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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2] - 새로운 이슈
박혜명 2006-04-05

동정없는 세상의 여성들

신선한 이슈, 매우 구체적인 이슈들로 여성문제를 재조명하는 영화들을 모았다. 세계 최초의 여성 비행기 납치범의 다큐멘터리는 우리에게 새로운 고민의 지점을 남긴다. 아프리카 특별전 섹션의 일부 다큐멘터리는 경제문제와 여성의 노동이라는 고질적 문제를 재점검하고 있다. 당신은 여성 복서의 다큐멘터리를 보며 스포츠업계에 일반화된 여성성의 상품화 논리에 분노하다가도 이슬람 가부장 체제 속에 일반화된 여성 차별과 폭력을 법적 처단하는 통쾌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순간 환호할 것이다.

흰 셔츠의 남자를 길바닥 위에 사정없이 때려눕히는 아이들이 보인다. 발길질과 주먹질이 멈추지 않는다. 피범벅된 남자에게서 암전되는 화면. <삶의 한 방식>(A Way of Life/ 엠마 아산테/ 영국/ 2004년/ 91분)은 이렇듯 잔인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열돌 된 아가를 둔 열여덟살의 미혼모 레이 앤은 엄마로서의 생존 본능과 철없는 10대의 반항기로 뒤섞여 있다. 무직의 레이 앤은 열악한 경제 사정을 극복하기 위해 또래 여자아이를 유부남에게 팔아넘기는 사악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유부남과 흥정까지 해서 받아 챙긴 돈으로 레이 앤은 아기와 따뜻한 밤을 보낸다. <삶의 한 방식>은 10대 미혼모의 삶에 어떤 동정도 설득도 구하지 않는다. 레이 앤이 처하는 마지막 상황은 사회적 처벌이라기보다 수많은 10대 미혼모들에게 닥칠 적나라한 비극일 뿐이다. 탈색된 듯한 화면 위로 영화적 꾸밈없이 거칠게 달려가는 드라마가 끝내 무기력한 충격을 남긴다.

<삶의 한 방식>

<길라네>

<삶의 한 방식>이 성장드라마라는 소재를 통해 10대와 모성을 동시에 이야기한다면 <길라네>(Gilaneh/ 락샨 바니 에테맛, 모흐센 압돌바합/ 이란/ 2005년/ 84분)는 가족드라마를 소재로 모성을 들추어내는 영화다. 이란-이라크 전쟁을 배경으로 한 <길라네>의 제목은 1남1녀를 둔 늙은 여자의 이름이다. 그녀는 임신 중인 딸 메이골이 폭격당한 테헤란에 두고 온 남편을 찾아가겠다 하자 딸을 걱정해 동행한다. 강제 징집되어 반신불수로 귀향한 아들도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어머니의 내리사랑이다. 그 사랑이 현실에 지쳐간다. 자기 자신을 위해 할 것이 남지 않은 삶의 내리막길에서 길라네는 눈앞의 언덕을 덮은 모래바람을 마치 전쟁 중 포화가 일으킨 먼지구름인 양 쳐다본다. <삶의 한 방식>과 <길라네>는 모두 현실이 안겨다주는 고통을 모성애로 극복하려다 실패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다.

아프리카라는 낯선 대륙의 어머니들은 또 다른 종류의 현실과 투쟁한다. <셀베>(Selbe/ 사피 파이/ 세네갈/ 1983년/ 30분)와 <메디나의 여성들>(Women from the Medinah/ 달릴라 엉나드르/ 프랑스/ 2001년/ 60분)은 노동에 시달리는 여성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각각 세네갈과 모로코라는 지역 차가 있고 20여년의 시간 차가 있어도 이 두편의 다큐가 보여주는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음을 관객은 인지할 필요가 있다. 무기력, 무능력한 남편 대신 젖먹이를 등에 업고 곡물을 빻고 조개를 잡고 마른나무들을 모으는 세네갈 촌구석의 여성들. 그리고 몸을 팔거나 불법 이민으로 아들들을 먹여살리는 모로코의 여성들. 엄마는 아이들을 버릴 수 없고 가난은 그들에게 남자들이 해야 할 노동의 몫까지 족쇄로 채웠다. “남편과 아이를 빼고 당신의 이야기를 해봐요”라는 화자의 질문에 모로코의 여성은 대답한다. “죽을 때까지 사는 거예요.” 철창처럼 꽂히는 뙤약볕 아래 세네갈의 여인은 마을에 내다팔 소금을 거두며 말한다. “내가 의지할 건 이 두팔밖에 없어요.” 생존 본능밖에 남지 않은 삶. 남편 찾아 도시로 나갔다 빚져서 고생하고 돌아온 여인 셀베 곁에서 어린 아들이 노래한다. “엄마, 영혼을 가진 엄마, 포기하지 말아요. 포기하지 말아요.”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

