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하늘에서 빨간 헬멧들이 비처럼 쏟아진다. 죽은 할머니가 도마뱀으로 환생해서 말을 한다. 귀여운 테디 베어는 담배를 피운다. 플라스틱 통들이 쌓여 산이 된다. 하늘에서 하얀 책이 떨어진다. 시체가 오토바이를 운전한다. 잘린 손가락이 통통 튀어다닌다. 이 귀여운 판타지들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일까. 도시, 쓸쓸함, 사랑, 그리고 상상력. 희망이 없는 외로운 도시인들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방법은 꿈을 꾸고 상상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동화같이 따뜻한 그들의 판타지는 슬프고 비현실적이지만, 여전히 삶에 대한 희망을 내재하므로 유쾌하다. 타이 영화계의 샛별, 위시트 사사나티앙은 방콕을 배경으로 방콕의 매력적인 풍경들을 극대화하여 초현실적인 도시의 그림을 완성했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 방콕으로 이사 온 청년 팟(마하스무트 분야락). 그는 통조림 공장의 직원, 기업의 경비원, 택시 운전사 등을 전전하는 도시의 노동자이다. 무료한 눈빛으로 언제나 다른 세계를 꿈꾸는 듯한 그의 표정, 그럼에도 지루한 노동의 반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의 육체는 무성영화 속 주인공의 그것과 유사하다. 특히 영화가 빠르게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와 그것의 꼭두각시가 된 팟을 비출 때는 마치, 저 오래된 채플린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영화는 이처럼 무기력한 도시 노동자의 삶에 사랑의 빛을 선사한다. 그녀의 이름은 진(상통 켓우통). 노동자 진은 꿈을 먹고 산다. 팟과 진의 순수한 사랑,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진에 대한 팟의 순정이 차가운 도시에서 꿈과 희망의 노래를 만들어낸다.
영화의 중심은 진에 대한 팟의 일편단심이지만, 영화는 하나의 방향으로 단순하게 흐르지 않는다. 그들의 러브스토리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무수한 곁가지로 뻗어나가, 그 곁가지 하나하나가 자기만의 스타일을 생산하고 있다. 도시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과 그 각각이 창조해낸 판타지들은 도무지 서로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상한 조화를 이루는데, 그건 도시 속 인간들뿐만 아니라 도시 속 모든 사물들과 생명들은 고독을 견디면서 각자의 꿈을 꾸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그들의 고된 현실과 꿈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영화가 마치 여러 편의 꿈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러한 초현실성은 영화의 화려한 비주얼로 강화된다. 이를테면 팟과 진이 머무르는 방콕의 허름한 공간들은 마치 우주 한복판에 떠다니는 무국적의 공간들처럼 기존의 맥락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개별성을 지닌다. 금방이라도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강렬한 색채, 비일상적인 설정으로 가득한 세트가 도시의 추하고 더럽고 궁핍한 삶의 구석구석을 아름답게 채색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타이적인 것’에 공을 들였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 영화의 매력은 타이적인 것과 타이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 바로 그 사이의 경계를 드러내는 데 있다. 그 경계 위의 예쁜 이미지들은 현실의 무게에 지쳐가는 도시인들의 불행을 위로해준다.
그래서 영화는 이야기보다는 이러한 비주얼이 내용과는 별개로 생산해내는 이미지의 힘에 기대고 있다. 그건 팟과 진의 사랑 이야기가 그만큼 평이하다는 의미다. 그들은 여느 남녀처럼 노동의 피로 속에서 짝사랑하고 이별하고 오해하고 결국 서로의 사랑을 깨닫는다. 그들 주위의 인물들, 예컨대 당돌한 꼬마 소녀나 테디 베어 혹은 팟의 친구를 둘러싼 이야기들도 재기발랄하긴 하지만, 언제나 어느 한계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수많은 목소리가 인물들의 상황과 심리를 설명하며 이야기의 균형을 잡으려고 하지만, 정작 매력적인 건 이야기와 분리된 영상, 배경에 어울리지 못하는 캐릭터다. 모두가 한 도시에 존재하지만, 모두가 각각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듯한 느낌. 이것을 부조화의 조화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도시의 이러한 단편들에서는 긍정의 기운이 넘쳐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영화 속 모든 것들에서 생명력이 느껴지는 데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인형, 나무, 빌딩, 책, 하물며 다리미 하나에도 팔딱팔딱 뛰는 심장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자기 고유의 색을 뿜어내며 침묵 속에서 시공간을 공유한다. 인간은 다만, 도시의 배경 속에 혹은 위에 사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모든 것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물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대화하고 함께 꿈꾸고 외로움을 나누며 공존하는 존재들이다. 도시 속에서 소외당하는 존재는 인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소외된 모든 것들이 함께 꿈꾸며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순간, 그 낯선 시공간은 총천연색의 세계가 된다. 누군가는 도시의 비인간적인 성격에 고통하며 자연으로 귀환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도시 속 판타지의 문을 찾아 그 안에서 살아나가는 법을 익힌다. 영화는 이 오색찬란한 세상을 가짜라고 말하는 대신, ‘우리는 그 세상을 꿈꾼다’라고 말하고 있다. 꿈은 이 영화의 전부이다.
물론 경쾌한 노래와 아름다운 색감의 영상이 보는 이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하기에 손색이 없는 영화이긴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다른 결함들을 가려주는 것은 아니다. 평론가 황진미의 지적처럼, 영화는 동성애 포르노의 정치성을 너무 쉽게 지나쳐버리고 있으며, 사랑, 꿈에 대한 집착으로 환경운동의 절박함을 어느 순간 무화시키고 있다. 그 결과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꿈은 현실과의 연계성을 잃어버리고 영화는 그저 하나의 정지된 그림처럼 보이게 된다. 이를테면 한때의 열정으로 집 앞에 쌓아둔 플라스틱 산은, 이제는 지나간 세월에 대한 회한과 현재의 낭만적인 사랑을 영상화하는 데 이용되는 배경에 그칠 뿐이다. 이것이 <시티즌 독>이 보여주는 행복의 가치에 미소를 지으면서도, 그 행복에 완전히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