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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 소년의 실존적인 불안, <피터팬의 공식>

부조리한 세계에서 성장의 공식을 찾아가는 <피터팬의 공식>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피터팬의 공식>이라는 제목에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공존한다. 수학 공식에 맞춰 정해진 답만을 찾아내는 피터팬을 상상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듯, ‘피터팬’과 ‘공식’의 만남이 성장 과정에서 마주쳐야 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다. <피터팬의 공식>은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성장의 공식을 갖추기도 전에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19살 한수의 고통을 현미경 같은 카메라의 시선에 몽환적인 판타지를 뒤섞으며 포착해간다. 설익은 청춘들이 성장하며 겪는 고통이야 여러 성장영화에서 반복되는 설정이지만, <피터팬의 공식>은 좀더 근원적이고 실존적인 불안과 고통으로 파고들고자 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이 작품은 한국 성장영화의 클리셰인 대입에 대한 압박감과 가족의 해체, 10대 후반 특유의 심리적 소외감 등을 보여주면서도, 이를 인간 태초의 불안, 즉 탯줄을 끊음과 동시에 세상 어딘가에 내던져진 실존적인 불안에 맞닿게 함으로써 일반적인 ‘성장영화의 공식’과는 다른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중의 압력에서 극복의 공식 찾기

고등학교 수영선수인 한수는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은 노려볼 만하고, 대학에 몇명의 동료를 달고 진학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기껏해야 아시아 최고밖에 더 되겠냐’고 소리치며 수영을 관두기로 결정한 날, 한수는 어머니의 자살 기도라는 비보를 전해 듣는다. 어머니는 ‘인생이 그냥 허무했다’는 내용과 함께 그동안 숨겨온 생부의 주소를 적은 편지를 남겨두고 목숨을 끊으려 한 것이다. 이후 병원은 병원비를 재촉하고 카드회사는 밀린 카드값을 독촉한다. 물론 그 몫은 한수의 것이다.

<피터팬의 공식>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한수를 외부의 압력과 대면시킨다. 식물인간이 된 어머니를 간병하는 병원에서는 보호자로서의 지위를 반복적으로 상기시키고(“보호자는 너뿐인가?”), 코치와 동료들은 수영을 관둔 그에게 찾아와 협박과 읍소를 반복한다. 한수가 수영을 포기한다면, 그가 대학에 진학할 때 묻어가야 할 처지에 있는 동료들의 미래는 막혀버릴 것이고, 계약 만료가 얼마 남지 않은 코치의 미래는 더욱 암담해질 것이다. 한수의 전부였을 어머니와 수영, 어쩌면 19살의 불안정한 삶에 버팀목이었을 이들이 한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짐으로 돌변해버린 것이다.

물론 어머니의 보호자가 된 것도, 코치와 동료들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것도 한수가 택한 것이 아니다. 한수는 그저 어머니의 아들이었고, 물이 좋아 수영선수가 됐을 뿐이다. 이는 한수 어머니처럼 코마 상태로 누워 있는 또 다른 어머니를 돌보는 미진(옥지영)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렇게 맺어진 관계들이 자신을 구속하는 그물임을 알게 된 순간,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짐임을 깨닫는 순간, 한수는 그 부조리한 상황에서 어른으로 진입하는 문지방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으로 한수에게 주어진 난제가 끝난 것이 아니다. 한수에게는 외부의 압력을 이겨낼 공식만큼이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점차 거세지는 내면의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공식이 필요하다(<피터팬의 공식>은 내부의 압력에 의해 고통받는 한수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외부와 내부, 이중의 압력에 놓여 있는 한수는 외부 현실문제의 타개책으로 편의점을 털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넣어 사멸시키고자 하는 죽음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피터팬의 공식>이 이중의 압력에 처해 있는 한수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어른 되기의 공식이 아닌, 그 공식을 찾는 과정이 얼마나 큰 고통을 동반하는가이다.

부조리한 세계과의 조우, 자궁으로의 회기 본능

한수는 앞으로 나아가려 시도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부조리한 현실을 피해 네버랜드를 찾아 헤매는 인물에 가깝다. 한수에게 수영장의 물은, 그리고 영화의 첫 장면에서 제시된 등대의 불빛이 가로지르는 그 넓은 바다는, 자궁에서 분리돼 낯선 세계에 내던져진 대가인 근원적 불안이 사라진 일종의 네버랜드이다. 영화의 초반부 한수가 수영장의 물속에서 천천히 춤을 추듯 움직이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한수가 자신의 몸을 의탁할 수 있는 그 물은 바슐라르가 말하는 ‘모성으로서의 물’과 유사한 느낌을 전해준다. 하지만 모성으로서의 물이 한수에게 평온함을 선물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한수를 완전하게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한수가 ‘기껏해야 아시아 최고밖에 더 되겠냐’고 소리치며 수영을 그만두는 장면처럼, 물은 한수에게 더할 나위 없는 어머니의 품이지만, 동시에 그가 결코 넘어설 수 없을 듯한 한계를 부여하기도 한다. 꽉 막혀 있는 수영장을 벗어나 바다를 헤엄쳐 ‘출입금지’된 ‘통제구역’인 등대섬으로 나아가려 할 때도 그는 실패하고 되돌아와야만 한다.