<셀베>

어머니이기 전에 대의를 위해 투쟁하는 여성도 있다. <비행기 납치범, 레일라 카흐레드>(Leila Khaled Hijacker/ 리나 마크보울/ 스웨덴/ 2005년/ 58분)는 올해 서울여성영화제에 만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다큐 중 하나일 것이다. 팔레스타인 하이파 태생의 레일라 카흐레드는 1969년 로마행 비행기를 납치한다.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 소속인 그녀는 이 사건으로 세계 최초의 여성 비행기납치범이 되었고, 팔레스타인을 향한 세계의 주목을 얻는 데 성공했다. 팔레스타인계 스웨덴인인 감독은 그 시절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 레일라 카흐레드를 찾아 나선다. 6번의 성형으로 얼굴을 바꾸고 요르단에 거주하는 카흐레드는 테러의 비정당성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나는 무고한 시민은 죽이지 않았다. 세계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주목하길 원했을 뿐이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자유를 위해 싸울 뿐이다(freedom fighter).” 그녀는 두 아들과 남편을 둔 평범한 주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여전히 강경책이 필요하다고 믿는 투쟁가다. 이 다큐는 카흐레드가 여성이라는 점보다 과연 테러는 정당한가라는 질문에 더 큰 방점을 찍는다. 폭력적 수단이 정당하다고 믿는 투쟁가가 여성이라서, 이 다큐가 던지는 질문은 훨씬 복잡하고 까다롭다.

아프리카의 부족간 투쟁을 가상역사화한 극영화 <그 밤의 진실>(The Night of Truth/ 판나 나크로/ 프랑스, 부르키나파소/ 2004년/ 100분)도 폭력의 정당성을 묻고 있다. 대통령이 속한 나약족과 저항군 세력의 보나데족이 오랜 유혈투쟁을 종식하기 위해 평화협정을 맺던 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두 부족 모두에게 잔인한 상처로 남을 이 유혈사태 뒤에야 평화는 얻어진다. 여성이 주체가 되는 영화는 아니지만 저항파 지도자의 부인이 남긴 말이 인상적이다. “평화를 만드는 것도 남자들이지만, 전쟁을 벌이는 것도 남자들이죠. 여자는 부엌에나 가 있으라는 거고요.”

강력 추천 2편

법정에서 링 위에서, 그녀들은 싸웠다

<법조계의 자매들>(Sisters In Law/ 킴 론지노토, 플로렌스 아이시/ 영국, 카메룬/ 2005년/ 104분)

카메룬의 여성 검사 베라와 여성 재판관 베아트리스가 펼치는 정의로운 법정 스펙터클. 그녀들은 유아강간범, 아내를 상습 폭행하는 남편, 어린 조카를 상습 폭행하는 여자 등을 법과 지혜로 심판한다. 정의감에 불타는 이들은 혐의를 부정하는 괘씸한 피기소자들을 추궁하고 꾸짖는다. 이들은 법정 안에서만 활약하지 않는다. 승소해 돌아간 피해자들이 이후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방문해서 살피고 격려한다. 문제가 생기면 언제라도 찾아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범법자들도 사후 방문해 위로한다. <법조계의 자매들>은 단순한 이상적 휴머니즘의 전시가 아니라 부당한 사회 현실을 공동체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대학교수이기도 한 베아트리스는 가정폭력 사건에서 승소한 두 여자를 강의실에 초청한다. “지난 17년 동안 내 법정에는 가정 폭력을 고발하는 사건이 없었습니다. 이분들은 그 일을 처음으로 해낸 사람들입니다.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남녀 법학생들이 박수를 보내며 고맙다고 인사한다. 두 여인이 환하게 웃는 순간, 우리는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본다.

<밀리언 달러 블랙 다이크>(Knock Out/ 테사 부르허만, 사무엘 레이지허/ 네덜란드/ 2004년/ 53분)

레즈비언 혼혈 복서 미셸 아보로의 이야기. 21전21승18KO라는 놀라운 전적의 전도유망한 선수 미셸 아보로는 자신의 소속사인 대형 스포츠 에이전시 유니버섬으로부터 돌연 계약 파기를 당한다. 사유는 ‘프로모션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것. 실력을 갖추는 것은 기본이고 여성성을 상품화하는 전략에도 동승해야 살아남는다는 게 스포츠업계 여성 선수들이 처한 현실이다. 여자 선수들의 경기는 기본적으로 남자 선수들의 경기보다 인기가 없고 시청률을 잡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라고 에이전시는 변명한다. 아보로과 같은 소속사인 레지나 할미치는 이에 동의함으로써 현재도 활약 중인 스타 복서가 됐다. 그녀는 아슬아슬한 비키니 차림으로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낼 뿐 아니라 가슴을 드러낸 반신 누드 화보도 찍었다. 아보로의 대전 상대였던 루시아 리지커는 흑인도, 백인도, 히스패닉계도 아닌 애매한 외모 때문에 상품화 과정에서 좌절을 겪은 경우다. <밀리언 달러 블랙 다이크>는 스포츠계를 움직이는 마초이즘과 자본의 논리에 희생당한 여성을 대변한다. 아보로는 굴복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내가 이뤄온 것을 잃고 싶지 않다.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일 것이다.” 영화적 이미지의 차용과 스타일리시한 편집으로 보는 재미까지 더해주는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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