지만 거기서 배운 몇 안 되는 지식이 얼마나 유용하겠느냐, 는 생각이 출발점이다. 그러니 지식이 없어도 함께 깨지고 구르면서 터득하는 진짜 실력이 중요하고 그러려면 성격이 좋아야 한다는 거다.
<라디오 스타>는 촬영감독이 특히 중요해 보인다. 세심한 내러티브에 미니멀하고 정교한 미장센이 요구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이준익 감독 자신도 궁금해하는 실험이자 변화다. <라디오 스타>는 자신이 한물간 스타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스타 최곤(박중훈)과 그를 일편단심 돌보는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의 이야기다. 80년대 록스타였지만 지금은 도리없이 영월의 지방 방송국 라디오에서 DJ를 해야 하는 상황이 갈등의 출발이다.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기록을 새로 쓴 열기가 식기도 전에 차기작 촬영에 들어가는 이준익 감독은 “부담없다”고 잘라 말한다. 흥미롭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왕의 남자> 크랭크인 전에 다음 연출작으로 선택하게 된 상황도 그렇고 그의 철학이 그렇다.
-언제 어떻게 착상한 작품인가. =<황산벌>과 <왕의 남자>를 함께한 최석환 작가의 아이디어다. 몇년 전부터 자꾸 괜찮다고 하는데 난 안 괜찮았다. 시놉시스를 써왔는데 정승혜 대표가 좋다고 해서 하게 됐다. 감독도 노동자인데 하라고 하면 해야지. 그게 직업정신이지.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에 가듯 그렇게 영화 찍는 거야.
-처음에 내키지 않았던 부분은. =내가 스케일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다. <황산벌>처럼 이야기 사이즈가 커야 한다는. <라디오 스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까 <라디오 스타>는 이야기의 사이즈가 꼭 커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다른 영화적 사고를 해야겠다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왕의 남자>를 보면 내러티브에 대한 과도한 욕심이 보이지 않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이야기꾼의 입장에선 굉장히 중요한 점이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는 볼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사이즈에 대한 문제다. <황산벌>과 <왕의 남자>에선 그 세계관이 커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이 작품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거다.
-휴먼드라마라고 하지만 역시 특유의 세계관과 메시지가 있을 듯싶다. =세계관이라기보다 인간관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최곤과 박민수, 두 주인공의 인간으로서의 내면적 사연들, 감정들, 서로의 존재에 대한 이유들, 그런 구체적인 두 인물간의 관계를 통해서 세계관을 다뤄보는. 하이퍼해졌다고 할까? 미니멀해졌다.
큰 세계관 강박에서 벗어나려 한다
-좌파적 시각은. =여전하다. 퇴행적 좌파가 아니라 생산적 좌파라고 말하고 싶은데 21세기의 경제는 문화까지도 생산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좌든 우든 비생산적인 이데올로기는 의미없다. 20세기는 경제의 생산모드가 워낙 강력하게 굴러갔기 때문에 오히려 생산하지 않는 것이 더 지구상에 도움이 된다는 환경 아나키즘 같은 게 의미있었지만 지금은 문화 자체의 경제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가치가 떨어진다.
-그게 영월이라는 지방도시, 라디오라는 흘러간 매체라는 위치와 상관이 있나. =그렇다. 라디오는 초기 단계의 매스미디어를 상징한다. 백남준이 비디오아트를 시작한 게 사람을 모으는 권력이 이동한 것에 착안한 거거든. 사람들이 전람회, 라디오 앞에 모이다가 TV 앞으로 모이는 변화를 재빨리 포착한 거지. 지금 라디오는 많이 밀려났는데 서서히 온라인 세계에서 매체의 전위가 일어나고 있다. 인터랙티브하게 채팅을 해가면서. 또 지역적 특성을 보면, 저 먼 영월의 지방 방송국에서 마치 낡은 라디오 같은 80년대 록가수가 라디오 부스 안에서 DJ를 한다. 마이너리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아직 인사이더에 접근하지 못한 아웃사이더가 있고, 이탈된 아웃사이더가 있다. <황산벌>과 <왕의 남자>가 전자라면 이 영화는 후자다. 어쨌든 아웃사이더란 점에서 전작들과 이어지는 흐름은 있지만 내러티브는 미니멀하다. 그렇지만 메시지 자체가 작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출구를 찾는 모색인가. =출구를 찾는 건 아니고, 이미 상존해온 소중함이 있는데 그걸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세속적 성공의 징표에 발버둥쳐오다가 어떤 재발견을 통해 세상과 나의 관계를 다시 위치짓는 이야기다.