평온함을 주면서도 한계를 부여하는 물의 양면성은 한수가 회귀하고자 하는 자궁의 이미지에서도 반복된다. 이중의 압력에 처한 한수에게 주는 선물인 양, 여고의 피아노 교사인 인희(김호정)네 부부가 옆집으로 이사 오고, 그녀는 한수에게 연민을 느낀다. 인희는 한수에게 피아노 연주를 통해 물속에서와 같은 평온함을 선물하기도 하고, 그의 성기를 잡고 자위행위를 해주기도 하며, 부재하는 어머니를 대신하기도 한다. 하지만 곁에 있는 듯 부재하는, 자위행위는 해주면서도 섹스만큼은 완고하게 거부하는, 함께 놀러나갔다가도 남편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정확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인희는 그 정체를 알려주지 않는 모호한 세상과도 닮았다. 하지만 한수는 그녀의 모호함을 파악할 수 있는 공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어른 되기를 강요하는 부조리한 세계와 인희의 모호한 세계에 가로막힌 한수는 자궁으로의 회귀 본능에 빠져들 뿐이다. 한수가 그녀의 다리를 부여잡고 “들어가게 해줘요”라고 절규할 때, 인희는 매몰차게 거절한다. 금지된 네버랜드 앞에서 한수는 다시 한번 무너진다.

<피터팬의 공식>에는 한수가 어머니의 몸을 닦는 장면이 두번 재현된다. 첫 장면에서 한수는 어머니의 얼굴을 닦고, 가슴을 닦고, 발목을 닦지만 어머니의 성기 앞에서 그의 시선은 돌려지고 손은 멈추어 선다. 그리고 성기에 거즈를 대고 시선을 돌린 채로 몸을 닦는다. 어머니의 성기는 한수의 근원이자 회귀의 종착지이지만, 한수의 시선(지식)은 그로부터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한수는 두 번째 몸을 닦는 장면에서, 자신이 태어난 그 근원의 장소를 바라보며 흐느낀다. 그리고 인희에게 찾아가 “들어가야 된다”며 외친다. 인희의 거부 이후, 아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아버지를 찾아가 유전자 확인서를 불태워버린다. 한수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대리자, 그리고 아버지 모두에게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의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어쩌면 이 순간 한수는, 자신이 회귀하고자 하는 그곳이, 내밀한 만족을 주는 무언가가 있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의 근원의 장소가 실제로는 허하게 메말라 있음을 깨달은 것일 수도 있다(인희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불임으로 설정된 것은 이러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한수의 자궁으로의 회귀 본능은 부조리한 상황에서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 충동이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존재를 사멸시키려는 죽음 충동의 이명이라는 점에서 치명적이며, 때문에 이는 위험한 ‘성장의 공식’이다. 오히려 그것의 인정이 고통을 동반한다 하더라도, 아이들을 위한 네버랜드에는 어른의 자리가 없다는 것, 회귀 본능을 일으키는 실존적 불안은 결국 자신의 일부라는 것, 자신이 태어나면서 끊긴 탯줄은 다시 이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다.

한계에 정면으로 맞서는 ‘성장’

이후 <피터팬의 공식>은 마술 같은 장면의 교차, 즉 식물인간이던 어머니가 천천히 일어나 병실 문을 열고 샤워장으로 향하는 장면과 잠겨진 수영장의 문을 열쇠도 없이 열고 들어가는 한수의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어머니는 한수가 어머니의 품처럼 느꼈던 물속에 몸을 맡기고, 한수는 물이 사라져버린 텅 빈 공간을 옅은 미소로 응시한다. 그리고 다시 그는 ‘수영장의 문을 열고 나와 병실 안’으로 마술처럼 들어선다. 이 일련의 몽환적인 장면의 의미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특히 영화의 후반부는 확정된 의미로 텍스트가 닫히는 것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다만 수영장의 물이 사라져버리는 두려움으로 인해 항상 스타트가 늦었던 한수를 상기한다면, 물이 사라진 초라한 수영장(풀 속에 널브러져 있는 레인들은 탯줄을 연상시킨다)을 옅은 미소로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한수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넌지시 내비친다.

어머니가 비워놓은 침대에 옷을 벗고 누워 창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던 한수는 어느덧 등대섬을 향해 헤엄쳐 나아간다. 텅 빈 바다의 등대섬만이 우뚝 서 있던 영화의 첫 장면과 대조되는, 그리고 영화 중반에 바다를 헤엄치다 도중에 멈춰서야 했던 한수의 모습과도 대조되는 이 엔딩은, 한수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한계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피터팬의 공식>은 여성이 남성 판타지를 위한 수단처럼 느껴지는 위험성이 감지되고, 도식적 상징이나 정돈되지 않은 듯한 일련의 판타지들이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처럼 영화 엔딩에서 인물의 행위가 지속되기를 기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어느 동굴에서 느닷없이 발견된 고대 문자처럼 수수께끼 같고 모호한 느낌을 주는 <피터팬의 공식>을, 그리고 한수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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