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열리는 영화 시사회의 낯선 풍경 중 하나는 양동이만한 점보 사이즈의 콜라와 팝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인터뷰도 예정돼 있고 기사도 써야 하는 부담에 먹고 마시라고 나눠주는 공짜 쿠폰을 잘 쓰지 않는데, 지난해 늦가을 LA에서 열린 <자투라: 스페이스 어드벤처> 시사회에 들어갈 때도 그랬다. 그런데 ‘<쥬만지> 속편’이라는 얕은 정보만으로 무심히 접한 <자투라…>는 보는 내내 허기가 지고 목이 타서 두고 온 팝콘과 콜라가 그리워지는 경험이었다. 한순간 우주로 공간이동했나 싶더니, 미친 로봇과 굶주린 괴물이 달려들었고, 무시무시한 블랙홀이 입을 벌렸다. 이런 강도의 모험이라면, 간접 체험도 힘이 드는 법이다.
도시 한가운데 정글 식구들을 떼로 불러들이던 <쥬만지>의 속편답게 <자투라…>는 보드게임을 하는 아이들을 먼 ‘우주’로 데려다놓는다. 아빠가 집을 비우자 형과 다툰 막내는 지하실에서 낡은 게임판을 발견하고 혼자 게임을 시작하는데, 게임판에서 뽑아든 예언 카드의 내용대로 불타는 운석들이 지붕을 뚫고 날아드는 것을 보면서, 집이 통째로 우주를 유영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게임을 계속하는 것밖에는 돌아갈 다른 길이 보이지 않기에 연달아 카드를 뽑아보지만, 덩치가 커진 장난감 로봇이 미쳐 날뛰고, 굶주린 우주 괴물 조르곤이 위협하는 등 산 넘어 산이다. 냉동 수면에서 깨어난 누나, 우연히 구조한 우주 비행사가 합세하지만, 집이 있던 그곳으로 돌아갈 길은 요원해 보인다.
<쥬만지> <폴라 익스프레스>의 작가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자투라…>는 32페이지에 24컷의 그림으로 이뤄진 원작의 단출함을 그대로 반영한, 단순하고 명료한 작품이다. 보드게임 때문에 우주의 망망대해에서 떠돌게 된 세 남매 사이에 (전엔 없는 줄 알았거나 없는 척했던) 우애가 싹튼다는 이야기. 이처럼 비현실적인 모험을 통해서 가족애를 재발견한다는 내용의 영화는 한두편이 아니었지만, <자투라…>가 특별한 것은 ‘1980년대 복고풍의 가족영화’라는 데 있다. 그림책이 원작이고 보드게임이라는 구식 놀이가 소재인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아날로그’의 느낌을 물씬 풍긴다.
실제로 <자투라…>는 컴퓨터그래픽의 힘을 빌리는 대신 세트와 캐릭터의 대부분을 실물로 제작하고 촬영하는 쪽을 택했다. 아역배우들도 빈 블루스크린에서 연기한 것이 아니라, 흔들리고 부서지고 불타는 세트에서 와이어에 매달리고, 실제 크기의 로봇과 괴물에게 쫓겨다니며 혼비백산하는 ‘실제 상황’을 보여주었다. “가능한 많은 것을 실제로 만들고 싶었다. 디지털 효과가 유행하기 전에 성장한 내 세대들에겐 그게 더 현실적이다. 과거의 기술을 반영하고, 그 영화들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에드거 버로스의 SF소설, 레이 해리하우젠의 애니메이션, <백 투 더 퓨처> <E.T.> <그렘린> 등 80년대 SF영화들의 감성과 온기를 되새겼다는 배우 겸 감독 존 파브로(<엘프>)의 설명이다.
그런 까닭에 <자투라…>는 ‘21세기의 SF영화’답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시도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감독이 전하듯 80년대 SF어드벤처영화에 대한 향수를 맛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어른이 즐기기엔 이야기가 단순하고, 아이가 보기엔 어렵다는 균형의 문제가 눈에 띄지만, 적어도 영화 속 어른들과 아이들이 이루는 앙상블은 매끈한 편이다. 비중상 단역에 불과하지만 게임 밖 현실에 무게감과 리얼리티를 보태는 팀 로빈스의 존재, “우린 운석들을 피하고, 로봇에 쫓기고, 블랙홀에 빠졌다”고 게임 속 환상 체험을 천진하게 회상하는 아역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미국에선 지난해 11월 개봉했고 한국 극장가엔 2월23일 첫선을 보일 예정이다.
