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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의 모든 것 [1]
글·사진 이영진오정연 2006-04-27

신상옥을 아십니까. 유현목을 아십니까. 이만희를 아십니까. 김기영을 아십니까. 김수용을 아십니까. 도를 아십니까, 라는 물음만큼 두려운 질문이다. 다섯번 물으면 다섯번 고개를 저어야 하는 상황, <씨네21> 기자라고 해서 일반인보다 나을 게 없다. 한번 따져보자. 우리가 보았던 한국 고전영화는 도대체 몇편인가.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 고전영화는 도대체 몇편인가. 클래식이라는 근사하고 우아한 명명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단절의 역사가 메워지고, 망각의 역사가 복구되고, 침잠의 역사가 부상하진 않을 것이다. 불구와 기형의 몸을 지니게 된 한국영화. 우리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삼류 뽕짝도 불러야 맛이고, 불러야 산다. 그러니 왜 뜬금없이 옛날영화를 보러 갔느냐고 묻지 말고, 거기 가서 뭘 봤느냐고 물어달라. 뭘 보고 뭘 느꼈느냐고 물어달라. 무작정 떠난 길이라 놓친 것도 많고, 흘린 것도 많고, 다시 주워야 할 것도 많다.

쉼없이 뛰는 이들에겐 박수만한 격려도 없다. 아직 한국 고전영화 향연에 응하지 않은, 그러나 언젠가는 고전영화관에 찾아올 우리를 위해 오래된 영화들을 발굴하고, 복구하는 데 진력하는 한국영상자료원의 대표 선수들도 함께 소개한다. 그들은 기꺼이 창고를 열어 미공개 필름과 자료들까지 보여줬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이만희 감독이 생전에 연출한 작품이 50편인지, 51편인지 함께 더듬어봤다. 마지막으로 지난 3년 가까이 한국영상자료원을 이끌어온 이효인의 인터뷰를 더한다.

1. 옛날 한국 영화가 보고 싶다면

“신상옥, 최은희 거는 봐야지. 안 그래?”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1959)를 보기 위해 고전영화관을 찾은 백발의 노인들. “어르신,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묻자 한결같이 그렇게 답한다. 이들 커플이 만든 영화는 뭐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다. 50년 가까이 흘렀지만, 그들에게 신상옥-최은희의 영화는 여전히 품질보증 KS마크인가 보다. 하긴, 두 사람이 어지간한 스타였어야 말이지. 전설의 신필름을 가능케 한 <성춘향>(1961)의 성공 직후 언론은 이들 커플에 대한 소식은 지면을 아끼지 않고 실을 정도였으니까.

언젠가 1960년대 영화잡지를 들춰보다 놀란 적이 있다. ‘식모(食母)가 말하는 신상옥, 최은희 부부’라는 기사였다. 신상옥 감독이 좋아하는 음식은 계란프라이. 최은희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밤 11시. 시시콜콜한 모든 것이 신상옥-최은희라는 이름이 따라붙으면 화제가 됐다. 혹시 그 시절에 극장 나들이가 잦았던 이들이라면, 두 사람에 대한 믿음이 한줌도 줄지 않고 마음속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 누가 아나. 여기 계신 10여명의 어르신들 중 한때 계란프라이를 즐겨 먹고, 밤 11시면 어김없이 수면을 취하는 골수 팬들이 있었을지.

고전영화관 입구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성희(주증녀)가 완벽한 아내가 되기 위해, 미혼모가 될 처지에 놓인 영숙(최은희)이 흠없는 신부가 되기 위해 공모를 꾀하지만 결국 모성애 때문에 두 여자가 한명의 아이를 놓고 다툼을 벌이게 된다는 이야기다. 내 배 아파서 낳았으니 내 아들이요, 내가 핥아서 키웠으니 내 아들이라는 두 여자의 항변 앞에서 당시 관객은 어떤 솔로몬의 판결을 내렸을까. 물론 뒷좌석에 앉은 챙이 긴 등산모를 쓰신 할머니 두분은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최은희가 올해 몇이나 됐을까?”“글쎄. 여든이 다 됐을 텐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장 궁금한 건 신상옥 감독이 직접 붙였다는 영화의 제목이다. 프랑스 원작소설 <아름다운 싸움>을 번안하면서 그는 왜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라고 바꿨을까. 가만, 가만. 영화의 처음부터 살살 더듬어본다. “그 애는 불쌍한 애예요.”“언니는 아무 죄도 없어요. 용서해주세요.” 성희가 영숙에게 총질을 한 사건으로 인해 감옥과 병실에 각각 격리 수용된 두 여자는 어찌된 일인지 상대를 변호하기 바쁘다. 혹시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라는 두 여자의 변호는 ‘남자들의 죄가 아니냐?’는 추궁은 아닐까. 그러고보니 영숙을 괴롭히던 호색한의 능글맞은 얼굴이 떠오른다.

