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늘, 권상우 주연의 <청춘만화>에는 그들이 연기 수업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반듯한 여교수는 학생들에게 달래(김하늘)의 연기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지적해보라고 한다. 지환(권상우)이 시답잖은 지적을 하자 교수는 “학생은 누군가? 처음 보는 것 같은데”라고 묻는다. 지환이 자신을 소개하고 장면은 곧 끝난다. 별스러울 것도 없는 장면이다. 그러나 여기 등장한 선생님은 참으로 별스러운 분이다. 이영란은 실제로 경희대 연극영화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자, 극단 목토를 이끄는 수장이다. 단편 <세라진>과 <로스트 앤 파운드>, 장편 <꽃잎> <태극기 휘날리며> 등에 출연한 이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청춘만화>에 아주 잠깐 등장한다. 혹 다른 장면이 더 있었나. =그 뒤로 ‘본격적’으로 야단치는 장면이 있었다. “다시 한번 해봐.” “아니야!!” “너 그렇게 소리만 지르면 되냐? 네가 거기 있질 않잖아! 없으면서 있는 척 설쳐?” “자, 다시 한번 해보자.” “(책상을 꽝 내리치면서) 아니야아!!” 왜 빼버렸는지 불만이다. 연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려주는 장면인데. 내가 너무 세서 그랬나.
-실제로 학생을 가르칠 때의 모습과 영화 속의 모습을 비교하면 어떤가. =비슷하다. 학교에서는 굉장히 무섭고 엄한 선생으로 찍혀 있다. (웃음) 옛날엔 제자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농도 짙은 몸 연기를 가르칠 땐 학생들을 코너로 몰고, 굴리고, 패가면서 세뇌시켰다. 집중된 에너지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나 자신이 그런 에너지를 갖고 있을 때라 가능했던 것 같다. 지금은 좀 풀어주고 놔주고 저절로 흘러가게 하는 편이다.
-<꽃잎> <태극기 휘날리며> <로스트 앤 파운드>에서 어머니 역을 맡았는데. =한국에서 나이 많은 여자에게 줄 역이 그것밖에 없는 거지. 독립한 건지 소외된 건지, 여성인지 아닌지, 어떻게 이 세상을 마주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는 40∼50대 여성 캐릭터가 한국영화에 어디 있나. 다 엄마지.
-<세라진>에서는 존재 자체가 사라진 듯한 늙은 매춘부를 연기했다. =처음 영화에 대해 들었을 때는 겁이 나더라. 내가 전혀 익숙지 않은 문화여서. 가서 만나보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들이 용납할까? 처절한 삶의 현장에 영화 찍겠다고 그러고 다녀도 되는지도 의문이었다. 감독에게 매춘이라는 것을 일상적 맥락으로 확대해서 표현하겠다고 했다. 허함… 쓸쓸함…. 세라진은 몸을 팔았지만 사람들은 양심, 영혼, 그보다 더한 것도 팔지 않나.
-준비하고 있는 일들이 있으면 얘기해달라. =늘 해온 안티미스코리아페스티벌 기획회의 중이고, 곧 전주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 특강에도 참여할 거다. 여성감독이 만드는 저예산 장편영화에도 출연하기로 했다. 달리의 작품세계를 다룬 초현실주의적 연극도 준비 중이고, 페미니즘 연극도 있고. 연말까지 스케줄이 꽉 차 있다.
-엄청난 에너지다. 어디서 힘이 나오나. =허무에서 나온다. 아무것에도 의미두는 게 없으니까 닥치는 대로 하는 것 같다. 일밖에 믿을 게 없다. 나 자신도, 다른 사람도 못 믿지만 일은 한 만큼 결과를 준다. 일과 만나는 게 가장 짜릿한 오르가슴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