감독 존 파브로 인터뷰
“80년대 스필버그식 영화를 좋아한다”
-CG 사용을 자제한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도였나. =요즘은 CG를 사용하는 것이 트렌드처럼 되어 있지만, 내 눈엔 CG를 과다하게 사용한 작품은 비디오 게임처럼 보인다. 내 세대는 CG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현실감을 재현한 영화를 보면서 자랐고, 나 역시 그런 요소를 선호한다. 그래서 집과 우주선 같은 미니어처와 세트는 실제로 만들어서 관객이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길 바랐다. CG는 아무리 최신 기술처럼 보여도 조금만 지나면 구닥다리처럼 보이지만, 세트를 활용한 리얼리티는 오래 지속된다는 장점도 있다.
-어린 배우들과의 작업은 어땠나. =아이들 모두 영리했고 나 스스로도 의식적으로 어른처럼 대했다. 하지만 역시 어리다 보니 계속해서 촬영에 집중할 수 있도록 흥미를 유발해야 했다. 또 와이어를 장착하고 스턴트를 해야 했기 때문에 항상 안전에 신경써야 했다.
-감독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이나 정서가 반영된 듯 보인다. =1980년대 스필버그 영화들을 좋아한다. <E.T.> <죠스> 같은 영화처럼 처음엔 도시인의 전형적인 일상처럼 시작되지만 곧 특별한 상황에 빠져드는 그런 이야기들. 나 역시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원작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보탠 상상은 어떤 것들이었나.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원작에는 다수의 삽화가 포함되어 있는데, 우주로 간 집, 유성, 조르곤 등 굉장히 강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런 느낌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확대하고 싶었다. 각본은 <스파이더 맨> <우주전쟁> 등을 썼던 데이비드 코엡이 맡았는데, 그의 각본은 영화를 섬세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야기의 디테일은 각본가의 영향이 컸고, 영화의 스타일엔 내 색깔을 많이 반영했다.
-아빠 역할에 팀 로빈스를 특별히 캐스팅한 이유가 있는지. =팀 로빈스는 인정받는 대배우인 동시에 ‘아빠’의 느낌을 가장 잘 전해줄 수 있는 배우이기도 했다. 오스카를 받은 배우를 도입부에 아빠 역할로 등장시켜, 관객에게 ‘단순한 애들 영화’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참고로 캐스팅이 아주 어려웠다. (웃음)
배우 팀 로빈스
“우리 부부는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지 않는다”
-<우주전쟁>에 이어 또다시 SF장르다. =영화를 고를 때 각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자투라…>는 내가 신뢰하는 작가인 데이비드 코엡이 썼다. 각본도 맘에 들었고 촬영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영화 속에서처럼 나 자신도 애들을 사랑하는 아빠라 장기간 집을 비우고 싶진 않다.
-구체적으로 작품의 어떤 점에 이끌려 출연하게 됐나. =나도 아이들도 원작자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작품들을 굉장히 좋아한다. <쥬만지>나 <자투라…>에는 전세계 어느 나라 어린이도 매료시킬 수 있는 판타지가 담겨 있다. 순수한 판타지이면서 집 안에서 펼쳐지는 모험이란 컨셉이 굉장히 쿨하다고 생각했다. 배우를 하다보면 가끔 선물처럼 느껴지는 작품을 만날 때도 있는데 <자투라…>가 그런 경우였다. 처음엔 개런티도 안 받고 출연하려고 생각했으니까. (웃음) 작업이 무척 즐거웠던데다 출연료로 다음에 제작할 영화를 준비할 수 있게 돼 고맙기도 하다.
-자신의 정치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편인데, 이와 관련해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있나. =할리우드는 다양성이 공존하는 곳이다. 영화 한편을 만들고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선 많은 돈이 필요하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스탭과 배우를 선택할 땐 정치적 입장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물어본 적도 없다. 함께 영화를 만들고 즐긴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할 뿐이다.
-블록버스터급 영화와 독립영화를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메이저의 블록버스터에 출연할 때는 숙소도 좋고 음식도 훨씬 맛있다. (웃음) 그런데 같은 메이저 영화사의 작품이라도 작은 영화를 만들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작은 이야기를 만드는 데는 지원규모가 축소되는 것이 사실이다.
-당신과 수잔 서랜던은 믿음 깊은 동지 같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나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고(웃음), 아이들에겐 훌륭한 엄마다. 우리에겐 특별한 비결이 하나 있는데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지 않는다는 거다. 중요한 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아니라 부부가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피플> 표지에 실리면 화제는 되겠지만, 6개월 안에 이혼하는 게 다반사더라.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