가끔 먼지 잔뜩 묻은 현대사 책들이 긴요할 때가 있다. 1955년 박인수 사건. 70여명의 여인을 농락해 혼인빙자간음죄로 법정에 서 지탄을 받았던 박인수가 호색한의 모델은 아니었을까. 댄스홀에서 익힌 춤솜씨와 수려한 외모로 여대생까지 울게 했다는 박인수처럼, 호색한도 댄스홀을 들락거리며 여대생이던 영숙을 꾀어내지 않았던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할 수 있다”며 박인수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법원의 결정이 당시 여성들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을 터. 신상옥 감독은 그런 분위기를 간파하고 영화를 제작한 건 아니었을까.

2. 그 당시 영화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튿날 영상자료실부터 찾았다. 자료원이 펴낸 1950년대 <한국영화를 말한다>를 뒤져보니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는 한국영화로는 드물게 단성사에서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고 적혀 있다. 당시에 한국영화는 단성사는 꿈도 못 꿨는데 외화 수급에 문제가 생기자 신상옥 감독의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을 걸었고, 예상치 못한 흥행에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도 뒤이어 걸렸는데 예상 못한 연타를 쳤다는 것이다. 이때 벌어들였던 돈은 신필름이 사활을 걸었던 <성춘향> 제작비에 들어갔고, 익히 알려져 있듯이 <성춘향> 베팅은 대성공을 기록했다. 이 해 신 감독의 한해 세금 납부액은 무려 10억환.

<춘몽>(1965)을 보기 위해 지하 고전상영관으로 내려왔는데 북적북적하다. 이러다 매진? 상영시작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는데, 대충 봐도 50명은 되어 보인다. 상영관 프로그래밍을 맡고 있는 김한상씨가 곁에 와 단골 관객을 귀띔해준다.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사진 찍는 게 싫다며 다들 사절이다. 학창 시절, 극장 출입하다 머리 깎인 아픈 기억이 많아서인가. 어르신들은 ‘극장 구경’이 무슨 자랑이냐며 손사래다. 전날과 달리 젊은 관객도 꽤 눈에 띈다. 평일 낮시간치고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싶어서 물었더니, 표 받는 직원이 “<춘몽>은 상영한 적이 많지 않아서 그렇다”고 일러준다.

70분 길이의 불완전판. 그러나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주린 욕망의 시선들이 첫 장면이 펼쳐지자 데굴데굴 바삐 구른다. 치과에 들렀다 미모의 여가수를 보게 된 가난한 화가가 마취 주사를 맞고서 춘몽에 빠져드는 장면은 그야말로 끈적끈적하다. 드릴 소리와 여가수의 클로즈업된 분절된 신체가 번갈아 들리고 보일 때는 저 남자처럼 나른한 춘몽에 빠져들고 싶은 유혹도 인다. 남자의 귀에 들리는 여자의 신음소리. 마침 “딩디리∼딩디리∼딩” 하는 소리가 울린다. 다른 영화 같으면 눈총을 받았을 어떤 할머니의 휴대폰 전자음. 그런데 신기하게도 <춘몽> 같은 실험영화에는 꽤 어울리는 효과음처럼 느껴진다.

