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매혹되기엔 너무 값싼,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지식인 사회 풍자에도, 여성 욕망 주체화에도 실패한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이 영화는 첫째, ‘지식인을 조롱하는 영화’가 아니다. 둘째, ‘모호하고 매혹적인 여성에 관한 영화’도 아니다. 주변부 떨거지인 그들을 지식인이라 하기엔, 아직까지 ‘지식인’이란 말이 아깝고, 그녀에게 매혹되기엔 그녀가 너무 싸구려다. 영화는 그녀를 닮았다. 겉으론 ‘교수’라는 직함에 외모도 그럴싸하지만 천박한 정신에 자아도취가 전부인 그녀처럼, 영화 역시 그럴듯한 제목에 세련된 포스터와 예고편을 내세우지만, 형편없는 주제의식과 자의식 과잉이 전부이다. 시(詩)를 읊고 살짝 다리를 저는 설정처럼 영화 또한 온갖 형식미학을 어수선히 차용하고, 적당히 언밸런스하고 깨는 듯한 편집을 통해 짐짓 예술영화인 척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첫 장면이 중요하다. 사진 찍는 수녀들의 시선이 머무는 바닷가 여인은 두개의 텍스트를 연상시킨다. 하나는 지방성(地方性)을 화두로 삼는 <무진기행>이요, 다른 하나는 히스테리아를 화두로 삼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이다.

주변부 떨거지들에 대한 ‘허수아비 논박’

<무진기행>의 ‘무진’은 실제 지명이 아니다. ‘안개가 특산물인 항구’이자, ‘서울과 대비되는 곳’의 의미로 지어낸 이름이다. ‘심천’ 역시 실제 지명이 아니라, 서울이 아닌 지방 소도시의 의미로 지어낸 것이다. <무진기행>의 주인공이 무진에 내려와 처음 만나는 것은 ‘잘 차려 입고 지적(知的)이라는, 미친 여자에 대한 수군거림’이다. 이것이 작가가 잡아낸 ‘지방성’의 첫인상이다. 영화의 첫 장면, 대도시에선 바닷가에 성장(盛裝)한 여자가 서 있는 것이 구경거리가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녀들의 주시는 지방성의 징표이다.

환경단체 사람들은 지방방송 TV출연을 대단한 일인 양 여기고, 그녀 역시 “TV스타” 운운하며 자아도취에 빠진다. 리포터가 아니라 PD라는 말에 표정이 바뀌고, 상대를 그럴듯하게 보아 동침한다. PD는 “SBS와 SBC가 다를 게 뭐냐?” 대들지만, 곧 “여기 PD가 PD냐?”며 반문한다. 그나마 서울에서 내려가는 박 작가는 “지방 전문대에서… 애들 가르쳐”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환경단체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PD는 의식은 하되 인정하려들지 않으며, 박 작가는 자연스럽게 인지하는 ‘지방성’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교수’니, ‘선생’이니, ‘작가’니 높여부르지만, 서로를 비웃고 서로의 진성성을 의심한다(“콤플렉스 때문”, “단체엔 연애하러 오나?”, “개나 소나 다 교수”).

<무진기행>의 그들도 그랬다. “무진에선 누구나 타인은 모두 속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내가 대학 다닐 때’를 말끝마다 붙이는 음악선생에게 <목포의 눈물>을 청해 들으며, 그녀를 둘러싼 애정관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녀 역시 유행가나 듣는 그들을 경멸하면서, 애정관계를 이용해 ‘결혼’이든 ‘서울행’이든 뭔가를 얻고자 한다.

여기서 ‘지방성’을 거론하는 것은, 지방 사람들을 폄훼하기 위함이 아니다. 영화가 ‘그들’에게 조롱의 시선을 보낼 때, 과연 무엇에 대한 풍자가 되는지를 문제 삼는 것이다. 그들이 ‘중심부 지식인’이 아니기 때문에 비판의 화살은 ‘지식인들’의 심장부에 꽂히지 않고, ‘주변부의 지식인인 양 구는 떨거지들’에게 빗맞는 것이다. 풍자는 어설픈 ‘허수아비 논박’이 될 뿐이며, 이로써 중심부 지식인들은 표적을 빠져나간다.

