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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스> 감독 문승욱

러브스토리의 감성이 계산된 틀 안에서 더욱 자극적일까. 김지수와 조재현의 <로망스>는 세심하게 짜맞춘 상업영화다. 하지만 감독이 문승욱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지나치게 전형적이어서 오히려 실험영화처럼 느껴진다. 그는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폴란드 국립영화학교 우츠의 첫 한국인 유학생이자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제자답게 <이방인> <나비> 등 전작은 작가로서의 야심이 뚜렷한 작품이었다. 디지털로 작업한 <나비>는 어디서 어떻게든 찍는다는 다큐멘터리적 원칙을 SF틀과 맞춘 ‘무모한’ 도전이었고 국내외 평단은 그 가치를 높이 샀다. 감독의 전사를 생각할수록 <로망스>는 야릇한 영화다. 사실 <로망스>는 <이방인>이나 <나비>와 굉장히 다른 스타일의 영화이지만 어딘가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듯 사는 이들과 그 사연에 매력을 느끼고 다루고 있다는 점에선 비슷하다. 또 즉흥적인 현장성이 지배했던 <나비>에서조차 역력했던 미장센에 대한 감성 역시 일맥상통한다. 술상을 앞에 둔 그가 “욕먹을 각오로 했다”는 말부터 대뜸 꺼냈다.

-욕먹을 각오? =그런 생각으로 편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재밌게 볼 수 있을까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스토리는 인터넷에 떠 있는 정도가 전부라고 할 정도로 간단하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조명, 음악, 색감 등에 최선을 다했다. 극장에 들어가서 영화 끝나는 순간까지 분위기에 젖어들게 하는 게 목표였다.

-왜 그런 목표를 세웠나. =상업영화니까. 신파멜로를 선택한 건 상업영화를 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것이고 이걸 어떻게 하면 더 상업적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이야기 구도나 분위기를 결정한 이후의 고민 사항이었다는 거다. 사실 최초의 구상은 대단히 비상업적이었다. 무겁고 진지해서 문승욱적이었다고 할까. (웃음) 승재 형(제작자인 LJ필름 이승재 대표)이 고마운 건 그런 나를 버리지 않게 보호해주면서 “좋다. 너 하고 싶은 거 해라. 다만 많은 투입이 들어가니까 그 다음 얘기를 해보자”고 했다. 제작자와는 굉장히 민주적이었다.

-신파멜로에 끌린 이유는. =<나비> 끝나고 나서 단순한 게 하고 싶었다. <어둠 속의 댄서>처럼 사람들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볼 수 있는 영화. 실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너는 내 운명> 같은 거다. 그런데 내 손을 거치면 맵핑이 되고 마는데 그게 굉장히 세다. 대중과 호흡하기가 쉽지 않다. 그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틀은 단순하고 신파지만 영화를 보고 나올 때까지 묘한 분위기에 젖어 나올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촬영현장 공개 때 감독이 “일상에 들어오기도 전에, 현실을 깨닫기 전에 파국을 맞는 연인의 이야기”라고 했던 출발선 자체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려내기 무척 어려운 구상 아닌가. =사랑 이야기라 할 때 보통의 정석은 ‘두 사람이 만난다, 필을 받는다, 관찰한다’의 수순을 거치며, 이 과정이 얼마나 설득력 있느냐에 따라 멜로가 좋다 나쁘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로망스>에선 그런 게 없다. 둘이 보고 필 받아서 바로 다음 단계로 들어간다. 끝까지 가게 되는데 그 모습이 예뻤으면 했다. <로망스>는 사랑에 대한 판타지다. 사랑이 역겹다는 주관이 생기지 않도록 만들고 싶었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서사적이었으면 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현미경처럼 들이대서 주무르는 게 아니라 큰 이야기 안에 빠졌다가 나오기를 바랐다. 개인적으로 서사영화가 좋다.

-판타지에 빠졌다가 나오면 어떤 게 좋은가. =어렸을 때 나에게 좋은 상업영화는 극장에서 나오는 순간까지 가급적 나의 현실을 잊게 해주는 것들이었다. 머리가 커지면서 그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거다. 원래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느낌을 좋아한다. <로망스>의 두 주인공을 보고 또 다른 세상을 구경하는 듯했으면 싶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좋아했는데 관객이 이 영화에서 주인공과 자신 사이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끼기보다 파란만장한 서사를 즐기는 것처럼.

