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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은 왕이다> 뒷이야기 [1]
사진 이혜정이영진 2006-02-28

‘내가 나서면 영화에 폐 끼치는 것 아닌가?’ 지난 2월12일, 대학로에서 만난 명계남은 내색은 안 해도 그런 눈치였다. 연극 <콘트라베이스>에 온 신경을 쓰면서도, 곧 개봉을 앞두고 있는 <손님은 왕이다>에 대한 이런저런 뒷말들이 적잖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지극히 일부이긴 하나, 네티즌들 중엔 <손님은 왕이다>가 명계남 본인이 주연배우하기 위해 만든 영화라는 얼토당토않는 이야기까지 하는 이들도 있다 하니, 출연한 배우로서 어찌 민감하지 않을 것인가. 공연을 보러 나선 오기현 감독 또한 “별을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손가락만 보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면서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오기현 감독이 충무로에 발딛기까지 가장 큰 도움을 준 이는 배우 명계남이 분명하지만, 자신을 소재로 쓰여진 <손님은 왕이다>에 김양길로 출연하기까지 명계남이 얼마나 숙고를 거듭했는지는. 무대를 넘어선 배우와 관객으로, 나이를 넘어선 선배와 후배로, 그리고 한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락을 함께한 감독과 배우로 관계를 맺기까지 지난 10년 동안 두 사람이 간간이 나눈 인연의 조각들을 긁어모은 건 세간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과연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나, 무엇을 나눴는가. “비록 사람들 눈에는 항상 악역만 도맡아했던 이름없는 싸구려 삼류배우로 보이겠지만 그 누가 뭐라 해도 난 명배우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가면을 벗고 자신의 존재 증명을 할 수 있는 인생들에 대한 동정어린 시선이 가득한, <손님은 왕이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두 사람의 짧은 대화에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똘아이 관객, 단역전문 배우를 만나다

# “지휘자는 없어도 되지만, 콘트라베이스만은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음악을 아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겁니다.”(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 중에서)

1996년 한국은 파트리크 쥐스킨트 열풍이었다. <좀머씨 이야기>는 출판계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그해 무려 100만부 가까이 팔렸다. <향수> <콘트라베이스> <깊이에의 강요> <비둘기> 등 쥐스킨트의 또 다른 소설들이 덩달아 출간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서울예대를 졸업하고 광고계에서 일하고 있던 오기현 또한 <비둘기>를 읽고 쥐스킨트 중독자 대열에 뒤늦게 합류했다. 그런 그가 1997년 2월, 대학로 인간소극장에서 막을 올린 모노드라마 <콘트라베이스>를 놓칠 리 없었다. “쥐스킨트의 텍스트가 무대 위에 올려지면 어떨까 무엇보다 궁금했다.”

1996년 <콘트라베이스> 공연 중인 명계남

2시간 넘는 1인극의 주인공이 충무로 ‘단역 전문’ 배우 명계남이었다는 사실은 어땠을까. 그의 호기심에 기름을 부었을까. 19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명계남은 한해 10편 가까운 영화에 출연할 정도로 바빴다. 기껏해야 편당 10컷 내외의 분량이었지만, 언론은 “한국영화는 명계남이 출연하는 영화와 출연하지 않는 영화로 나뉜다”며 명계남을 ‘명배우’라고 불렀다. 그게 아니라면 최종원, 권용운 등과 함께 조연 전성시대를 끌어가는 삼두마차라고 칭하기도 했다. “잘 다니던 대기업 때려치우고” 딴따라판으로 돌아온 광대 명계남의 ‘좌충우돌’ 삶에 오기현 또한 흥미가 없진 않았다.

“같은 대사라도 공연마다 느낌이 달랐다. 그 재미에 공연장에 매일 가다시피 했다. 그러다 나도 뭔가 외치고 싶구나 알게 됐다.”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고백하기에 앞서 망설였던 건 극중 콘트라베이스 주자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입장권을 받는 극장 스탭이 나중에는 초대권을 쥐어줄 정도로 <콘트라베이스>의 ‘왕팬’이 됐다는 그는 연극을 보면서 자신이 “광고주의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읊는 일”에 싫증이 났음을 알게 됐다. 배고프다는 이유로 기약없이 미뤄뒀던 영화라는 표지판도 그때서야 가물가물 보였다.

