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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에로, 할리우드 키드를 만나다
2001-08-22

심산의 충무로작가열전 31 유지형(1948∼ )

정확한 시대배경은 알 수 없다. 다만 가난에 찌든 화전민 마을이 나오고 취발이탈을 쓰고 흥겹게 노는 산대놀이패도 나오는 걸로 보아 일제시대가 아닌가 싶다. 첫사랑의 사내가 금광을 찾아 떠나자 분녀는 스스로 제 욕정을 참지 못하여 마을 남정네들을 두루 거친 끝에 읍내 작부집으로 나간다. 그리고 이후로도 계속 고단한(?) 남성편력과 인생유전을 겪은 다음 마을로 돌아와보니 산에는 온통 저 홀로 익어 터진 산딸기들이 그득하다. <애마부인> <빨간 앵두>와 더불어 끝없는 속편행진을 계속해온 에로영화 <산딸기>의 스토리라인이다. 1980년대 초반의 섹스심벌 안소영이 주연을 맡은 것은 제1편뿐이고 이후로는 선우일란-강혜지-소비아 등으로 그 바통을 이어가는데, 스토리상의 연속성도 없고 여주인공의 직업 역시 사당패-약장수 북녀-신딸 등으로 바뀌어가지만, 남달리 욕정이 강해 한 남자에게 정착하지 못한다는 캐릭터만은 동일하다. 비평에서는 외면을 받았지만 변두리 극장가와 비디오대여점에서는 열렬한(!) 지지를 받은 향토에로물 <산딸기> 시리즈의 작가가 유지형이다.

시나리오 데뷔작은 코믹터치의 따뜻한 로드무비 <연분홍치마>. 서세원이 재능없는 기타리스트로, 김민희가 부모를 찾아 헤매는 천진한 소녀로 나온다. 이듬해 유지형은 과 <영자의 전성시대>의 속편들을 쓴 다음 김수형 감독과 손잡고 <산딸기> 시리즈를 발표한다. <산딸기>의 히로인 안소영을 사슴목장을 경영하는 농염한 여주인으로 등장시킨 <암사슴>이 제작된 것도 같은 해이다. 1980년대 초반에 이처럼 에로영화들이 대량생산된 것은 전두환 정권의 자유화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1985년 역시 김수형 감독과 함께 만든 에서는 강수연이 연극배우 지망생으로 나와 열연을 펼친다. 1983년작인 <비련> <김마리라는 부인> <바람 바람 바람>은 모두 삼각관계를 주축으로 하는 낡은 형식의 멜로영화들이다.

<각설이 품바타령>의 주연이 심형래였다고 하면 단순한 코미디를 연상하겠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어이없는 짓을 일삼고 구성진 장타령을 늘어놓는 이 각설이가 사실은 만주로 독립군자금을 운반하는 중책을 맡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흥행에 성공하여 이듬해 그 속편격인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만들어지는데 이번에는 임하룡까지 가세한다. 남기남과의 또다른 작품인 <흑룡통첩장>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무협물이고, <심형래의 탐정큐>는 현대코미디다. 좌충우돌의 어리숙한 탐정 역을 맡은 심형래의 연기와 남기남 특유의 에드우드식 연출이 찰떡궁합이다. 1987년에 유지형은 자신의 주특기인 향토에로물 <됴화>로 감독 데뷔식을 치른다. 어머니가 출산 도중에 도화나무 가지를 부러뜨리는 바람에 괴력에 가까운 성적 능력을 갖고 태어난 한 여인의 남성편력기를 다룬 내용인데, 강수연과 이대근이 스크린을 후끈 달굴 만한 운명적인 맞대결(!)을 펼쳐보인다(이 영화를 꼼꼼히 살펴보면 현재 충무로를 주름잡고 있는 스탭과 배우들의 무명 시절을 엿보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됴화>의 흥행실패로 한동안 작품활동이 뜸했던 유지형은 1990년대에 들어와 수준높은 작품들을 잇따라 내놓는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널리 알려진 안정효의 장편소설을 각색한 작품. 정지영 감독 및 그의 연출부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썼는데, 높은 흥행성적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평단의 찬사를 한몸에 받은 수작이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에 미쳐 살다가 영화와 현실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른 병석이라는 캐릭터는 모든 충무로 키드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기도 하다. <금홍아 금홍아>는 1930년대의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야수파 화가 구본웅, 초현실주의 시인 이상, 카페의 여인 금홍의 기이한 삼각관계와 그 파국을 다룬 작품. 퇴폐와 허무를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식민지 지식인들의 방황과 고뇌를 언뜻언뜻 내비치는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구본웅 역의 김수철과 이상 역의 김갑수의 연기도 좋지만 금홍 역을 맡은 이지은의 연기가 단연 돋보여서 그해에 열린 거의 모든 영화제에서 신인여우상을 독차지했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81년 김원두의 <연분홍치마>

1982년 김수형의 <산딸기> ⓥ ★

1983년 정인엽의 <김마리라는 부인> ⓥ

1984년 남기남의 <각설이 품바타령>

1985년 남기남의 <심형래의 탐정큐>

1987년 유지형의 <됴화> ⓥ

1991년 하주택의 <여자는 추억 속에 집을 짓는다>

1994년 정지영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 ★

1995년 김유진의 <금홍아 금홍아> ⓥ

ⓥ는 비디오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