-접근하는 방식이 전작들과 정반대에 가깝다. 장르와 스타일이 급격히 변한 까닭이 뭔가. 사람들이 재밌게 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나비>를 만들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나비> 때는 그런 생각 안 했다.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내가 들고 있는 카메라와 찍고 있는 배우 사이의 진실 그러니까 그때는 나와 김호정, 장현성, 강혜정이라는 배우와의 관계가 제일 중요했다. <로망스>를 찍을 때는 나와 지수씨, 재현 형과의 관계보다는 내가 만드는 세계에 관심이 더 많았다. <나비>는 그 세계를 찍어가면서 배우들과 여행하면서 나온 결과물이고, <로망스>는 처음부터 계획했던 세계를 작정하고 배우와 스탭을 만났다. 그 세계에 동의하든 말든 상관없이. <나비>의 세계는 생각할 게 많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성인들을 위한 박물관이라면 <로망스>의 세계는 성인들을 위한 디즈니랜드다.

-<이방인> 만들고 나서 “프레임 밖에서 안성기씨는 아름다웠지만, 막상 난 그걸 하나도 프레임 안에 담지 못했다. 인물이 자꾸 죽어버렸다”고 말한 뒤 만든 작품이 <나비>였고, 그때 참고했던 영화가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이었다. 그런데 어른들을 위한 디즈니랜드라는 건 단순히 해보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감독의 영화세계가 달라진 건가. =어렸을 때 영화를 시작한 게 두 가지 이유였다. 가정사 때문에 혼자 외롭게 있을 때가 많았는데 전세계 어디든 가볼 수 있고 온갖 모험을 할 수 있는 영화가 큰 도움이 됐다. 영화가 다른 세상으로 가는 창이었다. 또 하나는 내 방하고 공원하고 가까이 붙어 있었는데 커다란 압박 스티커를 창에 붙여놓고 음악을 틀어놓은 채 사람들을 보는 게 너무 좋았다. 사실 엔터테이너에 대한 욕망이 무척 크다. 영화가 철학의 매체이며 사람들과의 소통도구이기도 하지만 본능적으로 ‘나 이거 한다, 좀 봐다오’ 하는 엔터테이너적인 게 좋았던 것 같다. <이방인> 때는 할 얘기가 너무 넘쳐서 허덕였고, <나비> 때는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정리했다면, <로망스>에선 왁자지껄하게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싶다. 사실 내 작품 모두가 멜로다.

-<나비>에서 배우들을 그렇게 들볶았는데 장현성은 또 주요 조역으로 나왔다.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 영화를 다 겪고 그가 뭐라고 했을까. =둘도 없는 친구다. 현성이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해 많이 아쉽다. 시나리오 쓸 때 항상 먼저 검사받았다. 그는 광대이기 이전에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내 의도를 가장 많이 아는데 전작이나 이번이나 똑같다고 한다. <나비> 때는 배우들에게 연기하지 말라고 했고, <로망스>에선 연기해달라고 했다. 나로서는 매번 다른 게 재밌다.

-둘 다 배우에게는 힘든 연출인 것 같다. 촬영하면서 김지수에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내가 여기서 왜 이래야 하나?’ 지수씨는 대단히 현실적이고 관계가 아주 세밀한 걸 좋아한다. <로망스>는 관계를 뛰어넘는 낭만적인 부분이 있는데 그런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20∼30%는 이해를 못한 상태에서 그냥 촬영에 들어가고는 했다. 이건 의도했던 건데, 지수씨가 온몸으로 체감하고 이해하며 들어가기보다는 테크닉적인 게 많이 나와줬으면 했다. 예컨대 우는 장면. 지수씨는 우는 걸 매우 싫어한다. 지금까지 많이 해왔던 거니까. 100% 공감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필요한데 어쩌나. 배우는 본능으로 움직이는 게 있어서 완전히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 반면 재현이 형은 현장을, 연기하는 것 자체를 즐긴다. 논리적으로 왜 그래야 하는데라기보다 본능적인 연기를 하게끔 도와주면 된다. 두 배우가 연기하는 방식이 극과 극이어서 현장이 아주 재밌었다.

-문 감독 초기의 영화세계는 어떤 사건이나 이야기에 대한 관조적인 반응을 원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인과관계가 뚜렷하고 단선적인 드라마투르기와는 반대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는데 <로망스>는 우연이 많이 개입하긴 해도 후자에 훨씬 가깝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든지 사람들에게 쇼를 보여주든지 두 가지인데, 이번에는 쇼였다. 말을 걸기보다 내가 던지는 볼거리를 즐겼으면 했다. 값싸다, 신파다, 뻔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변화라기보다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게 있다.

-그럼 다음 작품에서 또 달라지나. =그렇다. 87학번 내 세대의 이야기인데 관객에게 말을 거는 쪽이다.

