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때 시골 역장을 꿈꾼다, 라고 하면 거짓말일까. 아니 그것보다는 잠깐 그들의 운명을 부러워하는 때가 있다, 가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기차엔 어떤 서정이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기찻길은 인생의 시적인 비유처럼 보인다. 정말 그런 때 없는가. 철길을 한없이 걷고 싶은 때. 롭 라이너 감독의 <스탠 바이 미>에 나오는 장면처럼, 친구들과 철길을 따라 가는 여행을 하고 싶은 때. 또는 기차 맨 뒤칸에서 <박하사탕>처럼 지난 세월을 철길처럼 굽어보고 싶은 때. 아마 이 거부하기 어려운 철길의 매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할 것 같다. <스테이션 에이전트>라는 영화 덕분이다.
핀이라는 사람이 있다. 사색적이며 책을 보기를 좋아하고 눈이 맑고 목소리가 굵은 남자다. 장난감 기차를 수리하는 것으로 봐서 손기술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고, 술과 담배와 산책을 즐긴다는 점에서 조용한 쾌락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카페 뤼미에르>에 캐스팅이 되었어도 좋을 기차 오타쿠다. 기차에 관한 영화를 찍는 동호회에 가서 회원이 찍은 기차 영화를 보는 게 취미다. 그는 살아가는 데 딱 필요한 만큼 키가 크다. 쓸데없이 키 큰 사람들의 놀림이 가끔 그의 걱정이다.
그러나 친구이자 고용주인 헨리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핀의 인생에 변화가 온다. 핀 못지않게 조용한 쾌락주의자이자 기차 오타쿠인 사장은 핀에게 시골역과 땅 1200평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너무 큰 축복도, 무시할 만한 유산도 아닌, 그러나 기차 오타쿠의 우정으로 물려줄 수 있는 최선의 유산을 받기 위해, 핀은 철로를 따라 걸어서 기차역으로 간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더 위대한 재산을 만들어가게 된다. 그건 우정이다.
지금은 쓰지 않는 폐쇄된 시골역에 기차광이 오면서, 사람들이 조금씩 변한다는 것, 그걸 지켜본다는 것이 이 영화가 주는 최대의 쾌락이자 감동이다. 핀은 퇴락한 동네에, 아날로그적이고 웅숭깊고 시간이 많이 드는 쾌락을 친구들에게 서서히 전염시킨다. 역 앞에서 핫도그를 파는 조가 먼저 핀에게 기찻길 걷기의 즐거움을 배운다. 그림을 그리는 올리비아가 그 행렬에 동참한다. 화면 오른편에서 조그맣게 걸어나오는 핀을 따라서 조, 그리고 그 뒤에 올리비아가 철길을 걷는다. 길동무라는 비유가 더없이 들어맞는 장면이다. 느리게 산다는 것, 유유자적한다는 것, 산책에서 인생을 돌아본다는 것. 배경도 나이도 성도 제각기 다른 세명의 산책학파, 소요학파가 우정을 쌓아가는 게 이 영화다.
단순한 이야기지만 세부의 힘은 매우 강해서 매 순간 조바심을 느끼며 화면에 코를 박게 된다. 과연 이 어설픈 연대가 굳건한 우정으로 향하기는 하는 것인지, 핀의 작은 키를 동네사람들이 놀리거나 왕따를 시키지는 않을지, 키 큰 친구들이 갑자기 변덕을 부리지는 않을지 궁금해진다. 핀을 보자마자 사진을 찍는 슈퍼마켓 주인, 어떻게 놀려볼까 궁리를 하는 동네 청년들, 핀을 보고 놀라 쓰러지는 도서관 직원이 군데군데 나타나 우리 보통 관객의 평범하다 못해 천박하며 위험한 호기심을 대신 드러낸다. 그러나 영화는 관객 또한 배려하는데 ‘난쟁이’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을 천박하다고 꾸짖는 대신, 호기심이 우정의 첫 단추가 될 수 있다고 넌지시 말해준다. 꾸밈없는 조에게서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핀의 아슬아슬한 운명을 어떻게 지켜봐야 할까. 영화는 유머와 아늑함으로 관객을 감싸안는다. 말수가 없는 핀이 모처럼 발휘하는 유머 감각, 핀이 거절해도 끄떡도 하지 않는 낙천주의자 조의 너스레, 단아한 모습과 달리 실수 연발인 올리비아의 귀여움이 영화를 풍성하게 만든다. 호기심으로 시작해서 존경의 눈빛으로 핀을 바라보게 되는 꼬마 소녀 클레오의 눈빛, 처음엔 놀랐다가 핀을 신뢰하게 되는 도서관 직원 에밀리를 통해 우리 관객도 핀의 친구가 된다.
