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후 옥상>은 <품행제로>나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형’들과 친하고 싶어하는 학원드라마다. 애들이 성장의 아픔을 겪건 말건, 성장을 하건 말건 관심없는 탓에 학원드라마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나다. 그럼에도 <방과후 옥상>을 보러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던 건 ‘손만 대면 풍비박산-손해를 부르는 마이너스의 손’이라는 카피에 혹했던 탓이다. <프록터의 행운>의 프록터나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의 테드처럼 운없는 인간들은 언제나 나를 흥분하게 만든다.
대단히 학구적인 세미나와 실험을 동반해- 상황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외국인 엑스트라까지 동원하는 섬세함!- 남궁달의 ‘불운증후군’을 웅변하려는 첫 장면의 거북스러운 과장은 다소 김빠지게 했으나 남궁달이 병원에서 나오면서 영화의 상태는 상당히 호전되는 듯했다. 학생부실에 끌려가기 위해 교사에게 대들고 학생부실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자해공갈의 공력을 높여가는 남궁달의 눈물겨운 분투는, 불운의 질은 다르지만 어쨌든 테드나 프록터에 대적하는 라이벌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사뭇 설레는 느낌까지 전해줬다.
그러나 주먹짱 재구 일당과 강당에서 만나면서 영화는 삐리리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문제는 남궁달이 걸린 ‘불운증후군’이 아니라 이 영화가 걸린 ‘감동증후군’이라는 걸. 요사이 한국 코미디영화에 무지막지하게 퍼지고 있는 감동증후군이란 영화의 종반까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웃기려고 난리를 치다가 마지막에 가서 관객에게 서둘러 감동이라는 정체불명의 선물을 하나씩 안겨주려고 몸부림치는 병이다. 감동증후군의 징후로는 1분 전까지 천진난만, 깜찍발랄하던 주인공이 갑자기- 그 연유를 이해할 만큼의 시간도 흐르지 않는 사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국민윤리 교과서에서 막 튀어나온 인물처럼 변한다는 것이다.
남궁달은 테니스장에서 촐싹거리던 친구의 국민윤리 교과서적인 훈계를 듣고- 아니 걔는 또 언제 그렇게 변한 거야?- 갑자기 눈물 글썽이더니 변신 로봇처럼 정의감 넘치는 학생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감동, 감동의 도가니탕.
코미디영화를 보러 가면 무대인사 나온 배우들에게서 꼭 듣는 한마디. 웃으시다 보면 가슴 뭉클해지실 거예요. 왜 꼭 웃다가 감동을 받아야 하나. 정녕 관객은 감동을 받기 위해 <투사부일체>나 <구세주> <방과후 옥상>을 보러 간단 말인가. 한국 관객이 경제적이어서 영화 한편을 보며 두편을 본 효과를 얻고자 하는 건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소망한다. 감동없는 코미디영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