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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日流 열풍 [2]

일본 사소설이 풍기는 개인주의의 향기

그런데 우리는 일본의 무엇에 매혹될까, 그들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어떻게 현재성을 띠게 될까. 텍스트로의 여행에서 만화와 드라마, 영화는 살짝 제쳐두자. 편의성 때문이 아니라 일본 현대소설이 일류 현상의 눈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국내 대형서점들에서 다른 어떤 외국서적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충무로 제작자들의 가장 열정적인 러브콜 대상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 이후의 일본 문학을 순문학의 상실로 여기며 무척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문학의 역할은 과거와 미래를 포괄하는 동시대의 모델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델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그의 명제를 전제처럼 들고 출발해야 할 듯싶다.

“나도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영화화하고 싶어하는 사람 중 하나”라는 이윤기 감독(<여자, 정혜> <러브토크>)은 영화화를 검토 중인 일본 소설 몇편을 갖고 있다. 그의 예민한 시선이 닿은 곳은 어딜까. “일상의 묘사나 감정 묘사의 접근 방식에 우리나라 소설이나 다른 매체에서 볼 수 없는 기묘함이 있다. 유난히 디테일에 강하다는 게 일본 문학의 오랜 전통이기도 한데 지금 그것이 고독한 현대인의 일상을 표현하는 데 다양한 장점을 발휘한다. 특히, 관계나 역사를 파고드는 우리 것과 달리 자아와 개인에 대해 미시적으로 접근한다. 우리 것들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비슷하지 않다.”

일본 소설에 대해 흔히 언급되는 사소설적 경향이 현대적인 개인주의 문화와 만나 색다른 향기를 만들어낸다고 할까. 사회적 관계와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들보다 나와 너의 감정과 소통이 소중히 다뤄진다. 할아버지와 소녀(처녀)와의 사랑 이야기라는 점은 비슷하지만, 김기덕의 <>과 다이도 다마키 소설 <이렇게 쩨쩨한 로맨스>의 풍경은 대단히 다르다. <>에서 할아버지와 소녀 사이를 간섭하는 건 사회적 감시의 눈으로 가장한 남자들이다. 바다 위 배로 공간을 극단적으로 한정했음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끼어들고 둘 사이의 관계를 위협한다. 반면, <이렇게 쩨쩨한 로맨스>에서 그들은 떳떳이 육지와 고향을 활보하며, 간섭하는 주체는 외부가 아니라 여주인공 미호의 내부에 있다. 사랑을 완성하느냐 마느냐의 투쟁은 오로지 자신에게로 향해 있다. <>이 나직한 비장미를 빚어내지만 <이렇게 쩨쩨한 로맨스>가 코믹한 아이러니를 만들어내는 건 이런 차이에서 온다. 싸이더스FNH에서 준비 중인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과 유이카와 게이의 <어깨너머의 연인> 역시 혼돈의 주체와 원인은 내부에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에서 결벽증세를 띤 게이 남편과 알코올 중독에 조울증을 가진 아내의 관계를 훼방하는 유일한 타자는 직장이나 이웃이 아니라 가족이다. 게이 남편과 알코올 중독의 아내가 주고받는 심리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미경처럼 자신들 내부를 탐색하고 갈등하며 치유해 나간다. 또 결혼을 외면하는 여자와 결혼을 수단으로 여기는 여자, 그리고 가출한 남자 고교생의 3각 구도를 기본으로 삼는 <어깨너머의 연인> 역시 고통과 대면하고 선택의 길을 깨우쳐야 하는 몫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두 작품 모두 새로운 동거 방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사회성을 띠지만 절대로 제도 혹은 구조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는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플라이, 대디, 플라이> 역시 무기력한 중년 남자가 자신과 어여쁜 딸을 농락한 ‘악의 무리’에 대처하는 길은 직접적인 결투를 위한 자기 단련에 있을 뿐이다.

일본 현대소설은 행복의 조건과 심리를 개인 자신에게서 구하고 찾아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인다. 쾌락적이거나 미학적인 것들을 도덕의 층위와 자유롭게 오가게 만들며 생활방법에 하나의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일본 현대소설은 양식의 허례허식이 없는, 미시적인 현대생활백서나 다름없다. 이는 사회적 의제를 장르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데 장기를 보여온 한국영화의 흐름과 확실히 다른 점이다. 이윤기 감독이 일본 소설의 문화적 코드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위태로움을 감지한다는 건 이런 의미일 것이다. 일본의 지식인들이 개성 말살의 사회 풍토에 만성적으로 불만을 토로해왔음에도 한편으로 독특한 개인주의 코드를 생산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하긴 천황제를 위한 자위대의 쿠데타를 선동하며 자결한 미시마 유키오조차 <문화 방어론>에서 테크놀로지와 소비주의가 만들어내는 무미건조하고 기계적인 일상성에 대한 반발로 문화적 무정부주의를 옹호했다는 점이 이해를 돕기는 한다.

한국영화가 일본 소설을 소화해내는 방식이 궁금해지는 또 하나의 대목은 내용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형식적 측면이다. 세상을 총체적으로 구성하는 서구소설의 중요한 도구는 3인칭과 과거시제다. 롤랑 바르트가 지적한 바, 과거시제는 하나의 행위를 다른 행위와 연결시키며 사실의 영역에 위계를 구축한다. 사건의 연쇄, 즉 분명한 내러티브를 요구하며 이는 3인칭 화자와 결합해 작가를 신적인 세계의 창조자로 위치지운다. 한국 소설과 한국영화는 이 범주에서 크게 이탈해오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소설은 1인칭과 현재시제를 즐겨쓴다. 사람들은 ‘가면’을 쓰지 않고 직접 말하고 서술하며 자신의 일상을 들려준다. 그것이 하나의 사건이며 플롯이 된다.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가 그랬듯 <반짝반짝 빛나는>이나 <어깨너머의 연인>의 등장인물들은 자기 시점의 서술을 다른 주인공과 섞지 않고 공평하게 교차해나간다. 그리고 1인칭 현재시제로 삶의 구체성을 담는다. <반짝반짝 빛나는>의 쇼코처럼. “이런 결혼 생활도 괜찮다, 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

일류, 단지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이재한 감독은 “(나라로 구분되는) 감성의 계산없이 그냥 나의 눈높이와 감성에 맞춰 영화를 만들었을 뿐 관객이나 문화를 분석하거나 의식하고 만들지는 않았다. 스토리 소스는 일본 아닌 어디서든 만들 수도 있고, 감성은 개개인마다 다른 것이다. 한국 안에서도 일본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듯이. 작품마다 다른 것이다”라고 말한다. 김지운 감독은 <기생수> 이후 우라사와 나오키가 일본에서 연재 중인 만화 <플루토>를 보고 다시 한번 영화화에 대한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이것이 딱히 일본적이어서는 아니었다. 그는 “한국에서 영화가 특별히 발전한 것치고 다른 분야에서 소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폭이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게 더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한다. 이야기에 대한 갈구, 그것이 일본에 눈 돌리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류든 일류든 한쪽 방향으로만 부는 바람은 어쩐지 위태롭다. 한류의 드라마와 영화, 일류의 소설과 만화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기류처럼 서로 아쉬운 부분을 메워주며 융합할 때, 또 다른 아시아형 콘텐츠들이 생겨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