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나 환상은 없다 대신 익숙한 현실에 ‘깊은 눈’ 그래서 신선하다
에스비에스 드라마 <연애시대>(월·화 밤 9시55분)는 깔끔한 연출과 감칠맛 나는 대사, 빼어난 연기 등 삼박자를 갖췄다. 영화 <고스트 맘마> <찜> <하루>의 한지승 감독이 연출하고 박연선 작가가 노자와 히사시의 소설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70% 정도 촬영을 끝낸 상태에서 첫 방송을 내보낸, 거의 사전제작된 작품이다.
<연애시대>에 견고한 철학이나 고정관념을 뒤엎는 발상이 두드러지진 않는다. 하지만 출생의 비밀 따위의 억지스런 갈등이나 사랑의 환상은 피하고 대신 현실에 대한 철저한 관찰을 채워넣어 신선하다. 현실적인 캐릭터를 내세워, 너무 익숙해서 되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한다.
자신에게마저 소외된 나약한 보통사람들의 자화상 진부한 것과 뜻밖의 것 사이 우리의 일상을 그려낸다
<연애시대>는 헷갈린다. 주인공들은 자신의 진짜 마음이 뭔지도 잘 모른다. 자기가 놓은 덫에 걸려 넘어진다. 아이를 잃은 뒤 “같이 살다가는 진짜로 꼴보기 싫어질 것 같아” 이혼한 동진(감우성)과 은호(손예진)는 물러서지도 다가가지도 못한다. 결혼기념일마다 함께 밥을 먹고 때때로 술을 마신다. 서로에게 미연(오윤아)과 현중(이진욱)을 소개해놓고 잘 될까 애를 태운다. 말은 마음을 배반하다. 항상 꼬고 꼬집고 할퀸다. 그들은 스스로 행동하고 선택하되 사실은 떠밀리는 수동태다. 나약하고 애매한, 주체인척 하지만 자신에게마저 소외된 보통 사람들의 자화상이다.
선택은 현재 시점에서 내려야 하지만 선택권은 기억이 쥐고 있다. 사산의 기억 탓에 동진과 은호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미연은 자신을 사랑해준 의붓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동력 삼아, 자신의 딸에게도 그같은 아버지를 마련해주려고 동진에게 돌진한다. 현중이 은호에게 다가서는 데는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에게 복수하고픈 마음이 숨어있다. 제작진은 순도 100% 운명적인 사랑의 순수성에 의문을 던진다. <연애시대>의 사랑은 기억이 만들어낸 불순한 욕망을 껴안기 때문에 현실적이다.
제작진은 슬픔도 기쁨도 이물질을 끼워 표현한다. 태어난 날이 숨진 날인 아이의 기일. 무덤 앞에 선 둘은 과자를 사오지 않았다고 서로 타박이다.
<연애시대>는 웃긴데 이 웃음은 시청자가 상황이나 심리에 진지하게 몰입하지 않고 한발 물러나 지켜보도록 만든다. 여기에 자잘한 세부 묘사들이 활력을 불어넣는다. 은호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숨기고 마음 속 이야기를 진지하게 꺼낼 때도 아버지는 “미백3종 화장품과 구두 교환권 중 어떤 선물로 드릴까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묻는다. 그렇다고 웃지만도 못하게 만든다. 대사엔 장난기가 가득한데 미래의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듯 흐르는 주인공들의 독백은 슬프다. 깨닳음은 항상 늦되기 때문이다.
<연애시대>는 전형적인 것과 뜻밖의 것 사이 양다리를 걸친다. 이혼한 여성에게 재벌 2세가 매달리는 상황은 진부한 환타지에 기대는 것이다. 하지만 인물들의 반응은 다르다. 은호의 이혼 경력을 꼬투리 삼아 남자쪽 부모가 난리치며 반대해야겠건만 현중의 아버지는 문제 삼지 않는다.
그렇다고 <연애시대>가 ‘사랑은 이런 거야’ ‘이혼에 대한 편견을 버려’ 등 메세지를 전달하는 건 아니다. 제작진의 시선은 관찰자에 머물러 있다. 인물들은 아무도 사악하지 않지만 상처를 주고 받는다. 동진은 “어설픈 친절이 더 큰 상처를 준다”는 걸 알지만 미연의 눈물을 나몰라라 할 수 없다. 나쁘지 않지만 나약한 그들의 사랑과 기억이 삶에 얽혀드는 과정을 제작진은 거리를 유지하며 치밀하게 따라간다.
작가가 말하는 ‘연애시대’
“사랑도 삶의 일부일 뿐”
박연선(34) 작가는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시나리오를 쓰고 <그녀를 믿지 마세요> 등을 각색했다. 그가 생각하는 <연애시대>에 대해 들어봤다.
-원작 소설에서 무엇을 바꿨나? =원작에선 주인공들 감정의 기복이 더 컸다. 하지만 감정을 직설적으로 보이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보통 드라마에선 주인공이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알지만 실제에선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인물 행동에 개연성을 주려고 과거 이야기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원작에선 현중이 은호에게 그야말로 첫눈에 반하는데 이것만으로는 행동이 설명이 안된다. 그래서 현중 아버지와의 갈등을 보탰다.
-슬픔엔 웃음을 섞어넣고, 사랑에도 다른 욕망을 집어넣었는데 =그게 더 일상적이지 않나? 100% 슬프거나 기쁠 순 없다. 실연해도 밥도 먹고 친구도 만난다. 사소한 것엔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지만 큰 충격엔 무뎌진다. 당시엔 실감하지 못하다가 조금씩 잘라 소화하게 된다.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면 드라마는 더 강렬해지겠지만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 밖에 생각 안하는 정통 멜로를 싫어한다. 좋아한다고 100% 계산하지 않는 건 아니다. 사랑 때문에 슬프기도 하고 웃기도 하지만 삶의 한 부분일뿐이다.
-결말은? =해피앤딩도 비극도 아니다.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 정도의 느낌일 것이다. 사는 건 불확실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