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해서 웬만하면 보지 않는 두 가지 범주의 영상물이 있다. 생태 파괴 다큐멘터리와 동물 학대 영화다. 예컨대 아마존 정글을 불태우는 지주들을 다룬 다큐나, <옹박: 두번째 미션>처럼 액션영화인 줄 알고 보고 있는데, 코끼리가 무참히 살해되는 영화류는 정말 괴롭다. 둘 다 가까운 미래, 숲과 종의 멸절을 은연중 플래시 포워드하고 있고, 복원에 장구한 세월을 요구하는 한 세대의 삶의 사이클로는 도무지 돌이킬 수 없는 파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특히 <옹박: 두번째 미션>에 경악했던 또 다른 이유는 중국의 트랜스젠더 무용가인 진싱을 좋아하는데, 하필이면 그녀가 코끼리를 학대하는 악역을 맡은 것이 아닌가? 뛰어난 현대 무용가가 역을 선택하는 안목이 떨어지는 데 실망했다. 이렇게 공포영화보다 생태 파괴 및 동물 학대 영상물을 기피하고 무서움에 떨면서 보는지라 <투 브라더스>를 보기 전 이전과는 달리 영화 줄거리와 예고편 그리고 메이킹 필름까지 모두 살펴본 뒤 신중하게 영화 관람을 시도했다. 장 자크 아노는 지난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베어>를 만든 뒤 호랑이들을 좋아해 <투 브라더스>를 만들었고 심지어 자기는 마늘까지 좋아하니 곰과 호랑이, 마늘이 모두 등장하는 단군신화의 고향 한국과는 특별한 인연이라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호랑이를 괴롭히지 않으려고 오히려 스탭들이 8개월간 우리에 갇혀서 영화를 찍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호랑이 애호가가 만들어서인지 ‘호권’을 찾아주려고 노력하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영화 배경은 제국의 식민주의가 호령하는 가운데, 상아와 호랑이 가죽을 노리는 사냥꾼들과 불상을 비롯한 유적을 파헤치는 툼 레이더들이 횡횡하는 20세기 초반의 인도차이나. 실제 촬영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주변에서 했다. 전작 <연인> 역시 인도차이나가 배경이고 베트남 등에서 촬영한 것을 생각하면, 비인간과 이국에 끌리는 감독의 필모그래피와 시스템 속에 안착해 있는 영화인 셈이다.
문명 비판 혹은 인간화된 야생?
이 영화는 전체 관람가 영화답게 지나친 폭력 장면을 피해가고 있고, 엔딩은 인간의 정글을 피해 자신들의 정글로 돌아간 이제 한살이 넘은 두 형제 호랑이의 ‘그 뒤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로 볼 수 있다. 난 이 영화가 관객에게 그렇게 보여질 것이라는 예견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바로 이어붙여 생각하면 거기엔 불길한 무엇인가가 있다. 예의, 전체 관람가 영화로서는 다소 과잉이다 싶게 <투 브라더스>는 두 암수 호랑이의 유혹과 교접 장면을 상당히 자세하게 따라간다. 카메라의 눈만이 아니라 정글의 새들과 동물들이 이 암수를 바라보는 시선을 보여주기도 한다. 곧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는 쿠말과 샹가, 이 두 아기 호랑이의 수태와 탄생을 이런저런 눈을 빌려 우리가 지켜보게끔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로 하여금 이 아기 호랑이들의 생명의 증인이 되어 이들의 수난에 깊이 개입하게 하려는 초장의 서사와 시각 전술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바로 이 부분을 영화의 종결부와 더불어 생각해보면 두 마리 호랑이들이 다시 정글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을 맞이해 인간의 세계에 끌려가느라 미처 배우지 못한 사냥 기술을 배울 길도 열렸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이들과 짝을 지을 다른 암컷 호랑이가 과연 정글에 생존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는 과연 이들에게 사냥을 가르쳐줄 호랑이가 있을까라고 자문하지만, 그건 일단 마지막에 해결이 되고 더 중요한 것은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벌어졌던 일이 이들 형제 호랑이들에게 반복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는 두 세대만으로 적멸할 호랑이 가족의 시한부 삶의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가? 이 영화가 문명 비판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호랑이들을 정글에서 끌어내는 지역과 제국의 통치 세력들의 담합을 보여주고, 비서구 사람들과 비인간 동물들에 대한 이중의 식민화를 알레고리한 뒤 그들을 무사히 정글로 돌려보내서가 아니다. 비판이 페시미즘과 금방 맞물리는 것은 그들이 정글로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못할 조건 속에서 끝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 질문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질문을 하게 하는 <투 브라더스>가 안고 있는 좀더 심각한 문제, 즉 동물을 인간화(anthrophomorphism)해 인간 중심적으로, 감상적으로 취급하는 부분이다. 