-대형 액션신을 찍기는 처음이다. 마지막 시퀀스는 시나리오에서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던데 처음 읽고 이것 때문에 <로망스>를 하려고 했나 싶을 정도로 비중이 크게 느껴졌다. =틀린 말은 아니다. 원래 시나리오는 그 부분이 80%였다. 어떤 멜로를 할 것인지 결정할 때, 알콩달콩 밀고 당기기를 그릴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이 공통으로 가진 소중한 것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다’로 정하면서 이 ‘싸운다’가 포인트였다. 영화의 앞부분은 이것을 위한 얄팍한 동기부여일 수 있고.

-그런데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를 담은 조성모 뮤직비디오를 시작으로 수많은 아류작에서 액션과 총과 죽음이 단골 메뉴처럼 등장해왔다. 이런 뮤직비디오들을 연상시킨다. =뮤직비디오는 이른 시간 내에 사랑의 원형을 그려내는 건데, <로망스> 역시 멜로 서사의 원형으로서 비슷하니 피해가야 할 이유는 없다. 가방끈 긴 이야기를 하면, <로망스>를 준비하면서 도움을 줬던 감독이 더글러스 서크다. 더글러스 서크가 영화를 만들 때 꼭 필요한 게 네 가지라고 했다. 꽃, 바람, 거울, 피. 그의 영화에서 네 가지가 안 나오는 영화가 없다. 그런 원형들이 있는 것 같다. 그걸 즐겼으면 했고 일상이 들어가지 않는 사랑 이야기니까 끝까지 가보자 싶었다. 실력이 안 돼서 그렇겠지만, 전형적이라는 걸 보는 게 즐겁다. 픽사의 <인크레더블>을 보니까 너무 재밌더라. 시나리오 교본 같았다. 아주 전형적인데 어쩌면 그리 인간적이고 매력적일 수 있을까. <로망스>에서 전형적인 캐릭터과 이야기에서 매력을 찾는 실험을 해봤다.

-알레고리의 힘과 서사의 힘을 분리해놓고 본다면 어쨌든 알레고리의 힘을 중시하는 쪽 아니었나. =사실 양쪽 다 그 근원이 상징이란 점에서 똑같다. 작가들이 알레고리를 쓰는 이유는 상상력 때문이다. 보는 사람 스스로 상상을 하도록 해주기 위해서다. 서사는 알레고리보다 직접적인 상상이나 직접적인 모험을 하게 해주는 건데 선택의 문제가 아닌가.

-색감을 많이 손본 듯한데 가상공간의 느낌이 난다. =공을 많이 들였다. 촬영감독하고 그림 가지고 이야기하니까 궁합이 잘 맞았다. 라파엘 전파라고 19세기 낭만주의 그림을 참고 삼았다. <로망스>가 말 그대로 로망이다.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사랑 이야기, 나쁘게 이야기하면 뜬금없고 비현실적인 사랑의 그림이다. 이들 그림에는 묘하게도 여성 숭배적인 느낌이 있다.

-그래서인지 총이라는 도구가 굉장히 공격적이고 남성적인데 의외로 그런 느낌이 없다. 에로틱한 도구로 느껴지기도 하고. =이번에는 재현이 형이 주먹으로 싸우는 게 싫었다. 폭력이 존재하는 누아르인데 멜로와 어울릴 법한 폭력은 주먹이 아니라 총이라고 봤다. 여자들이 남자를 죽일 때 손을 쓰지 않고 도구를 쓴다. 여기서 재현이 형은 마초가 아니며 윤희도 총에 접근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섹슈얼한 의미는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필 아르헨티나와 탱고를 파라다이스 혹은 도피처의 대상으로 삼았나. =좋아하는 서사나 신화에 탱고가 가장 가까운 것 같다. 탱고의 원형을 보면 <로망스>와 비슷하다. 둘이 운명적으로 사랑하고 브레이크 없는 차처럼 질주하다 충돌하는 열정을 드러낸다.

-사운드에 굉장히 예민한데, 음악을 포함해 사운드디자인의 컨셉은? 반도네온이란 악기가 영화의 슬픈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영화하는 사람들은 자기 세계가 크고 웅장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는데 눈에 보이는 세계를 몇배로 확장하는 게 사운드다. 대사가 많지 않다보니 사운드가 더 중요해진다. 배우들의 큰 불만이 대사가 별로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다음 영화는 대사가 무척 많다. 음악에 쓰인 반도네온, 피아노, 보컬 세 분야에선 아르헨티나에서 음악하는 분들이 와서 도와줬다. 곡은 이동준씨의 100% 창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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