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무시무시하고 지적이며 예술적인 하네케의 화살, <히든>

2005년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미카엘 하네케의 <히든>은 앞서 국내에 소개된 <퍼니게임>과 <피아니스트>만큼 오감과 이성을 후벼대지 않지만, 의문들이 끝까지 지속되는 스릴러 속에 개인적 죄의식과 사회적 죄의식을 동시에 질문하는 틀거리가 여전히 무시무시하다.

TV문학토론 프로그램의 사회자로 대중적 인기가 높은 조르쥬(다니엘 오테이유)는 중산층 주택, 중산층 자동차, 중산층 친구 등을 지닌 지적 부르주아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아내 안느(줄리엣 비노쉬)와 아들 역시 이에 걸맞은 ‘수준’이다. 그들에게 비디오테이프 하나가 배달돼온다. 집 정면을 고정된 카메라로 응시하며 자신들의 출입을 그저 지켜보는 롱테이크가 전부다.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이 명백한 메시지에 조르쥬와 안느가 불안해하는데, 이어지는 비디오테이프와 그림이 명백한 상징을 띠기 시작한다. 테이프와 그림이 상기하는 건 조르쥬의 40년 전 과거다. 사리 판단이 온전하기 힘든 여섯살의 나이에 타인에 대해 저지른 작은 차별의 경험이다. 부모가 입양하려던 알제리 소년 마지드에게 불쾌감과 위협을 느끼던 소년 조르쥬는 모종의 음모를 꾸며 알제리 소년을 고아원으로 가게 만든다. 성인 조르쥬는 거듭되는 악몽으로 잊고 있던 죄의식을 상기하지만 반성하지는 않는다. 조르쥬 자신과 가족의 안위가 새로운 위협에 노출돼 있다는 의식이 먼저다. 여섯살 때나 지금이나 조르쥬의 고민과 선택은 자신만의 가족 지키기에 있다. 조르쥬는 테이프가 안내해준 곳을 찾아가 그 과거와 대면하고 과거와 이어져 있는 더 큰 불행을 ‘겪는다’.

조르쥬는 “겪었다”고 아내에게 말하지만 사실 타인의 불행에 대한 ‘목격’일 뿐이다. 목격만으로 불행을 나눌 수 있을까.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였던 알제리인들이 1961년 파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다 200여명이 경찰들의 손에 학살되고, 센강에 던져진 실제 사건이 그의 어린 시절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어린 조르쥬는 그 불행의 연쇄효과에 슬쩍 가담했을 뿐이었다. 어린 조르쥬가 과거를 잊고 지성인으로 성장하며 좋은 가정을 꾸렸듯 프랑스 역시 그 과거를 잊고 안락한 사회를 만들어왔다. 여기서 배제된 이방인들은 가난은 참을 수 있어도 수치와 모멸은 지우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상정된다. 성인 마지드가 자기 몸에 대한 ‘테러’로 그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지성인 조르쥬는 여전히 방관할 뿐 그들의 수치와 모멸을 자기 삶의 내부로 끌어안을 줄 모른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실제했던, 끔찍한 과거를 깨끗한 공백으로 남긴 프랑스와 그 주체들에게 대단히 지적이며 예술적인 공격을 수행해간다.

여기서 조르쥬와 프랑스는 동격인데 하네케의 화살은 이 사태를 지켜보는 관객에게로 이어진다. 마지드의 예고없는 테러에 조르쥬는 기겁하지만, 조르쥬 뒤에서 조르쥬와 같은 각도로 끔찍한 사태를 목격하는 또 하나의 당사자는 우리(관객)다. 끽소리조차 내지 못하던 조르쥬는 가뿐 기침을 토해낼 뿐이지만 객석에선 비명이 튀어나오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의미심장한 건 그 다음, 몽타주처럼 끼워넣은 장면이다. 놀란 조르쥬가 마지드의 집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그날의 목격담을 이야기하기 전에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들렀던 곳이 극장임을 암시하는 컷이다. 짧게 스쳐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아내 안느가 경찰에 알리지도 않고 어디서 시간을 보냈느냐고 다그칠 때 조르쥬의 영화 관람 행위는 윤리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불행의 목격을 또 다른 목격으로 씻어내는 행위인 셈이니. 하네케는 이 모든 걸 지켜보는 당신 역시 조르쥬와 동격 아니냐고 우회적으로 질문하고 있다. 4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실제 과거를 영화화하면서 하네케는 영화화와 이에 대한 관람 행위가 지닌 의미를 고민한 것 같다. 목격을 그저 관람의 수위에 그치고 마는 것에 대한 근심이다. 조르쥬와 안느가 배달된 비디오테이프를 보는 것과 객석에서 스크린을 보는 것을 일치시킨 몇몇 순간은 스릴러적 트릭으로 단순히 차용된 것은 아닐 것이다.

하네케 감독은 평화와 안락함이 지닌 위선과 불안정의 속성을 해부해왔다. 가족이 번번이 시약 구실을 하지만, 결국 그 끝은 개개인간의 불안한 속성에 대한 관찰에 닿아 있다. 흰옷의 아름다운 청년이 웃으며 한 가족을 살해하는 <퍼니게임>이 가장 극악스런 방식이었고, 마조히스트에 대한 진지한 연민이 흘러넘치던 <피아니스트>조차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지만, <히든>은 데뷔작 <일곱 번째 대륙>과 두 번째 영화 <베니의 비디오>에 더 가까워 보인다. 미디어와 가족과 죽음이 똑같이 넘실댄다. 하지만 <히든>은 인물을 드러내는 방식에서 하네케의 이 모든 전작들과 구별된다. 집단자살을 감행하는 <일곱 번째 대륙>의 일가족이나 <베니의 비디오>에서 소녀를 태연히 살해하는 소년, <퍼니게임>의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감정이입의 여지는 철저히 배제돼 있다. 그저 냉정히 지켜볼 뿐이다. 반면, <히든>의 조르쥬와 안느가 느끼는 불안감은 정서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된다. 하네케의 캐릭터 중에서 이처럼 근접 허용된 적이 있었던가. 피해자인 듯 가해자인 조르쥬와 관객을 일치하는 방식은 대단히 정치적인 태도이자 지능적인 공략으로 읽힌다. <히든>이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장르적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물론 관심사는 하네케의 태도가 아니라 정치적 실체를 영화화하는 그의 흥미로운 방식이다.

<히든>의 진짜 주인공이라 할 마지드는, 하네케의 전작 속 인물들처럼 이렇다 할 단서가 될 만한 말들을 끝까지 하지 않는다. 마지드의 아들이 조르쥬에게(그러니까 관객에게) 말을 걸지만 한사코 외면당한다. 대화에 성공하는 건 마지드의 아들과 조르쥬의 아들이다. 대화를 외면했던 조르쥬(와 관객)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이들의 만남은 반가워할 만한 새 출발일까,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일까. <히든>은 그 답을 주지 않는다. 진행형일 테니까.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