<춘몽>은 여배우 박수정이 전라로 연기했다고 해서 유현목 감독이 3만원의 벌금형을 받은 영화. 그런데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7인의 여포로>의 이만희 감독을 두둔한 일 때문에 그는 문제의 장면을 자진삭제 한 뒤에 또다시 음화제조라는 죄를 뒤집어 쓰게 된다. 외려 검열관들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겠다고 가위 들고 나섰다면, 의사를 남자의 꿈속에서 여가수를 착취하는 악덕 포주로 그린 불온한(혹은 당연한) 설정을 문제삼아야 했던 것 아닐까. 의사는 의사일 뿐이라고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단, 검열관들이 똥인지 된장인지 명확하게 구별할 만큼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들은 아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춘몽>에 관한 이런저런 뒷이야기를 당시 영화잡지에서 찾아보러 영상자료실에 다시 올라간다. 근데 훑어보니 <영화세계>는 달랑 1962년판밖에 없다. 국회도서관이나 국립중앙도서관을 찾아가야 하나. 일단 심심풀이 삼아 1962년판이라도 뒤져보는데, 꽤 재밌는 문구가 있다. 사실 잡지란 잡스런 게 맛이다. 낙서(落書) 코너. “제작자 셋이 모이면 마작을 하고, 흥행사 셋이 모이면 섰다를 하고, 감독 셋이 모이면 술을 마시고, 남배우 셋이 모이면 당구를 치고, 여배우 셋이 모이면 나이롱 뻥을 한다, 는 소문 아닌 소문이 돌고 있다.… (중략) … 이로 인해 죽어나는 건 스탭들이다. 하루 촬영이 이틀이 되고, 이틀 촬영이 사흘이 되고.”

옛날 영화잡지들을 보면 선진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데서 오는 열패감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웃자고 하는 농담도 웃어젖힐 수만은 없다. ‘4월 바보 날에 읽는 영화용어신사전’을 보면, 스크립터는 촬영기간 중 감독과 스탭들의 외상값을 기록하는 사람, 콘티는 감독이 호텔비를 탈 수 있는 유일한 구실이 되는 작업, 액션은 주인공은 제아무리 얻어맞거나 총에 맞아도 죽지 않고 단역이나 조연은 주인공에게 한대만 얻어맞아도 꺼꾸러지는 마력의 동작이라고 적고 있다. 영화제는 조상을 모시지 않는 국제 제사로서 모인 사람들끼리는 떡 대신 트로피를 나눠먹는 괴상한 습관이 있다며, 심사의 공정성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고전영화관 4, 5월 상영 스케줄

이번 봄나들이는 고전영화관으로~

영상자료원이 5월에 있을 ‘영화천재 이만희’를 중요하게 준비하고 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영상자료원 고전영화관은 이 밖에도 평균 6개의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꼼꼼히 찾아보면 말로만 듣던 한국 고전영화를 관람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4월은 바람난 여자와 꽃미남을 만날 수 있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선’은 영상자료원이 보유한 최고(最古) 한국영화 <미몽>(1936)과 <자유부인> <제트부인> 등을 통해 각 시대의 자유분방한 여성들을 소개하고, ‘주말의 명화’는 <위험한 청춘> <유혹> 등을 통해 신성일과 오영일 등 전 세대의 청춘스타를 보여줄 것이다. 5월에 있을 이만희 전작전을 기다리며 준비한 내실있는 프로그램으로 ‘한국영화의 시간여행’이 있다. 이만희의 <귀로>와 홍상수의 <극장전>, 이만희의 <마의 계단과>과 김지운의 <장화, 홍련>을 상영한 뒤 이를 비교하는 심층 강좌가 진행된다. 5월에는 놓쳐서는 안 될 특별 프로그램들이 눈에 띈다. 본능적인 감수성으로 시대적 아픔을 영화에 담았던 이만희의 영화 22편과 함께 다양한 GV가 준비된 ‘영화천재 이만희’는 물론이고, 어린이날을 맞아 1980년대 초반 어린이 관객을 사로잡았던 <신서유기>의 김종성 감독이 만든 한·중 합작영화 <손오공 대전 홍해아>를 상영하는 특별한 기회가 마련되어 있다. 5월 첫주 ‘주말의 명화’는 재평가받아야 할 한국 액션영화로, 전문가들이 손꼽는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과 <오사까의 외로운 별>을 상영한다. <최후의 증인>은 지난 1월 한 차례 상영한 이후 관객의 연이은 재상영 요구가 현실화된 것으로 오승욱, 류승완 감독과 김영진 평론가의 애정어린 대담까지 마련될 것이다.

4월부터 5월까지 ‘클래식한국영화릴레이’는 <사르빈 강에 노을진다>(정창화)부터 <갯마을>(김수용)까지 1965년작 15편을 상영하고, ‘해피투게더, 독립영화’에서는 <오! 꿈의 나라> <송환> 등 의미있는 독립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자세한 상영 스케줄은 영상자료원 홈페이지(www.koreafilm.or.kr)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