이 영화의 아늑함은 함께 나누어 먹는 데서 나온다. 핫도그 트럭 앞 공터에서 조가 구운 고기를 나누어 먹는 장면을 카메라는 멀찍이서 잡는다. 나뭇잎은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떨어져 핀과 올리비아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처음으로 함께 식사하는 장면으로 보여주는 ‘우정의 발생학’이라 할 만하다. 이 우정의 발생학은 우리 안의 행복에 대한 갈망을 건드린다.
물론 우정은 걷고 또 걸어도 끝이 없는 긴 철길과도 같다. 폭력적인 사람들의 호기심 앞에 무방비 상태인 핀, 아이를 잃은 충격으로 마음의 문을 꼭 닫고 들어간 올리비아는 어떻게 서로의 마음의 창을 열 수 있을까. 도시락까지 싸와서 친구 집 앞에서 친구가 마음을 풀 때까지 기다리는 장면은 우정이 얼마나 많은 눈물과 기다림 이후에 가능한 것인가를 묻는다. 말하자면, 폐쇄된 역은 쉽게 문을 열지 못하는 상처받은 마음이며, 끝없이 이어진 철길은 우정의 가능성이다.
<파니 핑크>나 <바그다드 카페>처럼 낯선 이들의 굳건한 연대를 부러운 눈으로 본 이라면 이 영화에서 우정과 맞바꿀 수 있는 건 거의 없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엔 또한 그만큼의 큰 폐단이 있으니, 영화를 보고 나면 당장 철길로 달려가고 싶어 안달이 나게 된다는 것이다. 철길에 대한 끝없는 허기를 어떻게 채울 것인지에 대해서 영화는 무책임하다. 어서 빨리 철길이 나오는 다른 영화를 허겁지겁 보거나 야간열차라도 타러 나가야 그 마음을 겨우 달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이 모든 미덕들이, 철길이 없었으면 가능했을까 그런 생각까지 든다. 기차는 길을 따라 흘러오고 길을 따라 흘러나간다. 핀은 기찻길을 따라 낯선 곳으로 흘러들어가서 낯선 친구들과 영혼을 나눈다. 휴대폰도 전화도 없이 살면서도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으며, 친구가 보고 싶으면 친구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는 핀의 삶 자체가 철길을 닮았다. 철길을 의인화한 캐릭터랄까. 핀은 우리 마음에 흩어진, 또는 잊혀진 아날로그의 철길들, 그 철길에 피었던 코스모스, 철길을 함께 걸었던 동무들을 불러 모은다. 영화 속에 반복되는 철길 산책 장면처럼, 화면 오른쪽으로 걸어나오는 핀과 낙천주의자 조와 나이 들어 더 아름다운 올리비아의 뒤를 따라 하염없이 걷고 싶다. 친구와 마냥 걷기만 해도 무척 행복했다는 추억이, 그걸 다시 반복하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으로 뒤바뀐다. 마음 통하는 친구와 마시는, 비싸지 않지만 향이 오랫동안 남는 와인 같은 영화다. 2003년 선댄스영화제에서 관객상, 각본상, 심사위원특별연기상(패트리샤 클락슨)을 받았다.