영화의 몇몇 부분에서 호랑이가 정말 저래? 저럴 수 있어?라는 동물학쪽이거나 리얼리즘적 의문을 심각하게 갖게 되면 바로 거기서 막 내려야 할 크고 작은 인위적 설정들이 <투 브라더스>에는 너무 많다. 전설적인 사냥꾼 에이든(가이 피어스)이 내미는 꿀사탕을 좋아하는 아기 호랑이는 물론 귀엽기는 하지만(그러나 대부분의 육식동물들은 당분을 소화시킬 수 있는 효소가 없기 때문에 사탕은 유해식품이다), 영화 내내 쿠말과 샹가는 물론 엄마, 아빠 호랑이도 사냥 한번 하지 않는다. 혹시 관객이 원주민과 유럽인의 영화 속 견해처럼 호랑이는 잡아 죽여야 할 포악한 동물이라는 적대감을 갖게 될까봐 노심초사한 결과이겠으나,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호랑이가 육식동물인지 초식동물인지 잡식동물인지 모를 정도다. 무엇보다 가장 비호랑이적인 것은 자신들과 가까운 인간에 대한 응시와 인지다. 1년이 지나도 잠깐 본 인간 친지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알아보는 것은 인간의 투사이지 야생의 본능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문명 비판쪽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야생을 인간화하려는 쪽으로 가고 있는 <투 브라더스>는 좋게 말하면 양가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나, 곰을 비교적 인간화하지 않았던 전작 <베어>와 비교하면 호랑이를 애완동물화했다.
동물 사이보그, 디지털 변이적 존재의 표상
여기까지가 비교적 상식적으로 동의하거나 이의제기할 수 있는 <투 브라더스>에 대한 평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 최근 애니마트로닉스 기법과 CG 기법을 통해 탄생 혹은 창안, 윤색 또는 각색된 많은 동물 이야기들은 이전의 <킹콩>이나 동물들과 인간의 애정을 다룬 본 프리라는 음악으로 더 알려진 <야생의 엘자>나 <늑대개>(1991) 등과는 개념적 대당이 다르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디지털 기술 전 동물과 인간이 나란히 등장하는 영화의 경우 이들은 자연과 문명, 비인간(동물)과 인간, 적자생존과 사회적 양생 등을 비교적 분명하게 표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에는 아날로그적 영화장치 과정(촬영, 현상)이라는 한 단계의 매개 과정을 거쳐 자연과 동물이 영화 관객에게 야생으로 재현된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컴퓨터그래픽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동물 로봇 모형 제작을 기본으로 하는 애니마트로닉스가 사용된 표정이 풍부하고 말하는 <닥터 두리틀>이나 <고질라> <투 브라더스> 등은 이미 인간과 동물, 자연과 문명이라는 이원적 표상을 넘어, ‘동물 플러스 사이보그’라는 탈근대 시대 디지털 변이적 존재의 표상인 것이다. 쓰카모토 신야의 <철남 데츠오>(1988)가 인간 유형 사이보그에 대한 재현이라면 최근 애니마트로닉스와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쥬라기 공원>의 공룡이나 2005년판 피터 잭슨의 <킹콩>은 동물 유형 사이보그라는 것이다. 이들이 가진 측량 불가능한 힘은 실은 야수의 힘이 아니라 디지털로 구현된 것이다. 또 영화 속의 사람들이 다가가 이들의 표정을 세밀하게 클로즈업으로 응시하게 되는 때는 애니멀적인 드러남의 순간이 아니라 애니마트로닉스적인 재현의 순간이다. 야생적 순수가 아니라 디지털적 조합인 것이다. 그래서 해골섬과 같은 원시에 들어가 발견해낸 킹콩은 ‘사이보그 콩’이며, <투 브라더스>의 소년 라울이 청년 호랑이 샹가의 얼굴을 마주보는 장면에서 등장한 호랑이는 사이보그 샹가이다. <투 브라더스>의 메이킹 필름은 이 소년의 내레이션으로 애니마트로닉스가 사용된 장면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동물 다큐멘터리나 내셔널지오그래픽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미 야생의 것, 날것을 대면할 수 없는 생태환경을 갖고 있는 탈산업사회의 관객에게 이러한 ‘야수’들은 이미 자연과 문명의 대립이나 갈등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상의 소진을 의미하고, 그 소진 안에서 사이보그, 제3의 존재가 마치 자연처럼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물 사이보그가 컴퓨터 칩과 네트워크에 ‘하드 와이어’되어 이미 사이보그화된 관객에게 깊은 응시를 보낼 때, 우리가 그의 응시를 이해하고 되받을 수 있는 것은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자연 혹은 그 상실에 대한 노스탤지어 때문이 아니라 그 동물도 ‘나’도 사이보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라는 틀로 사이보그 야수들을 읽지 말기를. 사이보그됨으로 우리는 반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