<경마장 가는 길>에서 문학박사이자 비평가인 그녀가 사실은 동거남에게 논문을 얻었고, 동거 사실을 숨긴 채 시집을 가고자 돈을 지불한다는 이야기는 지식인 사회에 대한 폭로가 된다. 그러나 심천대 염색과(대사 “뭐 그런 과도 다 있냐?”) 교수인 미혼녀가 주변의 지인들과 돌아가며 연애를 한다 한들 무슨 풍자가 되는가? <선데이서울> 기사거리도 안 된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베스트셀러 작가와 톱스타의 데뷔전 이야기는 스캔들이 되지만, 만화가(대사 “만화 안 보는 사람들은 모르지”)와 지방대 교수의 중학 시절 유명하지도 않은 일화가 무슨 흥밋거리가 되는가? 시에 대한 조롱은 <넘버.3>의 베스트셀러 시집 <스물아홉, 섹스는 끝났다>에서 이미 끝났건만, 아마추어 시인인 그녀를 내세워 무슨 변죽을 울리는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나 <음란서생>이 발칙했던 건 그들이 단순한 양반 나부랭이가 아니라, 중앙의 최고권력층이었기 때문이다. ‘황우석 박사 파문’과 ‘국회의원 성추행’이 실시간인 시대에 지식사회와 중심부 권력에 정조준하지 못하고, 어디다 시시한 총구를 겨누는가? 그래도 제일 깨끗해 보이는 환경단체를 조롱한 건 신선하지 않냐고? 이미 수년 전 존경받던 환경단체장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 포커스도 맞지 않고, 신랄하지도 않으며, 시대에도 뒤처진 솜방망이 헛손질이 불쌍할 뿐이다.

‘모호한 대상’이 아닌 ‘뻔한 그녀’의 히스테리아

<프랑스 중위의 여자>의 시작, 영국 해변가에 서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 그녀에 대한 소문은 프랑스 중위의 ‘창녀’이며, 미쳤다는 것. 그러나 귀족 청년은 그녀의 지성과 모호함과 특별한 사연에 매혹된다. <여교수…>의 첫 장면, 바닷가의 그녀를 보고 “죽이지 않냐? 다리까지 저니까 진짜 죽이지 않냐?” 그녀에 대한 수군거림. 교수란다. PD가 그녀에게 매혹되는 지점은 외모와 살짝 장애와 교수라는 직함이다. 훨씬 얄팍하다.

<프랑스…>에서 그녀의 수치스러운 과거는 아예 ‘창녀, 미친년’이 됨으로써 사회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그녀 스스로 꾸민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선택하여 그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는 말로 귀족을 매료시키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게 만든다. <여교수…>의 그녀에게 수치스러운 과거는 사실이지만, 그녀는 들통날까봐 전전긍긍한다. 그녀는 과거로부터도 현재로부터도 사회제도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과거의 그녀는 일찌감치 섹스를 하게 된 여자였지,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자는 아니었다. 외부적으로는 남자친구에 의해 교환 양도되기도 하고, 스스로도 이긴 남자와 섹스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만큼(“니가 이겼다며?”) 남성 중심의 성관계를 내면화한다. 그녀의 섹스는 남자들간의 힘의 논리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녀의 의지나 취향에 달려 있지 않으며, 그녀의 프라이버시는 언제이고 남자친구 앞에서 고해져야 하는 것이다(“했냐?”). 그녀는 남자의 전리품이다. 성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성적자기결정권을 가지고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상대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한다는 것이지, 그저 문란하다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그녀 역시 여왕벌이 아니다. 환경단체 남자들 모두와 시간차를 두고 섹스를 한 듯한 그녀는 그들의 공공연한 치근거림을 받는 상대이다. 그들은 서로 질투하며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여러 명이 그녀와 자고 싶어하니까 그녀에게 지배권이 있는 것 아니냐고? 천만에. 그녀는 그들의 정욕과 경쟁심의 ‘대상’이요, 매개항일 뿐이다. 그녀가 진정으로 그들을 지배한다면, 그들은 그녀가 누구와 자든지 감히 상관할 수 없어야 한다(<바람난 가족>에서 황정민의 애인이 딴 남자와 있을 때, 황정민은 사과하고 돌아간다). 그녀 뒤를 캐는 유 선생을 그만두게 하지 못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여러 남자와 섹스를 할 뿐 그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까놓고 말하면 유 선생의 유언처럼 “네가 갖든지, 형이 갖든지, 돌려서 처먹든지”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녀는 사회제도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PD라는 직함에 호감을 표하고 섹스를 한 뒤 아이로부터 “엄마 없다”는 대답을 유의미하게 듣는다. 유부남과 관계를 가지면서 부인의 존재 유무에 여전히 신경쓰는 것이다. 그러다 부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피한다. 유 선생이 PD에 대해 묻자 “결혼할 사람”이라 대답하고, 유 선생이 폭로하겠다고 협박하자 쩔쩔맨다. <프랑스...>의 그녀가 결혼제도의 바깥에 스스로를 위치시킴으로써 자유로웠던 것에 반해 <여교수…>의 그녀는 결혼제도 자체를 완전히 부인하지 못한다.