“저 커플은 너무 붙어 앉아 있네. 저 여성 관객은 치마가 너무 많이 말려올라갔네. 몸을 흔드는 거 보니 저 사람은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틀림없군. 우리 마누라는 도대체 누굴 데리고 온 거지? 무대 위에 서면 다 보여. 쥐스킨트 팬들은 아예 책을 들고 와서 내 대사가 틀렸나 안 틀렸나 확인하느라고 바빴다고. 근데 오기현 감독은 처음엔 몰랐는데 좀 이상했어. 매일 오다시피 했거든. 나중에는 내가 찾게 되더라니까. 오늘은 안 왔나, 어디 있는 거지 하고. 좋은 말로 하면 독특한 관객이고, 나쁜 말로 하면 똘아이인데. (웃음) 내가 하는 연기가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냥 쥐스킨트 팬인가 했지. 영화할 사람이라곤 생각도 못했고. 나도 그때 <향수>를 몇번씩 읽을 정도로 쥐스킨트를 좋아하던 때였으니까.”_명계남

미국간 고학생, <명배우 죽이기> 시나리오를 보내다

# “모든 인간은 다 별이다… (중략)… 저마다 꼭 자기 몫만큼의 크기와 밝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채, 해 정문 하늘녘 어디쯤인가에서, 우리 모두가 누구나 다 그렇게 영롱한 별이었다. 비록 우리들이 이젠 까맣게 망각해 버리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별인 것이다.””(임철우의 <그 섬에 가고 싶다> 중에서)

오기현은 1997년 4월, 곧장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연극 <콘트라베이스>가 ‘기폭제’가 된 셈이다. 당시 어울려 지냈던 이해영, 이해준(현재 <천하장사 마돈나>로 데뷔 준비 중)처럼 “카페에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미래를 기다리기에 그는 영화에 대해 “정말 아는 것이 없었다”. 토플 점수 하나 달랑 들고 미주리주립대학 영화과에 진학한 그는 그때만 하더라도 “필요 때문에 공부를 하긴 했지만 한국에 돌아가서 뭘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2년 뒤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대학원에 진학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손님은 왕이다>의 초고

착상이 떠오른 그날도 그저 멍하고 우울한 하루였다. LA로 이사와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휑한 아파트에서 밀레니엄을 맞았던” 그는 2000년 3월,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면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20분 정도 차 타고 가면 저 스타들을 다 볼 수 있구나. 뭐 그런 상념에 잠겨서 보고 있는데 5분가량 되는 애도 섹션이 나오더라. 그해 죽은 마리오 푸조를 비롯해서 이름이 쭉 나오는데 다리 꼬고 앉아 있는 니콜 키드먼은 저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자신도 언젠가 저렇게 소개되겠구나 뭐 그런 상상을 하고 있겠지 싶었다.”

상념은 지치지 않고 꼬리를 물었다. 누군가의 이름이 호명될 때는 기립박수가 터져나왔지만, 누군가의 이름 뒤엔 술렁임이 뒤따랐다. “시상식에 참석한 배우들이 저 사람 뭐야, 어디 나왔어, 그렇게 수군거리는 것만 같았다.” 오기현 감독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비껴나간, 그래서 죽어서도 기억되지 못하는 인생들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대부>를 봐도 말론 브랜도보다 그 뒤에 선 변호사가 더 좋았고,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들에 단골로 출연하는 찌질한 졸개들이 더 맘에 들었다”는 독특한 취향이 아니었다면, 주목받지 못한 인생들이 극단적으로 존재 증명을 벌이는 <명배우 죽이기>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

“공연 끝나고 나서 얼마 뒤에 감상문과 함께 비디오 테이프를 보냈더라고. 내가 출연한 장면을 모아서 만든 클립 같은 거였어. 그렇게 몇년이 흘렀어. 유학간 줄도 몰랐지. 그런데 언젠가 시나리오가 날아왔어. 자신의 인생에서만큼은 주인공이고 싶었던 배우의 마지막 연기라는 내용도 좋았고. 무엇보다 구조가 독특하더라고. 누아르에 클래식 음악을 섞겠다는 의도도 참신했고, 대사만큼이나 자세한 지문도 좋았고. 그래서 이후에 LA 갔을 때 한번 만났지. 럭셔리한 유학생일 줄 알았는데 완전히 1960년대 고학생이더라고. 그때 나도 영화제작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때였거든. 몇개 영화사랑 합쳐서 TTU라는 연합 회사도 만들고. 만나서 같이 야영을 간 적이 있는데 통하는 점이 많더라고. 산에 올라가서 난 회사의 장밋빛 미래를 펼쳐 보이고, 오기현 감독은 자신의 포부를 펼치고 뭐 서로 격려했지.”_명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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