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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만 행복하다, <데이지>의 정우성

예전에 정우성을 보고 넋이 나갔더랬다. 그래서 그와 만나기로 한 날, 밤잠까지 설쳤다.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거짓말 조금 보태 3월의 햇살보다 반짝거렸다. 한데 자신을 예전의 청춘스타로 보지 말아달라 부탁했다.

의아한 마음에 묻는다.

“그럼 당신은 어떤 사람이죠?”

정우성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행복한 배우”라고 대답한다.

잠자코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린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무엇인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나는 배우가 외로운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영화가 아무리 공동작업이라 해도 연기하는 순간엔 철저하게 혼자잖아요. 또 이곳(연예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신념과 의지도 있어야 하고. 그러니 배우란 참 외로운 일이죠. 그래요. 이건 내가 <데이지>의 박의를 보며 느꼈던 것과 같아요. 혜영(전지현)에게 첫눈에 반한 박의는 매일 같은 시간 데이지 꽃을 선물하는 것으로 자신의 불같은 마음을 견뎌내는 인물이죠. 킬러라는 신분 때문에 사랑 앞에 당당히 나서지도 못하고 말예요. 나는 짝사랑은 외로운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숭고한 사랑이라고 해도 하나를 주고 나면 둘은 아니더라도 반은 받고 싶어지니까…, 그래서 박의가 외로워 보였어요. 한데 영화를 보고 나니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죠. 박의는 자기가 한 사랑을 통해 오히려 행복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러고서 배우로 살아온 지난 시절을 돌아보니 나도 결코 혼자가 아니었구나 싶었죠. 그래서 행복해요. 지금은.”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하지만 곧 반문한다.

“바람 잘 날 없는 연예계에서 사는 게 행복하다고요?”

정우성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먼 산에 두었다. 자리를 고쳐 앉는가 싶더니 이내 말을 계속한다.

“확실한 신념만 있다면 어떤 강풍에도 쓰러지지 않죠. 저는 이곳이 좋아요. 누가 돈을 벌면서 사람 감정에 대해 이렇게 많은 고민과 아름다운 생각들을 할 수 있겠어요. 나는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이 일을 하면서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됐어요. 그랬더니 오히려 내가 행복해졌어요.”

정우성은 담배를 집어든다. 창문으로 햇살이 비친다. 햇살은 그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그러고 보면 그의 손은 주머니 속에 고이 모셔졌던 적이 없다. 총을 들고(<데이지>), 목수가 되고(<내 머리 속의 지우개>), 자동차 정비(<똥개>)를 하며 시종일관 움직인다. 가는 손가락이 이번에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걷어낸다. 자신에게로 향한 시선을 느낀 그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린다.

정색을 하고 묻는다.

“당신도, 당신의 미모가 당신에게 독이 된다고 믿는 쪽인가요?”

정우성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이후 미소를 가득 머금은 그가 눈을 맞춘다. 그 순간, “그러니까… 우리는 아름다운 당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좋거든요”라고 속내를 드러내고 만다.

잠시 호탕하게 웃던 그가, “그러니 제가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라며 입을 연다.

“어렸을 땐 고민도 했었죠. 모두들 그게 내 한계인 것처럼 얘기했으니까요. 한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왜 사람들은 배우의 장점을 살린 캐릭터와 영화를 만들 생각은 안 하고 단점에 대한 고민만 짊어지게 하는 걸까요. 그래서 난 존재 자체로 우상이 되는 쪽을 택했어요. (다시 호탕한 웃음) 그게 연기(연습)를 안 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대중의 취향과 내 장점을 잘 맞춰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캐릭터를 찾겠단 뜻이죠.”

다시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다.

정우성은 잠시 사이를 둔다.

“물론 어둡고 긴 터널에 들어선 것 같았던 시절도 있었죠. 그래서 그에 비해 지금이 얼마나 환한지도 알아요. 하지만 아직도 난 <비트>의 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내가 민이와 비슷한 성장과정을 겪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난 극에서처럼 죽을 수 없었거든요. 죽음으로 쉽게 끝낼 수 없는 게 현실이니까요. 나의 민이가 세상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게 지금 내게 주어진 과제예요.”

여기에서 행복한 배우 정우성의 짧은 이야기는 끝난다.

올해 안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할 것이라는 (일단은) 막연한 꿈을 가진 배우는, 낯가림이 심했던 십년 전의 그가 아니다. 반항과 자유 사이를 오가는 불안정한 소년의 앳됨도 더이상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그는 욕심이 자신에게 상처로 돌아올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과 시련의 시간을 달관하지 않으면 이겨내지 못한다는 삶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리고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무언가를 배우며 보내겠다고 다짐한다. 이것이 그가 나이와 세월로부터 얻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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