<프랑스…>의 그녀가 수치스러운 과거를 만들어 모호한 매력으로 삼았듯이 <여교수…>의 그녀는 장애를 만들어내어 매력으로 삼는다(“다리까지 저니까 진짜 죽이지 않냐?”). 남다은도 지적하듯(<씨네21> 545호 ‘욕망을 배신하라, 스타일을 배신하라’) 그녀가 다리를 저는 증상은 히스테리아이다. 그 증거로 불편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하이힐을 고집하는 것을 들 수 있다. 히스테리아는 ‘증상에 대한 무관심’이 특징이다. (또 감독은 인터뷰에서 “약간의 장애가 있는 여자는 남자들이 보호해주고 싶어한다”고 말한 바 있다.) 가습기에서 썩은 냄새가 난다는 환후(幻嗅) 역시 히스테리아 증상으로 볼 수 있다. 환후는 적개심의 표현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히스테리오닉 성격장애(hysterionic personality disorder)임을 알 수 있는데,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고 주목받기를 원하며, 여학생에겐 심하게 질투를 느낀다. 또한 언제나 ‘개인극장’ 안에서 배우인 양 연극적으로 말하며, 이따금 팜므파탈처럼 차갑게 지시하고, 심한 욕설을 내뱉는 것도 전형적인 증상이다.

그런데 그녀가 히스테리아적 주체라고 말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남성중심 사회에서 언어화되지 않은 욕망이 신체언어로 발화한다고 말할 때, 즉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고 할 때, 그 언어는 누가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프랑스...>에도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여성의 신경증에 관한 의학 논문과 판례 등이 작품에 삽입되어 있고, 그녀를 ‘남자를 조종하고 이용하는 악녀’로 진단하는 신경증적 분석이 나오지만, 결론적으로 그녀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의 입으로도 그녀의 행동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녀는 미스터리로 남는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시점의 문제이다. <프랑스…>가 전지적 작가 시점을 구사하다가 중요한 순간에 1인칭 시점을 끼워넣듯이 <여교수…> 역시 특이한 시점을 보여준다. 대개의 영화들이 3인칭 시점이고 드물게 1인칭 시점이 활용되는 반면, <여교수…>의 장면들은 2인칭으로 구성된다. 시점숏을 대부분 정면응시로 처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이들을 대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녀를 2인칭으로 봄으로써 그녀를 3인칭, 객관적 관점으로 환원하여 설명할 필요를 폐기하고자 한 것일까? 마지막까지 그녀는 자신의 증상을 관객 눈앞에 늘어놓으며 스스로 ‘play’(놀다, 연기하다)할 뿐,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과연 그녀의 몸은 붉은 꽃이요, 그녀의 자궁은 미궁이다. 즐!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