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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순수한 열정

영화로도 만들어진 오가와 요코의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주인공은 10살난 아들을 둔 미혼모 파출부다. 소설은 그녀가 교통사고로 기억이 80분만 지속되는 노년의 수학자를 보살피면서 교감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인상적인 대목은 일상의 피곤한 노동에 찌들어 있던 여자가 수학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약수, 소수, 우애수 등 숫자에 숨어 있는 비밀을 알아가면서 그녀는 전에 몰랐던 삶의 환희를 느낀다. 설거지와 청소와 얄팍한 월급봉투와 집주인의 잔소리로 이뤄졌던 생활에 수학은 봄의 왈츠처럼 울려 퍼진다. 수학공식이 절묘한 화음이 되어 메말랐던 영혼을 적시는 단비가 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일요일 저녁마다 <도전! 골든벨>을 보신다. 50문제 가운데 한두 문제도 못 푸실 텐데 언제나 <도전! 골든벨>을 보는 어머니가 늘 신기했다.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도전! 골든벨>은 어머니에게 일상이 제공해주지 못하는 어떤 정신적 풍요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심야에 TV를 틀었다가 <신비한 해저괴물 대왕오징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어린 시절 <소년중앙>에서 봤던 그놈이 나오나보다 싶어 채널을 고정했다. 심해생물인 대왕오징어는 살아 있는 상태로 포획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다. 다큐멘터리는 살아 있는 대왕오징어를 만나기 위한 어느 과학자의 분투를 담고 있었다. 대왕오징어가 산다는 심해까지 내려갈 방법이 없기에 과학자는 대왕오징어 유체를 발견해 성체로 길러낸다는 계획을 세운다. 뉴질랜드 근해에서 과학자의 연구팀은 대왕오징어 유체를 발견하고 기뻐한다. 거듭되는 실패를 딛고 그들은 유체를 기를 방법을 강구해낸다. 그러나 며칠을 버틴 대왕오징어 유체는 끝내 사체로 떠오른다. 결론은 인류가 살아 있는 대왕오징어를 만날 길은 아직 요원하다는 것. 하지만 그래도 이 과학자는 대왕오징어를 만나기 위한 연구를 중단하지 않으리라는 것! 왜 이 과학자는 대왕오징어에 매달리는가? 설마 대왕오징어를 양식해서 인류의 식량난을 해결하자는 건 아닐 것이다. 그저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 그를 집념의 사나이로 만든다. 거기엔 가슴 뭉클한 순간이 있다.

<스윙걸즈>

<린다 린다 린다>

최근 개봉한 <스윙걸즈>와 곧 개봉할 <린다 린다 린다>도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다. 스윙을 하는 재미에 빠져든 시골 소녀들과 학교 축제 공연을 위해 밤새 연습하는 밴드의 소녀들. 그들이 하는 스윙이나 록은 파출부가 빠져든 수학공식이나 과학자가 쫓는 대왕오징어랑 다르지 않아 보인다. 돈을 버는 것도,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도 아닌 어떤 활동이 그들을 열정적으로 만든다. 경제적 이익이 개입하지 않는 순수한 열정인 것이다. 하긴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만큼 그런 열정에 빠지기 쉬운 때도 없다. 어른이 되면 순수한 열정은 쉬이 생활고에 휩쓸려 쓰레기통에 처박힌다. 다시 말하면 학교를 다니는 시절이야말로 뻘짓을 해도 큰 탈이 없는 시기인 것이다. 아, 그러나 우리는 학교에서 뻘짓하지 말라는 협박에 얼마나 주눅들어 지냈던가. <스윙걸즈>와 <린다 린다 린다>는 청춘의 빛이 바로 그런 뻘짓에 있다고 말하는 영화들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영화가 좋다. <린다 린다 린다>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사진에 찍히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어서이다.

P.S. 올해로 11회를 맞는 <씨네21> 영화평론상 공모 알림기사가 이번호에 실렸다. 올해도 재능있고 의욕 넘치는 신예 평론가를 여럿 발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원고마감은 4월18일까지이고 제출서류는 알림지면에서 확인하시길. 우리는 당신의 순수한 열정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