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니 911>이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있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힘을 벗어난 악질 말썽꾸러기 아이들을 교화하기 위해 베테랑 ‘내니’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내니들은 한 가정에 며칠간 머무르며 부모의 잘못된 교육 방식부터 아이들의 행동 방식까지 집안 곳곳에 뿌리박힌 ‘나쁜’ 습관들을 지적한다. 엄격한 표정과 딱딱한 영국식 영어로 그녀들은 다양한 가정의 다양한 패턴을 철저히 무시하고 오직 규칙과 규율의 중요성만을 강조한다. 그녀들이 떠날 때쯤이면, 문제투성이였던 가정은 완벽하게 조용하고 평화로워진다. 아이들은 그 짧은 시간에 유순하게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로 재탄생하고 집안일에 무관심했던 남편은 자상해지고 신경증에 시달리던 아내는 여유를 찾는다. 외부에서 투입된 내니의 ‘법’이 벼랑 끝의 가정을 구하는 셈이다.
<내니 맥피: 우리 유모는 마법사>를 보면 그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떠오른다. 다만, 이 영화에는 아이들에게 하루 종일 시달리느라 하루하루 녹초가 되어 시들어가는 엄마가 없다. 엄마는 이미 죽었고 그 자리에는 일곱 아이들을 감당하지 못하는 하녀들과 그들의 장난에 하루도 견디지 못하는 유모들이 있다. 생각해보라. 아빠가 수수방관하고 엄마가 모든 일을 떠맡았던 그 리얼리티 쇼에서조차 아이들은 난장판이었다. 그런데 <내니 맥피…>에서처럼 아빠는 여전히 방관자인데, 엄마조차 없다면? 영화는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들을 극단으로 몰아간다. 아이들은 단순히 반항할 뿐만 아니라, 폭력적으로 잔인해져간다. 물론, 영화에서 아이들의 잔혹함은 사랑스러운 외모와 천진난만한 동심으로 가려져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의 언어와 행동은 소름끼칠 정도로 끔찍하다. 이를테면, 아이들은 소형 단두대를 만들어 인형들의 목을 치고 부엌을 점령하기 위해 하녀를 테이블 위에 묶어둔다. 이쯤 되면 떼로 몰려다니며 폭력을 일삼는 아이들의 존재는 귀엽기는커녕 공포 그 자체로 다가온다.
그러나 아빠(콜린 퍼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홀로 자신만의 방에 들어가 죽은 아내가 즐겨 앉던 의자를 향해 낭만적인 헛소리만 해댈 뿐이다. 그는 당장이라도 바닥날 가정의 재정상태를 걱정하며 억지 재혼을 고려 중이다. 아이들은 아빠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아빠는 아이들의 폭력성 뒤에 감춰진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진 이 가정 내부의 간극은 과연 그 무엇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엄마가 되고 싶어하는 착한 하녀는 자신의 열등감도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우유부단하고 유능한 유모들은 아이들의 폭력을 감싸안을 정도의 애정을 갖고 있지 않다. 바로 이 시점에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해결사가 ‘내니 맥피’(에마 톰슨)이다. 그녀는 단순한 유모가 아니라 이 가족의, 나아가 이 영화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이다(내니 맥피 역을 맡은 에마 톰슨이 이 영화의 각색자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녀가 모든 문제를 풀어줄 것이므로 걱정은 없지만, 그 때문에 워킹 타이틀 특유의 ‘서로 부딪치고 화해하는’ 오밀조밀한 이야기의 결은 너무 심심해졌다. 예컨대 <어바웃 어 보이>에서처럼 아이와 그가 맺는 관계의 이야기들에 세심하게 공을 들인 흔적은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말이다.
내니 맥피는 자신을 정부에서 파견된 유모라고 소개하지만, 마귀할멈처럼 추악한 그녀의 얼굴에서는 이미 현실을 뛰어넘은 존재의 초능력적인 기운이 넘쳐난다. 바로 이 초능력, 내니 맥피의 마법과 그 마법이 조장하는 공포가 영화가 아이들을 다스리기 위해 내놓은 최후의 대안이다. 공포를 야기하는 아이들의 행동에는 더 큰 공포로, 아이들의 잔머리에는 이성을 넘어서는 마법으로 대응하기. 공포를 조장하여 아이들 스스로 자신들의 행동을 검열하게 만들기. 어쩐지 이 대단한 해결사의 해법은 위험해 보인다. 내니 맥피가 휘두르는 지팡이의 초인적인 힘은 아이들의 폭력성보다 훨씬 더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언제나 지팡이의 힘으로 아이들을 침묵시킨다.
그리하여 이 영화 속의 마법과 환상은 아이들이 함께 참여하여 또 다른 세상을 열어주는 놀이터가 아니라, 아이들을 조정하는 외적 힘, 절대적인 힘으로 버티고 있다. 마법의 주인은 전적으로 내니 맥피이다. 그 결과, 아이들은 내니 맥피의 강제적인 규율에 서서히 길들여지기 시작하고 심지어 자신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그녀가 자신들의 편이라고 믿기에 이른다. 물론 영화는 이러한 자발적인 복종에서 아이들의 긍정적이고도 성숙한 변화를 찾는 듯하다. 아이들은 어른의 세계와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대신, 다만 그 세계를 수용하는 법을 배우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집안에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와중에도 아빠는 여전히 자기 세계에만 빠져 있다. 그는 내니 맥피가 이룩해낸 ‘평화’에 무임승차하여 아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일들 근처에서 여전히 속 터지게 서성대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내니 맥피…>는 능력있는 내니와 무능력한 아빠의 두축으로 진행되다, 아빠의 무능력을 내니의 마법으로 끊임없이 가려주는 영화이다. 그런데 내니가 떠나고 난 뒤, 엄마의 빈자리는? 아빠의 무능력은? 걱정마시라. 내니는 자신보다 착하고 젊고 예쁜 엄마를 심어주고 떠나는 걸 잊지 않는다. 어찌됐건 아이들이 자라는 데 엄마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다(라고 영화는 은근히 강조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아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얻었다. 혹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이들이 아니라 무능력한 아빠들의 뻔뻔한 환상이 아닐지.
영화는 내니 맥피의 입을 빌려 “필요하지만 원하지 않을 땐 있을 것이고 원하지만 필요치 않을 땐 떠날 것이다”라는, 마치 이 영화의 주제가 함축된 듯한 의미심장한 유모의 철학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문득 드는 생각은 필요할 때와 원할 때를 구분하는 그녀의 논리가 참으로 이상하다는 것이다. 유모의 논리는, 이 영화의 철학은, 이렇게 바뀌었어야 옳다. ‘원할 때 있어주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