-영월의 소박한 시민의 사연들 그리고 한물간 록가수와 그를 돌봐주는 매니저의 진한 관계에서 따뜻한 인간애가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쓰리게 뭔가 찔러주고 싶어하는 감독의 스타일과 어울릴까. =영화를 찍을 때마다 어떤 목표점을 가지고 가는데 때론 방향성이 다르다. 이번에 조금 틀었다. 전작들은 찌르기 위해 에둘러가는 이야기라면 이번에는 스스로 비켜서 있는 것에 대한 비애와 회한을 통해 지나온 삶의 사소한 가치에 대한 재발견이다. 툭 쳐서는 아하 나도 그렇지 하는 동의를 얻으려는 거다. 전작들에서 좀 강요가 있었다면 이번에는 동의가 더 어울린다. 내가 가장 가까운 사람과 먼 길을 가야지, 새로운 사람과 성공하는 건 성공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지나온 삶의 사소한 가치에 대한 재발견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떠오르는데 비슷한 정서인가. =회한이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할지 몰라도 난 성질이 급해서 그렇게 찬찬히, 차근하게 가는 정서는 아니다. 나에게는 갓 건져낸 멸치 새끼처럼 파닥파닥 이야기를 전개하는 장점이자 단점이 있다. 이번에는 그걸 좀 지양하고 숨이 긴 호흡으로 가려는 욕구가 있는데 찍어봐야 알지.
-파닥파닥하는 부분은 주로 박중훈의 몫이 아닐까. =그런 요소가 있는데 전부는 아니다.
-코믹한가. =코믹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상황이 그렇다.
-박중훈은 가령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심각한 형사지만 중간중간 장난기 같은 어떤 요소가 감흥을 일으켰는데 정색하고 정극 스타일로 가면 오히려 반응이 떨어졌다. =그렇지. <세이 예스> 같은 거. 그의 유머러스한 개성을 싹 지울 일은 없지만 의도적으로 웃기는 연기는 하지 않는다. 박중훈이란 배우는 다 갖고 있는 배우다. 유머, 애드리브, 정극적 감정 등. 20년 동안 주인공을 했다면 안 해본 연기가 있을까. 다만 박중훈이란 배우의 아우라에 맞출 것인가 아니면 최곤이란 가수의 아우라로 들어올 것이냐지. 그런데 이 가수도 좀 웃기는 인물이다. 그 때문에 본인은 진지해도 상황이 웃기다. 여기선 최곤과 박민수 그리고 주변 인물 사이의 하모니가 관건이지 박중훈의 코믹 요소를 싹 걷어낼 것이냐 잘 살릴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박중훈, 안성기 콤비의 호흡이 좋았다고 보는 작품은? 그리고 그 작품과 이번에 다른 것은. =<칠수와 만수>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인데 세 영화 모두 상황에 대처하는 캐릭터로 본다. 주어진 상황 안에서 자기 캐릭터를 반영한다. 이것과 다른 게 무엇이냐를 찾지 않으면 이 영화를 찍을 의미가 없다. 이 명콤비가 7년 만에 다시 영화를 찍는 건 이야기가 좋아서일까? 꼭 그런 건 아니다. 두 배우가 그동안 접근하지 않았던 관계성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기에 이 소재가 적절하다. 먼 지방 방송국에서 DJ와 매니저를 한다는 것에 담긴 두 배우의 오랜 세월의 때가 필요하다. 세상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노동했던 이들, 그 꿈이 가수이든 감독이든 노동자이든, 20년을 지내며 세상을 버텨냈던 이들의 군상을 통해 세상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거다.
-<황산벌>이나 <왕의 남자>에서도 늘 관계가 중요했는데, 모두 남자들의 관계다. 우정과 애정과 증오가 엇갈리는. 이번에도 비슷해 보인다 =결과적으로 그렇네. 나는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도 우정일 때 더 아름답다고 본다. 서로 마주본다는 건 굉장히 불편한 거다. 자기랑 나랑 인터뷰니까 이렇게 마주보고 있지 며칠 동안 이래봐, 싸움만 나지. 나란히 앉아서 같은 곳을 봐야지.
<왕의 남자>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가겠다
-답을 서로에게서 찾는다…. =상대방을 통해서 나를 보는 이야기지. 상대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나의 욕망을 끄집어내지 않나. 상대방에게 잘하는 이유는 내가 편하기 위해서지. <크래쉬>가 보여주는 건 상대방을 불편하게 보는 인간은 그 자신이 불편해진다는 것 아냐. LA라는 살벌한 도시에서 동시간대에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인간이 서로를 불편하게 보잖아. 백인은 흑인을, 흑인은 아시안인을, 아랍인은 백인을 불편하게 봐. 그러다보니 자신이 불편해지는 거야.
-미니멀하게 들어간다는 건 큰 변화로 보인다. 일종의 시험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돌파할 생각인지. =감각을 시도해보려고. 이전 작품들은 감각에 대한 의지가 거의 없었다. 내러티브의 승부였지. 영화의 기본 물리는 내러티브다. 물리가 허약하고 화학물 덩어리가 되면 그건 영화가 아니라고 봤지. 그래서 센스를 일부러 도외시했어. 내러티브에 손상을 줄 수 있고 영화가 뭉개질 수 있으니까. 좋은 배우는 연기하는 게 아니고, 좋은 카메라는 화면에서 카메라가 의식되지 않는 것처럼 좋은 연출은 연출력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도가 보이면 그건 실패한 연출이라고 봤는데 이제 좀 바꿔야겠어. 왜 그러냐면 내가 해부하지 않은 것을 해부하겠다는 의지니까. 지금의 나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가는 것이 예술이고. <왕의 남자>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가야겠다는 거지.
-감각이란 말도 중요해 보인다. =미장센의 감각, 연기자의 패턴에 대한 감각 등 현장에서 발휘되는 영화의 감각적 요소가 결국 편집을 통해 완성된다. 이 영화에선 편집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현장에서 미리 과감한 방식으로 설정해놓고, 카메라 무빙이나 연기자의 디테일한 디렉션이나 미장센이나 색감 등을 시도하려고 그래. 잘될지는 모르겠는 게 공간적 핸디캡이 있다. 좁은 라디오 부스에서 찍는 것만 50신이 넘는데, 그걸 계속 들고 찍기로 할 수도 없지 않나. 라디오 내부와 외부 사이를 공간 점프를 통해 음악과 아울러 어떤 영화적 세계를 만들 수 있을지 나 자신도 궁금해. 해봐야 알 것 같아. DJ가 전하는 개인의 사연들이 논이든, 도시든, 심지어 인터넷으로 부산, 대구, 광주까지 가는 순간들을 어떤 편집으로 어떤 세계를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 역시 라디오 DJ가 주인공인 <굿모닝 베트남>에서 굿모닝 베트남! 하면 그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베트남 전장터가 좍 펼쳐진다. 공간에서의 아름다운 선율이 오버랩되면서 어떤 이미지를 창출하는 거지. 여기선 한물간 록스타가 전하는 사연이 바깥으로 나가 한반도를 훑을 때 그 화학의 기호가 무얼까 나도 궁금하다.
-해보고 싶은 스타일이 예컨대 <왕의 남자>의 어떤 장면과 가까운가. =연산이 손가락으로 문틀을 치면서 드드득 치고 가는 컷. 그런데 그런 장면을 찍겠다는 게 아니라 장면의 감정을 내러티브화해서 보여준다는 거다. 스타일은 바뀌어야 스타일이다. 안 그러면 매너리즘이지. 스타일은 살기 위한 무기라고. 고정된 이미지가 스타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앤디 워홀이나 데이비드 보위가 20대부터 40∼50대까지 보여주는, 변화하는 스타일이 얼마나 대단해. 그런 게 스타일이지.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지 않으면 죽는다고. 감독이든 기자든.
-<왕의 남자> 다음 작품이란 부담이 크겠다. =난 부담없다. 어차피 다른 영화인데. 인생의 업 앤드 다운이 많았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성공이든 실패든 그 순간에 맞이하는 어떤 현상일 뿐이다. <왕의 남자>도 마찬가지다. 이전에 <공포택시>의 실패도 그 순간의 현상이었지 내 인생이 바뀐 게 없어.
-그러면 <왕의 남자>의 성공은 빚을 갚았다는 변화밖에 없는 건가. =그럼 그게 최고지. 아니, 변화밖이라니. 30억원 빚 갚아봐.
-<왕의 남자>는 정치풍자든 멜로든 보는 각도에 따라 만족감을 얻는 다층적인 면이 있었다면, 이번에 그런 장점은 없는 건가. =<왕의 남자>는 화자가 이동하기 때문에 관점의 소실점이 다면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라디오 스타>는 화자가 이동하지 않고 액션과 리액션을 주고받는 주체가 두 사람 바깥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미니멀하고 컨벤션하지. <왕의 남자>는 네개의 큐빅이 계속 맞물려 움직이는 건데 시나리오를 만드는 게 절대 쉽지 않았다. 내러티브면에서 굉장히 실험적인 영화인데 터져버렸다. 이상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